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인간에 대한 신뢰를 깨닫는 시간
언어와 관습이 다른 나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부풀어 오르는 호기심만큼 여행자의 가슴 한편에는 두려움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유창하게 그들의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복잡한 감정이 덜할까? 그렇다 한들 생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잘 소통할 수 있을지, 고스란히 눈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지갑을 털리는 것은 아닐지, 매 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만큼 소통의 의미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드물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방인들의 세상을 보고, 느끼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깊은 뜻을 나누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30대의 자매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었다. 처음에는 여행사의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출발했다.
9박 10일 동안 영국과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거친 바쁜 여정은 프랑스에서 마무리되고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만 남겨둔 날 저녁, Paris에서의 짧은 일정이 자매에게는 못내 아쉬웠다. 생각 끝에 두 여자는 일행에서 벗어나 둘만의 오붓한 여정을 좀 더 누려보기로 결정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자매는 무작정 파리 시내를 누비고 다니며 열렬한 자유를 만끽했다. 그로부터 하루 이틀.. 3일째 파리 시내를 돌고 나니 어느덧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한 동생이 지하철 노선도를 살피며 말했다.
“언니, 우리 좀 더 멀리 나가 보자. 여기 보니 교외선도 있는 모양인데 아무거나 타고 나가볼까? 파리는 이제 지루해~!”
“그럴까? 왠지 우리가 점점 용감해지는 느낌인데~?”
다음날, 자매는 <RER>이라는 이름이 붙은 열차에 올랐다. 기차는 파리 외곽으로 나아갔고, 시내와는 또 다른 풍경이 차창 밖으로 영화처럼 펼쳐졌다.
“어머나~~, 유럽 어딜 가도 그렇지만 어쩜 여기는 시골도 이렇게 멋지니? 여기서 살고 싶다!”
중간에 이름도 잘 모르는 역에서 무작정 내린 두 사람은 한적한 이국의 변방에서 시간과 공간을 비껴 난 듯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여유롭고 유쾌한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돌길을 따라 마을로 걸어 들어가니 소박한 공원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도서관과 작은 연못도 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파리 교외의 마을을 둘러보고,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매는, 방전되어 언제 어디서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다고 여겨질 만큼 덜그럭거리던 영혼의 주머니 하나가 어느새 묵직하게 충전된 기분이 되었다.
"나 이제 다시 또, 한 십 년은 끄떡없을 것 같다! 넌 어떠니?"
"맞아, 집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트렁크를 끌어도 그냥 힘이 나더라니... 이제는 정말 언니 말처럼 나도 한동안은 씩씩하게 살아낼 것 같네!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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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질 무렵이 되자 자매는 숙소가 있는 파리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천천히 향했다.
그리고 플랫폼에서도 한참 동안 서성이며 기차를 기다렸으나 어찌된 일인지 기다리는 기차는 끝내 오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착시간을 알리는 안내판의 불도 꺼져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보낸 후에야, 젖은 창호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어둠이 내려앉는 즈음에야 자매는 철도가 파업 중임을 알게 되었다.
파업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시작되었고, 기차는 언제 운행이 재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기차를 타러 왔다가 역사 안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되돌아가는 현지인 남자를 붙잡고, 용기를 내어 더듬거리는 영어로 물어본 뒤에야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자매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파리 시내로 돌아가는 다른 교통수단은 어디 있는지 어디서 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표현을 할 수 없으니 자매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숨만 쉴 뿐이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들 앞에, 철도파업 사실을 알려주고 돌아간 중년 남자가 얼마 후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숙녀분들, 어디까지 가십니까? 오늘은 기차가 오지 않을 거예요.”
그의 질문에 긴장한 언니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파리, 생 조르주 역에 가야 하는데요, 여기서 버스터미널은 얼마나 먼가요?”
중년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이 타고 온 승용차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떨칠 수는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을 어떻게 믿고 덥석 차에 오를 것인가.
'어머나, 다행이다...태워달라고 할까....'
'정말 그래도 될까...그래도 괜찮을까...'
언니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조금 더 용감하고 낙천적인 동생이 결심한 듯 먼저 나섰다.
두 사람은 결국 다급한 마음에 동승했으나
낯선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서, 낯선 나라의 낯선 길을 달려가는 내내
자매는 불안감에 가슴을 떨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Paris>라는 이정표가 나타나자
두 사람은 조용히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얼마를 더 달려간 뒤,
남자는 친절하게도 생 조르주 역 부근에 있는 숙소 앞까지
두 사람을 데려다주었다.
낯선 땅에서 뜻밖의 일을 당한다면 아무리 그 나라 언어에 유창하다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자매가 맞닥뜨린 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이 처한 절박한 현실이 생면부지 중년 남자의 친절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일말의 두려움은 있었을지언정.
그는, 두 여성 여행자에게서 어쩌면 자신의 가족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 진심으로 소통한 것이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굳이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공감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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