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승환 Nov 12. 2023

미움받을 용기를 냈던 올 한 해

현장에서 취재 기자가 느끼는 취재윤리의 체감온도

안녕하세요.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박영사)의 저자 송승환 기자입니다.


또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지난 글을 언제 썼나 봤더니 올해 3월에 썼네요.

이제 올해의 끝자락을 향하고 있는 시점이 됐습니다.


올해 3월 육아휴직에서 복귀 하면서

반년 넘게 JTBC 사회부 기동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건 사고를 취재했고 의미있는 기획보도도 했습니다.

임시저장된 작성 중 글을 봤더니 지난 5월 청소년 우울증, 자살 문제를 다룬 기획 보도를 한 뒤

기사에서 다 풀지 못한 이야기를 쓰다가

역시나 일과 육아에 치여 그대로 서랍장 안으로 들어가 있더군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ㅠㅠ


이외에도 기획 단계, 취재 과정, 보도 이후 반향에 대해

기록하고 얘기를 나눠보고픈 보도가 여럿 있었습니다.

언제쯤 일과 육아 사이에 쉼표를 넣고 이런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ㅎㅎ


지난달 '한국언론법학회' 세미나에서

취재윤리에 대한 발제가 있는데 토론자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아는 교수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간만에 얼굴도 뵙고자 흔쾌히 수락했는데,

토론문 마감 직전까지 일과 육아에 치여서 한 글자도 못쓰다가

자료마감일 이틀 전에는 오전 3시, 전날엔 새벽 5시에 잤습니다.

내가 왜 수락했지 생각을 1000번쯤 하면서 괴로워 했었네요. ㅠㅠ

그 과정은 괴로웠지만 간만에 억지로 그간의 경험과 생각들을 정리해볼 기회가 돼서

이거라도 브런치 구독자님들과 공유해보고자 올려봅니다.

(세미나에서 발표된 발제문을 모두 봤다는 전제로 작성된 토론문이라 중간중간 맥락이 생략되거나 갑자기 주제가 전환되는 부분이 있어서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올해 JTBC 사회부로 복직하면서 스스로 올해의 마음가짐으로 생각했던 게

'미움받을 용기'입니다.

그동안 회사 밖에서 한국 언론의 여러 측면에 대해 이야기해왔고 비판적인 목소리도 종종 냈지만

정작 사내에선 그만큼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제가 8년차 기자가 됐고 사회부 기동팀에서 캡(팀장), 바이스(부팀장)를 제외하고 취재기자 중에선 최선임의 위치가 됐습니다.

주니어 기자라고 선배들 뒤에 마냥 숨어 있기에는 어려운 위치가 됐고

취재 기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점에 대해 취합해 데스크에 전달하는 노력을 해야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괴로웠던 순간들도 있고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이상 스스로에 대해서도 엄격해질 수밖에 없어 힘들었는데

'말하길 잘했다' 생각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집으로 복귀 해야 할 시간이 15분 남았습니다. ㅎㅎ

아기가 지난 9월 돌이 지났고 여전히 손이 많이 필요하지만,

아내와 그래도 우리 이제 각자의 자기개발 시간을 조금씩은 확보해보자고 했습니다.

그 첫 기회가 브런치에 그간의 기록을 남기는 일입니다.

얼른 토론문을 아래에 복붙 하고 남은 자유시간을 만끽하겠습니다.

항상 자주 업로드 하겠다고 약속 드리고는 못 지켰는데, 그래도 다음엔 더 금방 올릴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현장에서 취재 기자가 느끼는 취재윤리의 체감온도

JTBC 송승환 기자


2023년 한국의 취재 현장에 있는 젊은 기자들에게 취재윤리는 굉장히 중요하고 일상적인 고민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자들이 취재윤리를 소홀하게 생각한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취재윤리에 대한 고민이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고 모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취재윤리에 대한 관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인데 이게 안 되는 겁니다.


