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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나 Dec 21. 2024

내 수치를 징그러워하지 않기를 바랐지

처음 내 흉터를 보였을 때, 그때 만나던 남자친구의 눈빛을 기억한다. 일그러진 얼굴은 구겨진 신문종이처럼 자국이 남아 곱게 펴질 생각을 안 했지. 겨울이라 다행이었던 건지 불행이었던 건지. 그 마음의 상처 때문에 집 데이트를 하던 날이면 집에서도 흉터를 가리고 다닌 걸 그는 알지 못했다.


나에게는 좌측 무릎에 흉터가 있다. 실밥자국대로 부풀어 오른 붉은 켈로이드 흉터. 지금은 연해졌지만 그래도 자국이 남아있어 흉터를 볼 때마다 나는 상처가 새겨진 날로 돌아간다.


때는 대학교 1학년 봄과 여름사이였는데 살랑거리는 바람에 그날따라 안 입던 원피스가 입고 싶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저녁을 먹으려 편의점에 들렀었다. 선반 깊숙하게 자리 잡은 삼각김밥을 꺼내려다가 하단에 있는 날카로운 쇠에 무릎 위 쪽을 찔렸다. 이동하는 동선에 따라 상처는 벌어졌고 3~4cm 정도의 상처가 생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흘러나오는 피를 수습해야 했고 바로 양호실로 갔다. 선생님은 꿰맬 정도는 아닌데 흉은 질 거라며 빠른 시일 내에 파상풍 주사를 맞으라고 하셨다.


파상풍 주사를 당일에 맞아야 할 것 같아 야간 진료를 하는 곳을 찾아보다가 인근 병원으로 갔다. 무릎에 드레싱을 한 외상 환자. 파상풍 주사를 맞으러 왔다고 하니 병원에서는 화들짝 놀라며 일단 상처를 봐야 한다고 했다. 심각하게 보더니 의사는 꿰매야 할 것 같다며 처치실 준비를 시키고 나는 사태파악을 못 한 상태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지금보다 더 소심하고 할 말을 제대로 못했던 20살의 나는 꿰매고 싶지 않다고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수술(?)을 당했다. 매일 소독하고 2주 뒤에 실밥 제거를 하자고 예약을 잡고 기숙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모르는 사람에게 페이스북 메시지가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로 시작하는 메시지에 감을 못 잡아서 누구세요로 답하니. 어제 응급실에서 상처 꿰매지 않았냐며 이상형이라서 연락했다고 자기는 옆에 있던 응급실 직원이라고 했다. 소름이 끼쳤다. 내 정보를 어떻게 알고 찾았냐 하니 접수정보에 있는 내 연락처와 이름을 보고 찾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다신 그 병원을 가지 않는다. 실밥 제거는 다른 곳에서 진행했다.


실밥제거 후 상처는 아물었는데 이상하게 가렵고 상처가 부푸는 느낌이 들었다. 수술이 잘못된 건지, 실밥제거가 문제였던 건지 괜한 병원 탓을 했다. 며칠을 소독을 하며 가리고 다니다가 같이 살던 기숙사 친구가 이상하게 느꼈는지 상처를 좀 보자고 했고, 친구는 내 상처가 켈로이드인 것 같다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인터넷 검색을 하니 설명이 내 증세와 비슷했다. 심장이 덜컥, 양호실에 가서 상태에 대해 여쭤보니 내가 켈로이드 피부인 것 같다며 앞으로 이 흉터와 같이 살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이 실밥자국대로 난 흉터가. 붉고 징그러운 이 흉터가 미치도록 싫었다. 간지러움이 꼭 100마리의 개미가 내 살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기숙사까지 가는 길에 켈로이드 흉터 제거, 연고, 완치, 시술을 계속 검색했다. 도착해서는 기숙사 건물 밖에 주저앉아서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앞으로 짧은 바지나 치마는 못 입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 이후로 더운 여름날에도 꿋꿋이 긴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반바지나 치마를 입는 날에는 꼭 밴드로 상처를 가리고 다녔다. 좋다는 켈로이드 연고는 다 써봤고 몇 통을 비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붉은 벌레는 기가 차다는 듯이 더 단단해졌다.


졸업하고 나서도 여름에는 흉터를 가리고 다녔다. 그렇게 지내다가 내 흉터를 보여도 괜찮겠다 싶은 사람을 만났다. 징그럽냐고 묻는 내 질문에 그는 '조금 징그럽다'라고 답했다. 그 뒤로 자연스레 헤어졌고 마음을 닫게 되었다.


그다음에 만난 사람에게는 최대한 흉터를 늦게 보여야겠다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은 언제나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다. 야외 데이트를 한다고 치마를 입었던 날. 하필이면 비가 오는 바람에 밴드가 떨어졌다. 미루고 미뤄왔던 일이 벌어졌고 내 수치를 징그러워하지 않기를 바랐지. 그날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 작은 수치에 입을 맞추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한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 사랑만은 웅크려있던 나를 깨워주길 충분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흉터는 연해졌고 지금의 나는 당당하게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닌다.


상처는 아물수록 더 단단해진다. 굳은살이 배기기까지의 고통을 남들은 모르듯 그 과정은 온전히 본인만의 것이다.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지만 내 상처를 남에게 보이는 것이 더 어려운 법. 누군가의 상처를 듣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냥 아무렇지 않아 하면 된다. 과장도 동정도 말고 가만히 들어주는 것. 안아주면 더 좋고. 화자는 이미 당신은 내 사람이다 생각하고 말했을 터이니 더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누군가의 따스함만 있다면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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