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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석현 Jun 07. 2022

살아있어도 안 보이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관점을 바꾸면 그리 슬퍼할 일도 즐거울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딸아.


살아있어도 안 보이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관점을 바꾸면 누군가 죽는다하여 그리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고 곁에 있다 하여 그리 즐거울 일도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더 자주 더 많이 하게된다. 그만큼 살아갈 날이 줄어드는 반면에 삶을 조금씩 더 알아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또한 주위의 죽음과도 많이 마주하게 된다. 가족의 죽음과 주변인들의 죽음을 접하며 슬픔과 위로와 비통함과 허무함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나와는 별개로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늘 우리와 함께 한다. 그만큼 살아가며 삶과 죽음에 관해 깊이있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해야 하고 잘 죽기 위해서는 삶을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너무 염세적인 사고를 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가족이나 주위의 죽음을 접하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비통한 마음을 함께 하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한 번 바꾸어 생각해 본다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가 조금은 의연해 질지도 모르겠구나. 세상에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나와는 인연을 맺지 않고 내가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더 많을까? 당연히 내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나에게 그들의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들에게도 나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표현이 적당하겠구나. 그럼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 평소에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많을까? 당연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핸드폰에 저장 된 번호 중 일 년에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란 건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하는 바이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있다. 평생에 한 번 소식조차 전하지 않는 먼 곳의 친척보다야 가까이 살며 수시로 얼굴 마주치고 사소한 이야기라도 나누는 이웃을 더 가깝게 느끼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고 살아가는 인연이 참으로 많다.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명이 태어나 한 평생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은 물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니 너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인연이 멀어지거나 헤어지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최소한 살아는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설령 생을 마감하였다 하더라도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순간일 뿐이다. 평소 보지 않고 살았으니 그만큼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 또한 적기도 했을테지. 그와 내 삶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시간만큼 서로가 더 먼 남남이 되어가는 것이다. 십년에 한 번을 만나도 어제 본 것저럼 반가운 극소수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아비와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가 한 명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일 년 동안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며 우정을 쌓은 마치 친형과도 같은 좋은 선배였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일이 년에 한 번 정도 전화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더 뜸해져서 서로의 근황을 전하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지내왔다. 아비의 첫 번째 책이 나오고 안부차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더구나. 그리고 이틀쯤 지나니 그 선배의 전화번호로 그의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부고>

갑작스런 부고에 당황하시겠지만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전화번호부에 있는 단체문자로 보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 아들 이OO 배상


그가 세상의 빛을 본지 49년 만의 일이었다. 삶이 헛되고 또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살아온 세월과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아있어도 안 보이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되더구나. 그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때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의 내 삶이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의 거리’와 ‘물리적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을 너무 미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 눈에 안 보이고, 가까이 두지 않는다면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살아있어도 안 보이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 딸아.


살아있어도 안 보이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육신이 죽고 사는 것과는 상관없이 눈에서 멀어져 보이지 않거나 내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이면 죽은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육신이 죽었더라도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죽지않고 그저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될테니 말이다. 그렇게 관점을 바꾸면 세상을 살아가며 그리 슬퍼할 일도 즐거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가까이 있는 인연에 충실하고, 가까이 두기 힘든 인연이라면 멀리두어 너희 삶의 ‘기회비용’을 잘 활용하며 좋은 인연을 만들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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