저는 2021년부터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진행하는 신입기자 연수에서 자살보도 취재윤리 교육을 해왔습니다. 후배 기자들에게 취재윤리를 설명할 때 저는 한 마디로 '할까 말까'라고 설명합니다. 들어갈까 말까, 물어볼까 말까, 찍을까 말까 등의 순간에 판단 기준이 되는 게 취재윤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취재윤리는 강령이나 준칙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닌 실천적 윤리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순간은 굉장히 짧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딜레마 상황에서 준칙을 찾아보고 한참을 고민할 시간이 없습니다. 평소 생각해온 대로, 몸에 배어있는 대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그때그때 고민해놓고 쌓아두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요즘 취재부서의 팀장급 기자들이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도 취재윤리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현장에 있는 취재기자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봤을 때 빨리 명확하면서도 사려 깊은 판단을 못 내려주거나, 무작정 무리하게 취재하라고 요구하는 팀장은 금방 현장 기자들의 신뢰를 잃습니다.


최근 겪었던 몇 가지 사건의 취재 과정이 떠오릅니다. 지난 8월 최윤종이 서울 신림동에서 성폭력과 살인을 저지른 사건은 오후 3시 넘어 알려졌고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취재를 통해 확인된 사건 관련 사실들이 계속 뉴스룸으로 보고가 됐고 데스크는 이를 조합해 리포트와 현장 중계 등을 방송 큐시트에 반영했습니다.  


기사 계획에는 취재윤리상 보도가 되기에 부적절한 표현이나 피해자에 관한 정보도 들어갔습니다. 이날 사회부 젊은 기자들은 팀장, 부장, 국장에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습니다. '이런 표현은 성범죄보도 보도준칙에 따라 부적절하다', '피해자가 입원한 병원을 공개하거나 이곳에서 중계하는 등의 보도는 문제가 있다' 등의 의견들이었습니다. 이게 받아들여져서 보도 참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다뤘던 경우에는 데스크의 판단이 빛났습니다. 성희롱 발언을 방송 보도에 인용했는데, 이 내용은 피해자가 보도하기를 원해 녹음 파일을 제공했고 판결문에도 적시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스크는 출고 전 피해자에게 연락해서 해당 발언이 공개되는 것이 괜찮은지 다시 물어보라 했습니다. 피해자 분은 여전히 동의한다는 말과 함께 출고 전 자신의 의사를 한 번 더 물어봐준 것에 대해 굉장한 위안이 되고 언론사의 배려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신입기자 연수 때 후배 기자들에게 이런 얘기도 합니다. '까라면 까는' 식으로 일하는 기자가 되는 건 정말 쉬운데 이렇게 되지는 말자는 말입니다. 선배 기자가 어떤 걸 취재해오라 시켰을 때 고민하지 않고 목표를 가능한 빨리 달성해오는 신입기자는 그동안 좋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고민해봐야 하는 취재윤리적 딜레마 상황을 일일이 물어보고, 따져보고 취재하는 것보다 결과만 보고 달려가는 게 단기적으로 성과가 좋습니다. 그런 성과와 이에 따른 칭찬에 취하기 쉽고 그러면 취재윤리는 한가한 고민 따위로 취급하는 목적지향적 기자가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습니다.


후배 기자가 적극적으로 취재윤리에 대해 물어보면 좋지만 개인적인 성향이나 조직 문화에 따라서는 이런 얘기를 먼저 꺼내기 어려워하는 상황의 기자들도 많습니다. 이 때문에 선배 기자가 취재 지시를 할 때 취재윤리를 어떻게 고려할지 자세한 지침을 주는 게 더 낫습니다. 요즘에는 취재 목적만 던져주는 게 아니라 언제 어떻게 만나고, 어떤 표현을 사용해 묻고, 보도 후에 취재원에게 어떤 연락을 더 해야 하는지 일일이 가이드를 주는 식의 지시를 하는 선배 기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보도 결과물이 원하는 대로 나온 것만으로 잘 된 취재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는 겁니다.


뉴스룸에 이렇게 취재윤리를 적극 고려하고 이에 대해 동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는 기자가 30% 정도만 있어도 결과물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자꾸 취재윤리에 대해 터놓고 얘기해야 서로 경계가 되고 스스로 구속이 됩니다.


