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골과 인천 국제 공항
너는 혹시 연인 사이에서 아니면 우리 관계에서 상상해 본 로망 같은 게 있어? 아마도 너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나는 너와 만날 때가 가까워질 때마다 꿈꾸는 장면이 있어.
그건 바로 공항에서의 재회야. 특히 나의 로망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공항 엔딩 중에서 나탈리가 자신의 연인인 휴 그랜트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이야. 나탈리가 입국장에서 출장을 갔다 돌아온 휴 그랜트를 보자마자 뛰어가서 훌쩍 안기고 휴 그랜트는 그런 나탈리를 안아 올리며 그동안 살이 찐 것 같다는 농담을 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 장면이 너무 예쁘더라고. 러브 액츄얼리의 모든 에피소드가 공항에서 엔딩을 맞이하고 이후 다양한 공항의 만남 씬들로 화면이 분할되는데, 그 많은 장면들 속에서도 반갑게 서로를 재회하는 이 연인이 내게 무척 인상 깊게 남아있었어.
우리는 1년에도 서너 번은 공항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니까, 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이 장면을 마음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는데 - 특히 공항에서 너를 기다릴 때면,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뛰어가 안길 거리를 생각해보곤 했어. 그렇지만 아직 한 번도 실제로 시도해 본 일은 없어서, 아마 너는 내가 이런 로망을 가지고 있는 걸 전혀 몰랐을 거야.
사실 우리의 재회가 그다지 낭만적이었던 일은 없었던 것 같아. 내가 지각을 해서 널 기다리게 한 적도 있었고, 네가 다른 친구와 함께 있었던 적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게이트가 아닌 화장실 앞에서 만난 적도 있고 말이야. 그리고 이런 외적으로 멋지지 않은 상황은 차치해두더라도, 우리 둘 다 오랜만의 만남이 낯설어 항상 어색하게 손을 잡으면서도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이인 것처럼 의미 없는 말을 하며 공항을 나왔던 것 같아. 이미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지만, 우린 떨어져 있는 게 더 익숙해서 그런지 다시 만나는 날 바로 몇 개월 동안 목소리로만 듣던 서로의 모습을 따라가는 게 쉽지는 않았어.
그에 반해, 이별의 순간은 조금 더 추억처럼 기억되는 순간이 많아. 열흘 남짓에 잠깐이나마 함께 있는 게 익숙해져 다시 서로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 많은 아쉬움을 느꼈고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런 마음이 겉으로도 많이 흘러나온 것 같아.
헤어지는 게 싫어서 샤를 드 골 공항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꼭 안고 울었던 여름 날도 기억이 많이 나. 특히 그전까지는 너와의 짧은 만남이 끝나고 헤어지는 게 와 닿게 슬프지 않았는데 그 날은 (그리고 그 뒤로도) 유독 헤어지는 게 마음 아파서 그동안 우리의 사이가 달라졌구나 하는 감회가 들기도 했어.
인천공항 출국장의 쇠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손을 잡고 계속 입을 맞추었던 날도, 여권을 확인하던 공항 직원이 불투명 유리 칸막이의 반대쪽 끝에서 너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너의 어깨를 톡톡 쳐 내 쪽을 가리켜 주던 날도, 네가 보고 싶은 날에 가만 떠올려보면 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예쁜 추억이야.
공항 입국장에서 많고 많은 여행사 가이드 사이로 가끔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을 발견할 때가 있어. 그런 사람들은 귀엽게도 “9년 같은 9일이었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어 눈에 띌 때도 있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라고 탄성을 지으며 일행들과 급히 인사를 하고 달려가는 걸 보고는 아 남편이 깜짝 마중을 왔구나 하고 알게 되기도 해.
우리는 이별할 때 우리가 만날 때보다 더 자연스러울까 생각했는데, 우리에겐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함께 하는 시간보다 훨씬 기니까 서로의 부재로 돌아갈 때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 또, 며칠 후에 다시 만날 사람들의 헤어짐은 그렇게 슬프지 않은 것처럼, 이 주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헤어질 걸 아는 우리의 만남은 마냥 기쁘지 만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어.
언젠가 너를 “잘 가” 가 아닌 “잘 다녀와”하는 인사로 배웅하고, 열흘쯤 후에 다시 너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가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그 날엔 아마 더 편안하게 너를 보내주고, 더 반갑고 행복하게 내가 꿈꿔왔던 장면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