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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아들 May 07. 2017

작가아들의 엄마 소개

저의 어머니는 설치미술 작가입니다

https://brunch.co.kr/@sonofartist


제가 바라보는 어머니의 삶을 저만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삶과 행복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가족은 지금 파탄이 나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저의 어머니는 예술가입니다. 

네. 저는 설치미술 작가로 활동하는 중견작가 이은숙의 둘째 아들(33)입니다.


앞으로의 연재를 통하여 이은숙 작가의 삶을 제가 보는 관점에서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정말 코미디 같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씁쓸한 웃음이긴 하지만요.

이 사진속 아줌마가 나의 엄마 

작가아들의 엄마소개-


이은숙 작가는 환갑을 막 넘은 중견작가다.

현시대의 작가들이 그렇듯 이은숙 작가도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다. 


엄마는 내가 돌이 되던 해에 첫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작업실이 없어 부엌에서 진행하던 작업 재료에 불이 붙어 신체의 40% 이상에 화상을 입게 된다.

결국 내 애기 사진은 돌 사진을 기점으로 유치원 때까지 없다.


내가 4 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고

쭈글쭈글한 팔과 목을 최대한 가린 마녀 같은 아줌마를 형과 나는 반기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온 후 우리 집에는 매일같이 성당 아줌마들이 나들기 시작했고

무슨 이도교 종교집단마냥 서로 주문을 외우곤 했다.

형은 엄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인 거 같다. 엄마가 미쳐버린 게. 아니 작가의 삶으로 들어선 게.

"꿈에 지져스가 내려와서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서 레이저 같은 빛이 나오게 한 거 있지"

엄마 말로는 이 손 끝에서 5개의 레이저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거짓말로 만들고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설치미술작가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언제인가 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점을 보러 갔다.

내심 나의 점괘가 궁금하기도 하고 엄마 또한 나의 장래를 걱정해 주는구나 하며 들어갔다.

40분의 점 상담(?)에 내 이야기는 없었다.

이때 점쟁이가 엄마의 작가 인생에 초를 치고 조언을 해줬더라면 엄마가 지금쯤 더 편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 맞지 않는 20년 전 점쟁이의 말을 엄마는 아직도 기억하고 믿고 있는 걸까?

그 점쟁이를 내가 지금 만난다면 머리에 천일염을 뿌려 줄것이다.


형(37)은 당시 나보다 4살 빨랐으니 현실을 보는 눈이 있었나 보다.

엄마랑 붙어 다니며 미술을 하겠다는 나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정신 차리라 교훈을 주었다.

결국 미술 관련 공부를 하지는 않았으나 이제 와서 엄마를 이용하겠다는 것을 보니 그때 덜 맞았나 보다.


엄마작품의 주 재료는 실이다.

섬유학을 전공하여 실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나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 자신의 가족을 돌아보며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길 바라며 

이은숙 작가의 작가노트를 아래에 옮긴다.

섬유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실을 등에도 매고 머리에도 쓴다.. 



이은숙 작가의 작가노트

www.eunsooklee.org


1986년 4월 내 나이 서른. 파라핀이 과열되어 불이 붙었고 몸의 40%가 화상을 입었다

여자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며 현모양처로 행복한 삶을 꿈꿔왔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꿈이 현실이 된 지 1년 만에 온몸에 불이 붙으며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고 나는 변하였다.


내세가 있는가.. 전생이 있는가.. 나는 왜 태어났나..


내가 죽어도 내 아이들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작품은 나의 죽음과 함께 성장이 멈춰버린다. 

나에게 의존된 작품을 끊임없이 걱정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는 나의 오른쪽 손을 영원히 못 쓸 것이라고, 절망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서 예수를 만났고 그는 나의 손가락에 5개의 강한 직선의 빛을 보냈다.

의사의 말을 믿지 않고 8번의 성형수술과 3년의 재활치료라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내 손가락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감각이 둔해졌지만 의사는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재능이었고 끊임없이 손을 이용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 삶의 첫 작품이자 설치미술에 발을 들여놓는 “Body and Soul”(1986)이 완성되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보았던 영혼들을 보여주기 위해 UV light를 쓰게 되었고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10미터가 넘는 설치작업“기다리는 영혼”(1994)을 시작으로 “탯줄”(1994), “잃어버린 태아”(1999)등 생명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실은 나에게 핏줄이다. 

얽힌 실타래의 실을 풀어 억압된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며 어두운 UV light 아래에서 만날 수 있는 생명의 몽환적인 이미지는 내 삶을 대변해 주었다. 디스코 조명에 형광 실과 비닐 쪼가리의 만남이라며 야유를 하던 비평가들 속에서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해 나아갔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나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곳 독일 베를린에 초청되었다. 블랙 라이트만 쓰는 세계 최초의 구릅 전 “BacklightGallery in Berlin” 에서 전시 준비를 하는 동안 그 장소가 베를린의 동서를 분단했던 분단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의 분단선에서 설치를 하게 되자 나의 아버지와 우리나라의 역사가 떠올랐고 “Livingtogether” 의 제목 아래 집을 지었다. 북에서 피난 내려온 아버지를 통해 분단의 아픔을 알아가던 중 북에 4명의 가족을 두고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북한에는 4명의 내 이복형제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항상 엄마의 가족사진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독일에서 대한민국을 남과 북으로 분단시킨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현장을 찾아갔다. 이제는 통일을 위한 회담이 필요하다는 “ New Potsdam Conference”를 물 위에 설치한다. 내 가족의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우리나라 이산가족 5000명의 이름을 넣어 통일을 기원하는 “Vanished Berlin Wall”이라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Vanished Berlin Wall, 2007

2010년 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자식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이 아픈 영혼을 달래기 위한 여 한국의 DMZ 에 북에 있는 이복형제의 이름을 포함한 모든 분단 가족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자음과 모음을 설치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슬퍼할 겨를 없이 가족 내 소송이 시작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분단만큼이나 고통스러운 현실이 시작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현대 사회 속에 단절된 가족의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대형 의자와 벤치를 만들어 아시아의 가장 바쁜 홍콩에 설치했다. 오늘날 나의 작품에서의 실은 단절된 부분을 이어주며 빛은 희망을 밝힌다. 앞으로 이 실을 통해 억울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작업을 계속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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