자살보도 영역에서는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구 중앙자살예방센터)이라는 외부기관이 이런 역할을 꾸준히 해서 많은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재단에서는 자살 사건을 모니터링하다가 발생하면 기자들에게 경고 메일을 보냅니다. 기사 제목에 '자살'이나 자살을 의미하는 표현 대신 '사망', '숨지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구체적인 자살 방법, 도구, 장소, 동기 등을 보도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내용입니다. 제가 입사한 2016년에는 이걸 받아들이는 기자는 드물었습니다. 자살과 사망은 분명히 다른 사실이라 구분해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경고 메일을 불편해하는 기자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현장기자부터 데스크까지 일반적인 자살보도 작성 방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최근에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조차 거의 쓰지 않습니다. 취재윤리는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어제까지는 이렇게, 오늘부터는 저렇게 딱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윤리이자 문화의 영역이라 꾸준히 얘기하면 느리지만 분명히 바뀝니다.


관행적으로 해오던 논란이 있는 취재 방식은 계속 함께 고민을 해서 바꿔나가야 합니다. 얼마 전 한 후배 기자가 마약류 처방을 오남용 한 병원에 대해 취재를 할 때 몰래촬영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방송계 은어로 밑대기 촬영 또는 다리걸이 촬영이라고 부르는 방식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녹화 중인 상태에서 카메라를 아래로 내려 들고만 있거나 바닥에 내려놓아 상대방이 촬영 중이라는 걸 모른 채 다리 정도만 보이도록 찍는 몰래촬영 방식입니다. 그림(영상)에 죽고사는 방송 기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경각심도 크지 않습니다.


후배 기자에게 몰래촬영 한 병원 내부 그림(영상)이 있으면 리포트를 제작할 때 훨씬 수월하고 현장감도 있어 보여 좋겠지만 없으면 안 되는 장면이 아니니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후배 기자는 데스킹 과정에서 팀장이나 부장이 해당 컷이 왜 없냐는 지적이 분명히 들어올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팀장과 부장에게도 가능한 몰래촬영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취지를 설명하고, 영상 구성이 단조로울 우려가 있지만 이를 보완할 다른 방안을 찾아볼테니 이 컷은 찍지 않겠다고 설득을 해 동의를 구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결정적인 그림을 확보하기 위해 몰래촬영, 몰래녹음 등이 보도에 자주 활용되고 있습니다. 가능한 다른 방안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서 줄여나가야 할 겁니다. 제가 입사했던 2016년에만 해도 몸에 착용하는 등 방식의 소형 몰래카메라가 취재에 종종 사용됐는데 지금은 아예 사내에 이런 장비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취재윤리를 지켜가며 보도를 하기 위한 현장에서의 노력과 변화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최근 취재윤리가 지켜지지 않는 모습을 목격한 아쉬웠던 사건 현장도 기억이 납니다. 지난달 서울 송파구에 살던 부부와 초등학생 아이, 시어머니와 시누이 총 5명이 서울과 김포 등 3곳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시누이가 함께 사망했고, 사망 장소가 세 군데로 나뉘어 있는 점이 이례적이라 경위 파악이 필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 현장 중 송파구 자택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고 그 안쪽에 유제품 배달 가방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찍어오기는 했지만 열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다룬 여러 보도 중에 이 가정이 가스비가 여러 달 연체돼 도시가스 공급이 끊겼고, 카드대금을 갚지 못해 채권추심통지서가 도달했다면서 구체적인 연체 기간과 금액을 공개한 기사가 여럿 나왔습니다. 확인해보니 그 유제품 배달 가방 안에 있던 우편물에서 나온 정보였습니다. 이튿날 사건 현장에 다시 가서 가방을 열어봤습니다. 이미 우편물 봉투가 다 뜯겨 있고 내용물을 펼쳐 본 흔적이 있었습니다. 빚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가족들이 숨졌다는 점은 경찰 수사를 통해서 이미 확인됐던 부분입니다. 개인의 금융정보가 담긴 우편물을 뜯어보고 이 과정에서 얻은 구체적인 내용을 데스크가 걸러내지 않고 보도한 몇몇 기사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취재윤리에 대한 고민은 현장기자에게 일상적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밖에서 보기에 소홀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앞서 말한 것처럼 제대로 꿰어내지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꿰어낸다는 건 취재윤리를 교육하고 평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내에 여러 기자상이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취재과정의 투명성을 따지거나 높은 비중을 주는 곳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고, 어떻게 가공해냈는지보다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력이 있었는지에 주로 평가 기준이 맞춰져 있습니다. 평가에서 중요한 항목이 아니다보니 대부분의 신청작들은 취재윤리 준수 여부 등에 대해 "잘 지켰습니다" "특이사항 없습니다" 정도의 소명으로 갈음합니다.


