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하지만 괜찮은 하루 8
하루 발화의 90%는 “안돼” “하지 마” “그만”이다. 몽덕이가 된 몽이 때문이다. 제발 덕을 쌓아 내 발을 물지 말아 달란 뜻으로 개명했다. 이제 20평 집에서 한 발짝 내딛기가 어렵다. 몽덕이가 달려든다. 3주 만에 껌딱지가 돼 버렸다.
하루 행동의 90%는 수건 돌리기, 공 던지기다. 책상 앞에 앉아 일 좀 하려고 하면 몽덕이가 낑낑거린다. ‘어서 내려와 수건 돌려!’ 한 문장 쓰고 내려와 몽덕이 코앞에 수건을 돌렸다 던진다. 이걸 100번 한다. 소파에 앉아 쉬려고 하면 또 낑낑. ‘어서 내려와 아빠다리로 앉아! 내 전용 소파야!’ 다리가 저린다. 잠깐 누우려 하면 머리를 쥐어뜯는다. ‘어서 공 던져.’ 100번 던진다. 훈련은 몽덕이가 날 시키는 거 거 같다.
내가 점점 개가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계속 하는 까닭 중 하나는 죄책감이다. 안성 시골에서 태어난 개를 도시로 데려온 죄 말이다. 몽덕이에게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 필요대로 한 생명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아이를 낳는 부모들도 비슷한 심정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죄책감의 다른 축은 내가 몽덕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못난 보호자란 자책이다. 어떤 선택을 하건 자책의 흔적이 남는다. 이 개는 밖에 나가는 걸 엄청나게 싫어한다. 그런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보면 산책해야 행복한 개가 된다. 개가 원하는 대로 집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개가 원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행복을 위해 데리고 나갈 것인가? 육아서를 많이 볼수록 부모 마음이 불안할 것도 같다. <세나개>에 나오는 음식 알레르기 개, 조울증 개, 오토바이 바퀴 페티시 개, 무는 개, 안 나가는 개들을 보다 보면, 또 그 모든 원인이 보호자가 잘못 교육한 탓이라는 걸 알게 되면, 불안이 커진다.
‘몽덕이가 히끼꼬모리 개가 되면 어떻게 하지? 2~4개월이 중요하다는데.’ 마음이 급해진다. 목줄 하고 쫄랑쫄랑 주인 따라다니는 다른 집 개들을 보면 부럽다. ‘저 개들은 잘만 다니는 구만 우리 집 개는.’ 우리 엄마 맘이 이해가 간다. ‘다른 집 딸들은 잘만 살던데 우리 딸은.’
이 글을 쓰려고 10분 앉아 있었는데 몽덕이가 책상 밑에서 앉아 낑낑거린다. ‘내려와 아빠다리 만들어. 앉게’라고 하는 거 같다. 자기는 거기 누워 자면서 내가 자려고 하면 머리카락을 물어뜯는다. <세나개>가 떠오르며 몽덕이가 무는 개가 될까 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런데, 3주 만에, 나는 이 개를 사랑하는 거 같다. 몽덕이에게 바라는 게 없다. 그냥 이 세상에 와서 한 견생을 행복하게 만족스럽게 살다 가기만 하면 족하다. 인간에게 내가 이렇게 보상 없는 바람을 한 적이 별로 없는 거 같다. 아, 생각해보니, 몽덕이에게도 바라는 게 있구나. 내 발을 물지 말아 줘. 하여간, 세상의 모든 인간 어머니들이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