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 한 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똥 Oct 12. 2021

레몬옐로우의 배신

부슬부슬 가을비 내리는 날

레몬 옐로우, 부츠컷 바지를 샀지

하이힐을 신고 전신 거울 앞에서

잘 어울린다는 친구의 말에 기분이 으쓱해졌어

내가 봐도 썩 잘 어울려 사야겠다 생각했는데

그거 스몰 사이즈라는 말에

사야겠다는 굳은 결심까지

게다가 맞춰 입은 연두 니트는 왜 그렇게 유니크한지

예약해 둔 부산국제영화제에 입고 가면 되겠다고

세피아빛 석양을 등지고 사진 한 장 남겨도 좋을 거라고

만 가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지

신발장 큰 거울 앞에서 다시 한 번 포즈를 취하고

곱게 벗어 옷걸이에 거는데

허리춤에 숨어 히히덕거리는 세탁소 택을 보고 말았지

선명한 자국 803호가 낙인처럼 찍힌 바지

다시 보니 입고 벗은 보풀이 여기저기

주인의 몸에서 이미 순결을 잃고 내게로 온

레몬옐로우, 아무리 어울려도

이젠 내 것이 될 수 없는.

서글서글한 눈매로 영수증을 건네 준

원 주인에게로 돌아갈 시간

짧았지만 잠시 행복했노라

한 줄 적어 두는 건

레몬옐로우,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월의 방에 갇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