포털이나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기사를 보면 입력시간과 수정시간이 표시됩니다. 그런데 몇 번 수정했는지나 수정 이유, 이력을 볼 수 있는 곳은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보도 시점과 수정 이력은 보도의 진실성을 따지는 데 정말 중요한 요소인데 이에 대해 독자, 시청자가 접근해 검증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기사에서 인용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도록 참고자료를 정리한 기사는 드물지만 있습니다. 기사에 인용된 내용이 해당 자료를 짜깁기 해 잘못된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링크를 제공하는 건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사가 굳이 나서서 하지 않습니다.


기사의 생산 과정을 가능한 더 투명하게 보여주려 노력을 기울이는 언론사와 기사에 대해서 더 높은 평가를 하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반대로 기사의 영향력이 크더라도 취재 과정이 불투명 하다면 지적 받는 경우가 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의 언론사들이 취재윤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변화할 겁니다.


취재윤리는 얇은 층을 여러 겹 쌓아 만드는 크레이프 케익 같은 거라고 가끔 후배들에게 설명합니다. 평소에 열심히 고민하고 얘기하면서 한 겹씩 쌓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필요할 때 빼먹을 게 없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절로 쌓이는 게 아니라는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내면에 이런 걸 꾸준히 키워온 기자가 팀에 두어 명만 있어도 보도 참사는 거의 안 날 겁니다.


그런데 사람에 의존하면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험이 모여서 매뉴얼이 생기고 제도나 기구가 돼야 사람이 바뀌어도 취재윤리를 지켜가며 보도하는 게 편차 없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언론사 내에 취재윤리를 검토하고 계속 업데이트 해나가는 상시적인 기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각 언론사에서 이렇게 각자의 취재윤리를 키워나갈 정도가 되면 비로소 외부에서 한국 언론과 기자들이 취재윤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달라졌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앞서 취재윤리를 키우는 주요한 방법으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걸 강조했는데 이는 일상에서 하는 자기주도학습이라면 외부기관과 연계한 체계화된 교육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동안 언론사에서 취재윤리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취재 방법은 도제식으로 전수가 됐는데 요즘에는 성의껏 후배 기자에게 취재 방법을 가르쳐주는 선배 기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대체할 체계화된 교육 시스템이 없다보니 연차별로 반드시 갖춰야 하는 역량을 놓치는 경우가 주변에서 종종 보입니다. 취재윤리 역시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학계, 공공기관이 언론사와 협력해 교육 기회를 마련해준다면 현장 기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취재윤리는 언론 문화의 한 영역입니다. 언론에 대해 사회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식이 곧 언론 문화이고 취재윤리는 그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언론 문화는 언론사, 기자 외에 법과 공공기관, 학계, 시민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언론사,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책임이 있지만 사회 구성원 전체가 연대해 책임을 지고 있기도 합니다.


언론이 실명보도를 할지, 익명보도를 할지 선택하는 것도 언론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작년과 올해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예비법조인을 대상으로 언론실무를 교육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미국 언론과 한국 언론이 아프가니스탄 구출 작전을 보도한 사진을 비교했습니다. 개인정보와 테러 위협에 대해 한국보다 더 민감한 미국 언론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사람들이 미국 공항을 나올 때의 얼굴을 공개했고 그 표정 하나하나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언론의 보도사진은 일괄적으로 얼굴에 블러를 쳤습니다. 이 보도사진에는 이들이 이날 한국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는 정보만 남아있었습니다.


이걸 본 예비법조인 수강생들 대다수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가능한 개인정보를 가리고 감추는 게 더 선진적인 언론 문화이고 한국 언론은 무분별하게 개인정보를 공개해서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례를 보고서 많은 수강생이 개인정보를 가리는 게 무조건 좋고 공개하는 건 무조건 나쁘다는 선입견을 벗었다는 후기를 전해줬습니다.


