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에 담긴 우주

한국 전통정원 이야기

by 손훈

봄의 화원, 서화연에서 시작된 물음

남녘에서 불어온 봄기운이 무르익을 무렵, 축령산 자락에는 한 폭의 동양화이자 천상의 화원(花園)이 있다.


아침고요수목원의 서화연!


그 연못에는 매화, 목련, 개나리, 벚꽃들이 수문장 교대식하듯 화사한 복장으로 도열하고 있었다. 가운데는 작은 정자와 곡선의 연못이 있어서 여기가 한국의 정원임을 일깨워준다. 여백과 곡선으로 표현되는 서화연을 볼 때마다 마치 꿈속의 화원을 본 듯, 놀랍고 멋지고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전통정원과 연못에는 어떤 건축적 기준이나 의미가 담겨 있을까. 문득 우리 주변에 있는 왕실정원과 연못부터 둘러보고 싶어졌다.

아름다운 서화연의 봄 풍경 (사진: 손훈)


경회루: 연못에 새긴 우주관, 천원지방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찾게 되는 경복궁. 서편에 자리한 경회루는 나라가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기 위한 누각이다. 조선시대 태종 때 조성된 이곳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동양의 우주관을 따랐다고 한다. 음양으로 보면 하늘은 양, 땅은 음이며 남자는 양이며 여자는 음이다. 음과 양의 화합이라는 만물의 생성원리가 담겨있다.


넓고 네모진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과 경회루가 있는데, 1층을 보면 바깥기둥은 사각형, 안쪽기둥은 둥글다. 바깥기둥 24개는 24 절기를 상징한다고 하며, 경회루 자체가 음양오행에 근거한 건축물이니 조선왕조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었다. 연산군은 이곳을 밤낮으로 흥청(가무에 능한 시녀들)과 함께 유희의 공간으로 삼았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망하니 우리 속담에 '흥청망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경회루에 얽힌 얘기는 구종직과 세종대왕, 중종과 인왕산 치마바위 (단경왕후) 등 솔찬게 있다.

경복궁 경회루와 전통연못 (사진: 손훈)

연못은 남북 113미터, 동서로 128미터로서 뱃놀이를 할 만큼 꽤 넓다. 연못 속에는 주로 한 가지 꽃과 한 종류의 물고기가 있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알고 보니 연꽃과 잉어가 주인공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꽃을 피운다 하여 고고한 군자(君子)를 상징한다, 불교에는 깨달음, 해탈을 뜻하여 부처가 연꽃 위에 좌정해 있지 않는가. 초여름에 활짝 피는 연꽃으로 유명한 양평 세미원이나, 시흥의 관곡지 연꽃테마파크에 가보면 연꽃의 자태와 표정이 도도하고 매혹적이다.


잉어는 효(孝)와 함께 등용문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존재다. 유교 문자도(文字圖)라 하여 유교의 주요 덕목인 효제충신 예의염치(孝悌忠信 禮義廉恥)를 각 글자와 관련된 고사나 설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도안화하여 주로 병풍그림으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효는 왕상(王祥)이란 자가 부모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은 일을 그린 것이라 한다. 그래서 삼강오륜의 교훈적 의미를 민화형식으로 대중에게 파급되었다. 검푸른 잉어는 느리지만 힘이 있어서 과거급제의 표징으로도 연못에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남원 광한루원에 가보면 오직 잉어들만 먹이를 달라고 모여드는 걸 보면, 연꽃과 잉어의 상징성이 전통연못 구성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어 보인다.

한국민속박물관 소장, 유교 문자도 효(孝)


창덕궁 후원: 자연을 빌려 쓴 공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원을 든다면 단연 창덕궁 후원을 꼽을 수 있다. 1997년 유네스코로부터 창덕궁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후원(後苑) 외에 비원(秘苑)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구한말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의 이름이 비원이었기에 사용된 것이고, 후원이 보편적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프랑스의 대표적 정원인 베르사유궁의 정원을 떠올려보자. 석조건물 전면에 우람하고 울창한 나무숲과 조각상, 분수가 도열해 있다. 크지만 한눈에 윤곽이 들어오고 분수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솟아오른다. 서양식 정원은 사람이 자연을 설계한 흔적이 여실하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의 정원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은 범위 안에서 인공을 가하는 절제, 즉 자연과의 조화를 최상의 가치로 삼았다. 후원에 들어서면 산능선과 골짜기 그대로, 물길도 자연스레 흘러가니 병풍처럼 한 폭을 펼쳐야 다음 전경이 펼쳐진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다는 얘기다. 또한 목조건물인 한옥 앞에 정원수가 울창하면 햇빛을 가려서 습기가 차고 벌레가 꼬여든다. 정원을 뒷 공간에 두는 이유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사진: 손훈)

우리 후원에는 분수나 조각대신에 작은 폭포나 괴석을 두어 자연을 완상(꽃, 달, 그림 등 아름다운 대상을 취미로 즐기며 감상하는 것)하거나 휴식의 공간으로 삼고 있다. 분수처럼 물이 거꾸로 솟는 행위는 자연을 역행하는 것이니 폭포를 통해 자연의 순리를 담아둔다. 우리 전통정원은 한눈에 다 담을 수 없고 집 뒷 공간에 배치하며 작은 폭포와 물소리로 자연과 교감한다고 하겠다.


설계된 자연과 빌린 자연

우리 후원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독특함이 있다. 후원의 부용지는 네모진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대표적 방지원도형(方地圓圖型)이다. 연못너머 주합루를 바라보면 물속에 비치는 자연물-하늘, 구름, 산, 나무 등-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바깥 자연을 빌리는 차경(借景)! 우리 선인들은 부용정에 앉아서 물속에 반사된 차경을 보고 음미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지 않았을까. 일본 교토에 있는 고쇼(황궁)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정문에서 고쇼까지 줄지은 꽃나무들은 잘 가꾸어져 있었고 넓고 깨끗하며 엄숙했다. 황궁 주변에 돌과 물의 정원이 많았다.

일본 교토 고쇼(황궁) 전경 (사진: 손훈)

일본정원을 자연을 줄여담은 축경(縮景)의 정원으로 불린다. 시원하고 담백미가 있어 보기는 좋으나 손길이 많이 간 인공 공간이다.


이제 우리 왕실을 벗어나 민간공간으로 가보자. 남산골 한옥마을의 정원도 천우각과 마름모형 연못, 둥근 섬이 있고, 북촌의 인촌 김성수 선생의 고택에도 작은 정자와 연못을 볼 수 있었다. 자연정원이라 불리는 화양계곡, 삼척 죽서루, 밀양 영남루도 기본적으로 물을 곁에 두고 완상하는 구조이다.


우리나라의 정원과 연못은 서로 불가결한 관계이고, 그 속에 담긴 선조들의 우주관과 상징들은 너무도 심오하고 철학적이며 관조적이다. 후원은 꾸민 정원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질서를 잠시 빌려 쓴 공간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향원정 (사진: 손훈)

정원이 자연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그릇이 하나씩 있다. 누구에게나 귀중한 것을 고이 간직하는 창고가 그것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수장고가 소장품을 보존하다가 때로 전시를 위해 세상 밖으로 내보이듯, 우리 안의 수장고도 그렇게 쓰인다.


삶이 고달프거나 허전할 때,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자신의 수장고에서 귀한 추억이나 흐뭇한 장면을 끄집어 내보자. 소장품이 많을수록 좋겠다. 우리 선조들이 가까이 두었던 전통정원과 연못의 자연미를, 그 수장고에 넉넉히 품어두길 권하고 싶다.


손훈 (2026. 3. 5.)

편집 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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