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 우연을 가장한 마음

by someformoflove

그날도 그냥 그런 하루로 시작됐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같은 동작으로 전기포트를 눌렀고, 출근 준비는 습관처럼 이어졌다. 샤워를 하고 옷을 고르고 양말을 찾는 사이 고양이는 조용히 따라다녔다. 준은 자신이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사실이 가끔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인간과 다른 생물 하나가 이 집에 조용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 말이 없고 요구가 거의 없지만 늘 거기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건 묘한 위로였다. 그날 아침에도 고양이는 식탁 아래에서 느릿하게 기지개를 켜고, 준은 그 움직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문득, 하린이라면 이 고양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생각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런 식으로 하린이 자꾸 일상 속에 등장했다. 식사할 때, 출근길에, 회의 중 문득 손을 볼 때, 점심시간에 그녀가 좋아할 것 같은 메뉴를 발견했을 때, 심지어 물을 마시다가도 문득 그녀가 조용히 컵을 드는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감정이란 건 정말 예고 없이, 허락 없이, 경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요즘 들어 자주 실감하고 있었다.


하린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주간 준과 나눈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적은 대화보다 훨씬 많은 감정이 눈빛과 침묵 속에서 오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단순한 호감 이상의 것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준은 요즘 들어 자주 거기에 있었다. 자리에 앉아있을 때도, 복도를 지나칠 때도, 사무실 창에 반사된 그림자 안에서도. 하린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원래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고, 그런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해 왔지만, 요즘은 그 조심스러움이 자꾸 흔들렸다. 말을 걸려다 멈추는 일이 많았고, 웃음이 나오다가도 어색하게 접히는 날이 많았다. 준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다가 그가 이미 시선을 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돌린 적도 있었다. 이런 자신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답다고 느꼈고, 어쩌면 그 감정 안에서 조금은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날은 회의가 길었다. 팀 전체 회의가 끝나고 실무자 회의가 이어졌고, 쉬는 시간도 없이 계속된 보고는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유독 준은 그날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라면 말없이 받아넘길 수준의 질문에도 몇 번이나 말을 고르다가 멈추었고, 숫자를 틀리고 나서도 바로 정정하지 못했다.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스스로를 자꾸만 의식하고 있었다. 하린은 그런 준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고, 준은 그런 하린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공기엔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그건 둘만이 알아챌 수 있는 아주 조용한 흐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다들 자리를 비웠을 때, 준은 물을 마시기 위해 사무실 밖 복도로 나섰다. 평소보다 텅 빈 복도, 발소리조차 맑게 울리는 시간. 그리고 멀지 않은 복도 끝에서 하린이 돌아섰다.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리는 동작, 그러나 시선은 이미 잠시 머물렀다. 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하린은 그 모습에 잠깐 멈칫했다. 그 장면은 아무 일도 아닌 척 지나갔지만, 두 사람의 마음엔 오랫동안 남았다. 그런 날이 많아졌다. 아무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아무 대화도 없었지만, 하루 전체를 흔들어버리는 조용한 접촉들.


퇴근길, 준은 집에 돌아와 고양이 밥을 챙기고, 방 안에 등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손엔 늘 마시던 맥주 한 캔이 있었고, TV는 켜지지 않았다. 고양이는 그의 발치에 조용히 누워 있었고, 그는 그 정적을 피하지 않았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있고 싶었다. 온종일 무언가를 감추느라, 조심하느라, 말하지 않느라 힘들었던 하루를 정리하듯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린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자세, 커피를 조용히 마시는 입술의 움직임 같은 것들. 그 모든 것이 자꾸 그의 오늘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감정을 참는다는 건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감정이 작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쪽으로 응축되어 더 선명해진다는 걸 그는 체감하고 있었다.


하린은 퇴근 후 거울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화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그저 멍하니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아무 말 없이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준다.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몇 번이나 웃음을 억눌렀는지, 몇 번이나 시선을 피했는지, 몇 번이나 말을 삼켰는지를. 그녀는 자신의 눈이 이상하리만치 피곤해 보인다는 걸 알아챘고, 그 피로의 정체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데 더 무서움을 느꼈다. 감정이란 건 어쩌면 이렇게 일상을 조금씩 잡아먹으며 번져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조용하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밤이 깊어졌다. 둘은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공간에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같은 시간에 물을 마셨고, 같은 시간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내려놓았고, 같은 시간에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그리고 같은 이름을 조용히 떠올렸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말한 것 같은 감정.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전해진 감정. 그들은 둘 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아직 어색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호감은 아니라는 것도, 더는 부정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서의 첫 마주침은 짧았지만 깊었다. 인사 대신 눈빛으로 스친 감정은 확실했고, 그 감정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둘의 하루를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더는 모를 수 없었다. 감정은 이미 틈 사이로 스며들었고, 어제와 같은 오늘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다는 것, 그 인식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바뀌는 시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우연을 가장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임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전 05화4장 — 조금 이상했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