시민들의 이런 언론에 대한 인식은 그 사회의 법과 제도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아프가니스탄 구출 작전 보도에서 한국 언론의 보도사진이 블러로 가득 찼던 배경에는 출입처인 외교부의 지침이 있었습니다. 외교부가 당시 출입기자단에게 테러 위협 등을 이유로 일괄적인 블러 처리를 요구했고 출입기자단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외신과는 다른 흐린 사진들만 나가게 된 겁니다.


한국의 공공기관이 비실명화 조치를 강력하게 고수하는 근원적인 이유를 파고들어가 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지기 싫어하는 공무원 조직 문화가 있습니다. 법원이 제공하는 비실명화 조치된 판결문에서는 전 대통령 이름조차 A로 표기됩니다. 한국에서 가장 공적인 인물의 이름마저도 철저하게 가려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조직 문화는 이곳을 출입하는 언론의 문화에도 상당 부분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방식의 익명보도 기사를 자주 접하기 때문에 민간 영역에서 인터뷰를 할 때도 취재원이 먼저 익명화 요구를 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남들도 다 익명으로 하던데 왜 나에게만 불편하고 부담되게 실명 인터뷰를 요구하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서로 다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의 익명보도에 대해 지적할 때 이런 맥락은 고려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즈의 실명보도 원칙과 비교하면서 한국 언론과 기자들이 무책임하다는 손쉬운 지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왜 익명보도가 당연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왜 바뀌기 어려운지 문화적, 조직적 차원의 접근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토론문을 준비하는 기간에 강남의 한 유명 성형외과의 의료사고와 무책임한 대응을 보도했습니다. 댓글 중 상당수가 왜 병원명과 의사 실명을 공개하지 않냐, 다른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도록 공개하는 게 공익에 부합하지 않냐는 내용이었습니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에게도 왜 병원명을 숨겨주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병원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 한국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도 범죄가 된다는 점, 법원의 최근 판단 경향, 이로 인해 데스크가 쉽사리 실명보도의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 이보다 더 범죄 정황이 뚜렷한 사건에서조차 병원명을 익명 처리한 다른 보도 등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언론 문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피해자 분을 납득시키느라 꽤 애를 먹었습니다.


언론사의 수익 구조와 경영 상황도 한국 언론의 취재윤리 수준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는 구조적인 요인 중 하나입니다. 요즘 대부분 언론사가 인터넷뉴스팀을 운영합니다. 그 배경에는 클릭 수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언론사의 수익 구조 문제와 베껴쓰기를 하더라도 쉽게 책임지지 않는 법과 제도, 이를 흥미롭게 클릭하는 시민 등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기사 중 이 조직에서 생산하는 기사의 양은 현장 취재 기자가 쓰는 기사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다른 생산 과정과 다른 취재윤리를 거쳐 나온 기사인데 결과물의 형식만 놓고 보기에는 취재 기자가 생산한 기사와 차이를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시민이 접하는 뉴스의 대다수가 인터넷뉴스팀이 만든 기사이다보니 한국 사회의 언론 문화도 여기에 맞춰 따라가고 있습니다. 취재 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윤리를 대하는 인식이 상당히 바뀌었고 이를 반영한 기사가 나오고 있는데도 이를 무시한 훨씬 많은 인터넷 기사들에 묻혀서 외부에서는 달라진 걸 알아채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 언론 전체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고 부작용과 폐해는 더 부각됐습니다. 사법부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이런 뉴스를 보고서 한국 언론은 무분별하고 과도하게 개인정보를 침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신중한 보도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이렇게 더 엄격해진 규제와 각박한 취재 환경을 감당해야 하는 건 현장 취재 기자들의 몫이 됐습니다.


취재 현장에서는 한국의 뉴스룸 문화와 동료 기자들의 취재윤리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바뀌고 있고 이미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장에서 취재윤리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취재 기자들이 최소한 팀장 이상의 위치가 될 때쯤에는 외부에서도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취재 기자들이 여전히 잘못하고 있는 부분은 분명 따끔한 지적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취재윤리가 잘 지켜진 기사를 발견했을 때는 좋은 평가와 응원을 통해 현장 기자들이 변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