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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Oct 09. 2024

고해성사

_그밖에 알지 못하는 모든 죄까지도 용서하소서

-읽기전에..

유치할지도 모릅니다. 어쭙잖은 신앙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랜시간 냉담한 어설픈 천주교신자입니다.

이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지난 시간에 대한 고백이므로 읽고 불편할 수도 있으니... 공감하기 쉽지 않을 수 있으므로....패스하셔도 됩니다.





10월6일                       


정말로 몇만 년만에 내 발로 찾아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간신히 더듬어 보자니, 적어도 1년은 된 것같다.

고해성사를 한 것도 성당에 마지막으로 간 것도.


최근의 수술과 입원, 휴직 등의 사건들을 겪으며

한편으로는 의기소침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아무리 기다려주어도 도무지 정신 못차리고 나대는 철딱서니에게 마침내 칼을 들이댔던가,

당신께서는,

보다 겸손하라는 깨달음을 주시느라, 논리와 이성뿐 아니라 온몸으로 그것을 깨닫고 행하라는 가르침을 주시느라!


문득 어쩌면 신의 전령이었을까 싶은, 칼자루를 쥔 의사에 의해,

뜻밖에 가슴팍을 칼로 째고 살가죽을 오려낸 뒤,  

부족한 피부를 잡아당겨 꿰맨 탓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조금더 멀리 시선조차 바닥을 향하게 만든 것은 오로지 당신의 뜻, 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나날이 하루이틀....


차라리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처음부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하는 따위의 자조적인 비애감도 들지도 않았다.

다만, 칼을 대지 않고도 나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으나,

더이상은 봐줄 수 없다 싶으셨을까,

도무지 스스로 깨닫고 제발로 땅을 북북 기어 당신 앞에 엎드려 참회하기를..., 이 정도는 충격을 받아야 정신을 차릴 듯하다 여기셨을까, 그래서 끝내 더이상 알아차리지도 반성하지도 변화하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탕아, 가여운 나에게, 또 한번 뜨거운 손 내밀어 회생시켜주시는가.


결코 신실한 믿음의 신자도 아니었다.

그저 절체절명의 지나간 어느 순간, 神_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결코 그럴 수 없음이 명백한 결과지를 받아들었던 그때, 나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분명히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간사하기 이를데없는 어리석음의 표본인 나는 그 감사과 기쁨의 순간을 이내 망각하고 회오리같은 현실의 희노애락에 몰두하여 촐랑거렸을 뿐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직전,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소명을 따르기로 하면서도 어머니가 천국에서 하느님 곁에 영원한 안식의 시간에 들어가심을 소원하고 믿으면서도 나는 그저 한없이 교만했다.


신의 뜻은 신의 뜻이고, 삶이란 결국 나의 최선과 열정으로 점철되어야만 한다,고.

늘 최선을 다하고 열렬하게 살아가노라면 당신께서 인정해주시겠거니 하고.


그런데 아니었던가보다. 아니었다.

나는 교만의 화신이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나는 말만 번지르르한 교만과 더러운 욕망의 버러지였던가보다.


뜻밖의 진단과 수술입퇴원의 과정에, 생각지 못했던 형제자매들의 응원과 지원,

천국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뜻밖에 도착한 선물과....그 모든 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오로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불현듯, 그 모든 시그널은 정말로 하느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심을 깨닫게 했다.

마침내, 한없는 교만에서 벗어나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이며 차라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10월6일 일요일, 나는 하느님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동안 나는 정말 까불었다,

기도란 반드시 교회_성당_신전에 가서만 해야 하는게 아니다. 자신이 눈감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든 장소가 교회가 아닌가, 합리화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제스스로 성당에 가고싶어졌다.


순례자성당:파티마 평화의 성당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순례자 성당에 갔다.

성당은 자기가 사는 곳에 가까운 본당에 적을 두게 되므로, 원래는 내가 속해 있는 성당으로 가면 된다.

그곳은 인근의 신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나는 성당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북적거리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주일 미사때 언제부턴가 순례자성당에 가곤했다.

순례자성당은 말그대로 교적인 목적으로 지를 순례하는 이들에게 열린 성당이다.


성당 본적과 상관없이 신자라면(신자가 아니라도)누구나 이곳을 찾아 기도하고 미사를 참례할 수 있다.


이곳은 언제나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오랜시간 교만과 나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냉담자였기에, 언제부턴가 내가 속한 본당이고 순례자성당이고간에 꾸준히 열심히 나간 적이 없다. 가만히 더듬어보니 월급생활자가 된 후로 바쁘다는 핑계로 더욱 외면했던 것같다.

그러다 아주 가끔씩 한두번씩 찾게 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현실적 나태함으로 주일미사를 빠지는 일에 익숙해져있었다.


다시, 까마득히 오랜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찾아간 성당은 시간이 멈추어진 듯

고요하고 아늑하게 그대로이다.


나는 고해성사를 하기로 했다.


고해성사                    


신자가 되고도 가장 쉽지 않은게 사실, 고해성사다.

고해성사란, 잘 알다시피 그동안의 자신의 잘못을 신부님께 고백하고 신의 대리인인 신부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받고 보속補贖을 받는 것이다.

오랜만에 제발로 걸어간 성당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그동안의 죄(알고 저지르거나 모르고 저지른 모든 잘못)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 당신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대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이 모든 행위는 어쩌면 그저 상징적인 의미일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니 그외 자잘한 삶의 오류들이 무슨 큰 죄가 되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고해성사는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그 죄의 기준은 어쩌면 인간자신의 마음 속에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나는 오랜만에 참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신부님 앞에 나아가 오랜만의 성당방문을 고백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에 내가 느끼는 죄책감의 무게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고해소 가림막 너머의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어머니께서도 하느님께서도 자매님이 그런 생각으로 괴로워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랜 냉담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왔으니 앞으로는 더욱 성실하게 하느님을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뻔한 말씀이지만, 신부님의 말씀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로부터 나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하다.    


오랜만에 천변을 찾았을 때, 그 고즈넉한 길가에서 폭풍처럼 마음 속에서 휘몰아쳤던 죄책감과 슬픔의 감정들이, 시시때때로 나의 심장을 찔러대던 아픔들이 어느새 고요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진 미사시간 내내 나는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안도감에 젖어들었다.        


지금의 이 마음이 앞으로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기도하였다.

.

.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일미사직전 파티마평화의 성당 본당/성수-본당에 들어가기 전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는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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