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노트 01]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법

노동에서 즐거움으로, 좀 더 편안한 수작업으로써 디지털 그림 이야기

by Son the writer


그림 작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그런 편안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에게 그림은 우선 노동으로 인식되었다.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그림 하나를 그린다고 하면

가장 쉽고 빠른 도구는 연필과 종이다.

하지만 연필로 그림을 연습한다는 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연필 쥐는 법, 선 긋는 법을 익히고

구체의 음영을 넣는 법 등을

몇날 며칠, 하루 종일 반복해야 한다.


원 쉐이딩.jpg https://openoregon.pressbooks.pub/drawing/chapter/exercise-5-1-2/



중학생 시절,

입시미술을 하던 짝꿍 친구는 이렇게 말해줬다.


"그거 가지고 엄살은.

연필 소묘로 정밀 데생을 하면 어찌 되는 줄 알아?

전지 크기로 그리는데 15일 정도 걸려."


“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인단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싸하게 식었다.


‘아, 그림은 엄청난 노동이구나.’


이 생각이 머릿속에 깊게 박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도

국민학교 1학년 시절 어린이 사생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어린이 사생대회.jpg 백일장 및 사생대회는 초등의 전통문화가 아닐까. 한결같은 장맛이 있다.



당시 학교에서는 잘 그린 아이들의 그림을

교육청에 보내 심사를 했는데,

나는 여러 학교에서 모인 작품들 중

상위 몇 명에게만 주는 대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림에 대해 좋고 싫고 하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사생대회를 위한 단체 나들이 중에 그렸던 그림이

선생님 눈에 들어 자동으로 사생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뿐이었다.


어쨌든 못 그리지는 않았으니 상을 받은 셈이다.


그랬던 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국민학교 미술 수업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나는 미술 수업이 너무 싫었다.

‘내가 표현한 것에 대해 왜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지?’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싫었다.


나는 그림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평가받는 그림이 싫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억지로 미술 수업과 과제를 했고,

어떤 때는 점수가 높게 나왔지만 억지 춘향 심정이 들 뿐,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나는 그림에 대해서

도대체 뭐가 좋은지 하나도 모르겠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림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에 진출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전자출판과 연이어서 컴퓨터 그래픽 붐이 일어난 것이다.


하필 직장이 이쪽 분야와 한 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윗선의 사정으로 나는 그 분야로 차출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업무상 내부와 외부의 편집 디자이너,

그림 작가, 출판업자들을 매일 상대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그들에게 물들어 갔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일을 알고 싶었다.


나 역시 컴퓨터에 타블릿을 연결했다.

당시에는 USB가 아니라 시리얼 포트에 연결해야 해서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당시 최첨단(?)이었던

포토샵과 페인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페인터 8.jpg 석정현 작가의<석가의 페인터 8.0> 교재. 당시만 하더라도 페인터는 포토샵이 못하는 걸 하는 투톱이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느렸다.


컴 사양이 낮았고 프로그램이 너무 무거웠다.

문서를 인쇄출력 크기로 해놓고

선 하나 그리면 달달 늦게 화면에 그려졌는데,

어느 세월에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게다가 그림 실력이 없으니 뭐가 나오겠는가.

낙서가 나왔다. 하하하.






낙서가 내 출발점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디지털 그림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년 후,

업무와 환경 모두 바뀌고

먹고 사는 문제로 바빠지면서

나는 오랜 시간 그림에서 손을 놓게 된다.


그리고 훨씬 더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디지털 그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이제는 취미다.

나는 그림으로 즐거워지고 싶다.


RD9263-Greetings-to-you-Charlie-_-the-Chocolate-Factory-Roald-Dahl.jpg 퀜틴 블레이크 (Quentin Blake), 아동 도서 일러스트로 유명한 그림 작가이다.



물론 여전히 그림을 노동처럼 느끼는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그림에 대한 선입견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 선입견의 정체는

잘 그렸네 못 그렸네를 따지는 상대평가와 점수였다.


그게 사라졌다.

공교육 미술의 악영향에서 벗어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림 미술을 시작하는데

왜 나는 연필과 종이 대신 디지털 그림을 하려는 걸까.


물론 종이에 그리는 것이 훨씬 느낌이 좋다는 것을 안다.


종이의 텍스처 질감, 자연스러운 선의 멋,

선을 그릴 때 느껴지는 연필 심 끝의 마찰 감각은

수작업의 묘미다.


수작업 그림이 가진 실물의 존재감과 아우라는

디지털이 결코 따라갈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디지털 그림을 선택했다.


이게 더 뛰어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내가 디지털 그림을 선호하는 이유는 단 하나,

편의성 때문이다.


Undo로 수정할 수 있고,

복제가 가능하고,

보관이 쉽고,

레이어와 클리핑 마스크를 사용할 수 있고,

버킷툴로 색을 채울 수 있다.


이런 편의 기능들이

작업을 훨씬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디지털 그림은 좀 더 편안한 수작업이다.'


내가 편안하다는 것.

이것 하나가 디지털 그림을 선택하게 만든다.






그런데 디지털 그림을 그리려면

필수 도구가 하나 있다.


바로 타블릿이다.


타블릿은 잘 골라야 한다.

한번 구매하면 매우 오래 사용하게 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타블릿을 선택하면

작업하기도 전에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타블릿에는 목적별로 유의할 점이 있고,

초보자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사람들조차도

자주 실수하는 중요한 내용들이 있다.


다음 글에서는

타블릿을 고를 때 유의할 점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컴퓨터 사양 이야기는 왜 하지 않느냐고?


굳이 다룰 필요가 있을까.

요즘 컴퓨터는 성능이 매우 좋아서

페인팅 프로그램은 거뜬하기 때문이다.


- 계속





2026년 4월 6일 저녁에 완성

2026년 4월 15일 업로드

Son the writer (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