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디지털 드로잉>
매월 마지막 수업에는 가벼운 주제로 당일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 보통은 두세 달 전 미리 준비해 둔 내용을 보여주고 단계별로 따라 그리도록 천천히 설명해 주며 진행하는데, 오늘 수업은 평상시와 다르게 좀 특별했다.
수업 시작 10분 전, 모니터에 아이패드를 연결하고 오늘 배경음악으로 깔아 둘 노래를 고르는데 처음 보는 앨범커버가 보였다. 화려한 앨범커버 사이에 귀염뽀짝한 그림 한 장이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어제까지만 해도 못 보던 커버인데 순식간에 인기 급상승해 메인에 떡하니 걸려있는 걸 보니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렇게 내 시선을 사로잡은 노래는 '마루는 강쥐'
별다른 음악 취향이 없어서 항상 음악 어플 첫 화면에 뜨는 노래들 중 아무거나 틀어보는 나이기에 이번에도 그저 그림에 꽂혀 틀어봤을 뿐인데, 하나둘씩 자리에 앉던 아이들이 고개를 번쩍 들고 아는 척을 시작한다.
"선생님! 저 이 노래 알아요!"
"저 이 노래 외웠어요!"
"선생님도 이거 보세요?"
몇몇은 따라 부르기도 하고 몇몇은 갸우뚱해하며 "뭔데 뭔데?" 묻는 옆 친구들에게 설명하느라 신이 났다.
그렇게 한곡이 끝나고 다음 노래로 넘어가기 직전 잠시 일시정지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한테 물어보았다. 이 노래가 그렇게 유명한 노래였냐고, 선생님은 오늘 처음 들었다고, 노래가 참 독특하다는 소견을 덧붙였다. 선생님이 모르는 게 있다는 솔직한(?) 고백은 학생들 입장에선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의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흔치 않은 기회를 낚아채기 위해 저마다 소리를 높였다.
"이거 웹툰이에요!"
"마루는 강쥐라는 유명한 거예요~"
"선생님 오늘 집에 가서 꼭 보세요!"
"이거 진짜 귀여워요!"
요즘 웹툰은 OST 도 나오나 보다. 아니 원래 나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텍스트형 인간인지라 요즘 문물이 낯설다. 웹툰도 그렇지만 유튜브며 틱톡 뭐 그런 매체들도 조금 버겁다. 웹툰이라니.. 마지막으로 봤던 웹툰이 유미의 세포들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요즘 웹툰은 전혀 모른다. 아무튼 아이들이 하도 반갑게 아는 척하고 권유하니 오늘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찾아보기는 해야겠다 싶다.
그런데 왜 제목이 '마루는 강쥐'일까. 마루는 강아지라는 말이니? 강아지 이름이 마루야? 그럼 강아지가 주인공이야? 이 앨범커버에 그려진 요 꼬마아이가 강아지 주인이니?
이어진 내 질문에 아이들은 저마다 웃으며 이 꼬마애가 마루예요! 마루라는 강아지인데 인간으로 변해요! 라며 깔깔거렸다. 선생님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 다들 그 사실이 재밌고 또다시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렇게 한동안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귀염뽀짝한 앨범커버를 오늘 같이 그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준비한 가을풍경 그리기는 초스피드로 재빨리 끝내버리고 이 '마루는 강쥐' 노래 커버를 그려보자 제안했더니 이제는 손뼉까지 치며 좋아라 한다. 풍경화를 그리기 위한 기본 브러시와 레이어 순서를 짤막하게 설명한 후 먼저 완성한 친구는 선생님 허락 안 받아도 좋으니 바로 이어서 커버를 그려보도록 했다.
단,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 인터넷으로 이미지 찾아 레이어 밑에 두지 말 것. 그리고 스포이트 기능도 쓰지 말 것. 레이어 밑에 이미지를 두는 것은 트레이싱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트레이싱 기법은 그림이나 사진을 반투명한 종이 밑에 두고 똑같이 베껴 그리는 기법으로, 디지털 드로잉에서는 레이어 기능이 있어 정말 빠르고 편하게 원작을 구현할 수 있다. 스포이드 기능은 참조할 이미지의 색을 그대로 복사해서 따라 쓰는 기능이다. 보통 모작을 하면 원작의 색상과 최대한 유사한 색을 찾기 위해 수없이 많이 물감을 섞고 테스트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디지털 드로잉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불필요하다.
일부러 트레이싱 기법과 스포이드 기능을 알려주고 디지털 드로잉의 매력을 느껴보도록 권장하는 수업을 하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제한을 두고 각자 아는 다른 기능을 활용해 보도록 유도하면 더 다양한 결과물이 쏟아져 나온다.
정원(완벽한 동그라미) 2개를 그려 하나는 머리로, 하나는 아래로 이동시켜 절반을 잘라 몸통으로 둔다. 눈과 코 역시 정원으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샤샤삭 직접 그려 완성한다. 물론 색칠 역시 색을 끌어다 놓기만 하면 자동으로 칠해지기에 다 그리는데 3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린 학생이 두 명.
또 다른 방식도 있다. 데칼코마니처럼 좌우가 동시에 그려지도록 대칭기능을 켜고 왼쪽만 그림을 그린다. 한쪽만 그리면 되니까 동여맨 머리 모양새가 서로 달라 지울 필요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그린 학생은 한 명.
조금 어린 학생들은 기능을 찾아보는 것보다 일단 손수 그림을 그린다. 삐뚤긴 하지만 어쨌건 얼굴 형태를 완성하고 꼬부작 꼬부작 나머지도 이어 그린다. 어린 학생들 중 한두 명은 색칠도 직접 한다. 마치 스케치북에 색연필로 위아래 칠해나가듯 아이패드 위에 펜슬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칠한다. 그러다 검정 테두리를 벗어나면 지우개 기능을 켜서 지운다.
어떤 학생은 기어코 트레이싱 기법을 쓰고야 만다. 모니터에 띄워둔 '마루는 강쥐' 커버를 직접 카메라로 촬영해 레이어 밑에 깔았다. 선생님이 말한 '인터넷에서 찾아'가 아니니 규칙을 어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이지. 이렇게나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다니. 수업을 할 때마다 아이들의 기발함과 독창성에 나는 감탄하고야 만다.
우연히 들은 노래 한곡에서 시작된 즉흥적인 수업이었지만 아이들은 수업 시간이 끝났는데도 배경까지 그려보겠다고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 문 밖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님 몇이 보였다. 이럴 때 나는 너무나 신이 난다. 수업시간이 끝나도 일어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보람차다.
끝내 배경의 강아지 발자국까지 그려 완성해 낸 아이들이 배시시 웃으며 일어나는 모습에 나도 함께 웃는다.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
나도 너무 재밌었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