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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Oct 19. 2021

아쉽고 잡고 싶은 현재에게 하는 말

어른의 아쉬움에 대하여

어쩌다가 나는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되었나를 두고 한참 생각했다. 나도 그저 행복해지고 싶은 평범한 사람인데. 그러다가 역설적이게도 이 순간 자체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소중하게 여긴 나머지 영원히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의 모습, 감정, 분위기 그대로 박제를 하여 나만의 저장고에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내 휴대폰 앨범은 며칠만 지나도 몇 백 장이 금세 쌓였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산책을 하다가 마주치는 풍경, 자연의 변화, 가끔은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까지 꼼꼼히, 참 많이도 담았다. 사진 찍기를 즐긴다기보다는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이 아쉬워서 찍은 것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탓에 정작 찍어 놓은 사진을 들여다볼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으면서도 말이다.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의 현재를 지배한 것은 “아, 이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이런 걸 보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라기보다는 “아, 아쉽다. 이 시간이 또 안 오겠지?”하는 생각이다. 행복을 느껴야 할 순간이 어딘가 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1994년 4월의 어느 늦은 오후가 기억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반 아이들 몇몇과 노래 연습을 했다. 교내 합창대회를 준비 중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다가 지겨워진 우리들은 체육관 앞쪽에 있는 뜰에 나가 연습을 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 하늘이 붉었다. 그때 살랑 하고 내 볼에 바람이 스쳤다. 약간의 따스함을 머금고 있는 봄바람은 나의 콧속으로 대기가 내뿜는 생명의 기운을 실어 날랐다.       


천천히 나는 나와 분리되어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공부해야 하는 압박감을 잊은 채 모두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이 참 행복하다고 느꼈다. 노래를 부르다 말고 몇몇이 웃기는 표정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모두가 허리를 반으로 접어가며 웃어댔다. 깔깔깔 소리가 하늘 높이 피어났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1994년의 봄은 다시 오지 않을 테지? 나이가 들면 이 순간이 그립겠지?’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아쉬움에 사로잡히는 삶의 태도가 어릴 때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것을 바꾸기는 쉽지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몇 달 전, 남편이 나이 들면 한국 가서 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정확히 나이가 든다는 게 언제쯤 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꼭 가겠다는 게 아니라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상황이 뒤집어져도 열 번은 더 바뀔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한국에 사는 미래의 내가 영국 생활을 그리워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가면 영국에서 살았던 지금의 순간이 엄청 그리울 것 같아.’      


훗날 내가 느낄(안 느낄지도 모르는) 감정까지 챙기다 보니 스스로가 가여워 마음이 울렁거렸다. 감정의 깊은 골에 빠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또한 두 아이가 커서 독립하여 내 곁을 떠날 때, 우리 집 강아지가 언젠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를 생각하면 비슷한 생각이 들어 가슴이 미어지곤 했다.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음가짐은 한창 불안증과 우울감이 심했을 때, 사고체계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평소 내가 유지해온 사고방식이 달랐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느끼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심리상담치료를 받고 생각을 틀을 바꾸겠다고 노력한 후, 상당 부분 나아지기는 했다.       




라디오 방송 <두시탈출 컬투쇼>는 시청자들의 재미있는 사연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데 사연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다시 찾기가 어려워 기억의 퍼즐을 끼워 맞춰보자면 이랬다. 결혼한 지 몇 년 된 부부가 아이를 시부모님께 맡기고 데이트를 했단다. 아내는 오랜만에 한 데이트라 기분이 한껏 들떠서 집에 왔는데 남편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아내에게 말했다. 


“아쉽고 잡고 싶다.”      

“어머, 자기야, 나도 아쉽고 잡고 싶어!”       

아내는 남편에게 안기며 말했는데 남편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길,       

“갑자기 왜 이래? 나는 안 씻고 자고 싶다고.”     

 

사연을 듣다가 빵 터지고 말았다.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여자에게 한 번 감정이입이 되었고, 그 상황을 반전으로 몰고 간 남편의 진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무릎을 쳤다. 그래, 이 남자처럼 현실의 감정에 충실하자. 1초에 1초씩 멀어지는 현재의 순간을 아쉬워하지 말자.       


그 후 나는 아쉽고 잡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마다 입 밖으로 외친다. 영글음, 네가 지금 안 씻고 자고 싶구나! 그러다 보면 부부의 사연이 생각나면서 나의 상황이 코믹버전으로 바뀌어 웃음이 먼저 나온다. 그렇다 한들, 지금의 순간도 지나면 다 아쉬울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나 실컷 아쉬워하고 오늘은 일단 지금의 행복에 충실하기로 하자.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가르침을 준 <컬투쇼> 사연 속 부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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