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출구> 단평
※ <8번 출구>의 스포일러와 결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0월 22일 개봉한 <8번 출구>는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8번 출구]는 KOTAKE CREATE 제작사에서 스팀을 통해 선보인 게임으로 출시된 이후 현재까지도 수많은 아류작을 만들어낸 만큼 게임 업계에 큰 파동을 일으킨 바 있다. 무한 루프에 갇힌 주인공이 이상 현상 유무를 확인하면서 탈출하는 단순한 스토리라인이지만, 이 이상 현상과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배경을 무수히 변주할 수 있는 만큼 이 게임의 영향은 강력했다. 이러한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일본에서 영화가 제작되었고, 드디어 국내에서도 개봉하였다.
출근하던 한 남자는 지하철에서 내린 뒤 밖으로 나가려던 중 출구를 찾지 못하고 지하도에 갇힌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도에 절망하다가 0번 출구라고 쓰여있는 안내판 옆에 이상 현상에 대한 주의판을 보게 된다. 이제부터 그는 8번 출구 밖으로 완전히 탈출하기 위해 지하도의 이상 현상을 파악하려고 애쓰기 시작한다.
영화는 원작의 기본적인 게임 방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부여한다. 주인공은 아주 평범한 남자이지만 회피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지하철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소리 지르는 남자를 보아도 모르는 척하고 헤어진 자신의 여자친구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냐고 묻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아기‘는 처음에 주인공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아무런 이상 현상이 없어서 그대로 복도를 통과하려는 순간 물품보관함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갑자기 불이 꺼지고 환풍구가 열리면서 기이한 형체를 가진 쥐들이 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등장하는 등 주인공 무의식 속에 자리한 죄책감을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흥미로운 지점은 원작 게임 속에서도 등장했던 이상 현상이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의 심리를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부분이다. 원작 게임과 완전히 똑같은 이상 현상은 아니지만, 원작 게임의 이상 현상을 차용하여 영화적인 장치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기존 게임 속에서는 어떠한 사연도 없었던 걸어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게임 속에서 걸어가는 남자는 NPC처럼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때로는 이상 현상의 일부로 작용하기도 했다. 영화는 걸어가는 남자에게 아들을 보러 가는 남자라는 사연을 추가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보러 가던 중 이 이상 현상에 말려들었다. 영화 속에서 만난 어린아이를 챙기려고 하면서 나름대로 선한 모습을 보이지만, 어린아이가 발견한 이상 현상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가면서 절망에 빠진다. 출구를 향해 나아가던 중 그는 출구와도 같이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올라가려 하지만, 어린아이는 한사코 그 출구로 나가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그는 어린아이만 남겨두고 홀로 출구를 향한다. 하지만 그 출구는 실제 출구가 아닌 이상 현상의 일부일 뿐이었고 결국 그는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NPC로 남게 된다. 이러한 사연이 부여된 걸어가는 남자는 1인칭 시점으로만 진행되는 게임을 영화화했을 때 지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준다. 동시에 주인공이 이곳을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때,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미리 보여주면서 이야기적인 긴장감을 부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작 게임의 결말은 걸어가는 남자가 출구라고 생각하고 탈출했던 곳이기에 영화가 이를 얼마나 영리하게 뒤틀어서 연출했는지 드러낸다.
영화의 주인공과 걸어가는 남자를 이어주는 존재는 바로 어린아이이다. 처음에 주인공은 이 아이를 보고 이상 현상의 일부라 생각했지만, 다시 처음으로 표지판이 0으로 되돌아간 것을 보고 나서 아이가 이상 현상이 아닌 실제로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아이는 어떤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걸어가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도 이상 현상을 발견했던 것처럼 주인공이 미처 보지 못한 이상 현상을 발견하여 주인공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어린아이와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처음에 단순히 아이를 회피하기만 했던 주인공은 어린아이를 보호해주려 한다. 특히 이상 현상의 일부로 홍수가 밀려오면서 어린아이의 존재가 사실은 미래에서 주인공이 낳았을지도 모르는 주인공의 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주인공은 아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구해주려 한다. 홍수가 휩쓸고 난 뒤 아이가 홀로 깨어났을 때 아이는 폐허더미 한가운데의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일어나서 먼저 출구로 향한다. 아이가 깨어났을 때 폐허더미 한가운데 빈 공간에 웅크리고 있는 장면은 아직 이 아이가 태어나지 않고 주인공 여자친구의 뱃속에 있음을 드러낸다. 홀로 걸어가는 아이 뒤로 주인공이 그 뒤를 따라 출구를 향하는 모습은 여러 일련의 일을 겪은 주인공이 과연 여자친구와의 일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더욱 흥미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시점의 변화와 결말의 변주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처음 주인공의 얼굴을 3인칭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이상한 공간에 갇히게 되었을 때부터 조금씩 시점의 변화를 주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관객들이 영화 속에 게임처럼 몰두하게 했다가 시점의 변화를 주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또한 결말을 실제 게임 원작의 결말과 다르게 연출한 부분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는 루프물이라는 기존 원작의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영화의 결말에서도 루프물을 이용한다. 지하도에 갇혔을 때 나온 이상 현상 중 하나가 갇혀있던 문이 열린 순간인데, 주인공은 그 어둠 속에서 영화 초반 우는 아기와 엄마를 모르는 채 했던 자신의 모습을 제 3자의 입장을 바라본다. 이후 아이를 구해낸 뒤 홀로 지하도를 탈출한 주인공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말로는 여자친구에게 “글쎄”라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했지만, 주인공은 이미 지하철을 타고 여자친구에게 가고 있다. 이윽고 지하철에서 우는 아기와 엄마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을 향해 소리 지르는 한 남자의 모습을 다시 본다. 한쪽에만 이어폰을 끼고 있던 주인공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아기와 엄마 쪽을 향하고 영화는 끝을 맺는다. 똑같은 입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는 루프물은 기존 매체 속에서 사실 많이 다뤄져 왔다. 하지만 <8번 출구>는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살짝 변주를 주면서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고, 주인공이 아기와 엄마에게 가서 도움을 주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줌으로써 매력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수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8번 출구>는 가장 손에 꼽히는 잘된 영화화 케이스이자 앞으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제작할 때 가장 참고해야 할 영화가 될 것이다. 게임을 해본 사람들이 재미있게 관람할 요소들이 많은 영화이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영화적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