2장 — 두 사람만의 공기

by someformoflove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날의 공기는 분명 달랐다.


언제나처럼 우연한 상황이었다. 전날 퇴근 무렵 갑자기 잡힌 촬영 일정, 담당자가 펑크 났다는 연락, 업무의 흐름상 자연스럽게 준과 하린이 남게 된 것. 말하자면 흔한 돌발 상황이었고, 별다를 것 없이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그건 아주 작고 무해한 변화였지만, 동시에 선명했다. 회의실을 벗어나 낯선 외부 공간에 둘만 남게 되는 일은 흔하지 않았고, 함께 움직이고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하는 상황은 둘 사이의 묘한 침묵을 강조했다. 차 안에서, 로케이션 장소를 향해 달려가던 중 아무 말도 없었다. 라디오는 꺼져 있었고, 에어컨은 너무 조용했고, 창밖 풍경은 평소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정지된 느낌. 말이 없으니 시간도 느리게 흘렀다. 하린은 조수석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고, 준은 그녀의 옆모습을 힐끗 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건 거의 반사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말이 없을 때 유독 멀어 보였다.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음에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임에도, 준은 그 순간 그녀와 아주 먼 데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거리감이 싫진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편안한 간격 같은 것. 어쩌면 둘 사이에는 처음부터 그런 공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착한 장소는 바람이 많이 부는 공원 언덕 근처였다. 사람도 없었고, 나무는 벌써 잎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잔디는 누렇게 말라 있었고, 어딘가 뻑뻑한 하늘이 시야 위를 눌렀다. 촬영 팀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그들은 근처를 걷기로 했다. 누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니었고,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보니 걷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거였고, 자연스럽게 발이 옆으로 옮겨졌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말이 없었다. 걷는 소리만 들렸다. 바람이 잎을 굴리고 있었고, 하린의 머리카락이 잔잔히 흩날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준은 그 순간 그녀의 손등을 보았다. 너무 가늘고 하얀 손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됐다. 말 대신 시선이 움직이고, 그 시선이 감정을 설명했다.


걸음을 멈췄을 때, 그들은 벤치 옆에 서 있었다. 앉자는 말도 없이 하린은 그냥 앉았고, 준도 따라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었다. 이상하게 편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하린은 주머니에서 커피 음료를 꺼내 마셨고, 준은 가방 속에서 같은 걸 꺼냈다. 그건 우연이었지만, 동시에 오래된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곳엔 분명 둘만의 공기가 있었다.


그 공기는 약간의 경계와 약간의 안도, 약간의 기대와 약간의 망설임이 섞인 모호한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치 날씨가 애매하게 흐리고 비가 올 듯 말 듯한 날의 기분처럼, 옷을 입었는데 덥고, 벗으면 추운, 그런 종류의 온도. 그런 온도에서 사람은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그 조심스러움은 때로, 감정보다 더 깊은 감각으로 남는다.


하린이 말했다. “바람 세네요.” 아주 짧은 한마디였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 말은 어떤 정보도 담고 있지 않았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둘 사이의 침묵을 설명해 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너무 센 바람 앞에선 많은 걸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린은 다시 조용해졌고, 준도 입을 닫았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세었고, 햇빛은 어딘가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아마 둘은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아 있을 것이다. 몸은 조금 기울었고, 시선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그림자는 다소 길게 늘어져 있고, 어쩌면 서로를 보지 않지만 동시에 서로를 가장 가까이 느끼고 있는 그런 장면.


그날,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접촉도, 고백도, 충동도 없었다. 그저 걷고, 앉고, 말없이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하루는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준은 그 이후로 하린을 떠올릴 때 그날의 공기를 함께 떠올렸다. 머리카락에 스치던 바람, 멀리서 들리던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같은 음료를 마시던 기억,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잠깐 스친 눈빛. 그 눈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됐다.


그건 시작도 아니었고, 사건도 아니었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움직인 순간이었다. 공기가 바뀌면 감정도 따라 움직인다는 걸, 그날 그는 처음으로 정확히 체감했다. 그리고 그 느린 감각은 앞으로 아주 천천히, 둘 사이를 조금씩 바꿔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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