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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라는 거창한 제목은 한치의 틀림 없었다

by sooowhat

우리는 베토벤, 고흐 같은 거장들의 삶을 익히 알고 있다. 뒤틀린 천재들의 이야기는 흔한 서사다. <국보> 속 예술인들의 일생도 소재만 놓고 보면 틀이 비슷하다. 그런데 국보에선 이 전형적 서사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아마 영화가 인물의 감정선을 극도로 섬세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영화 속 소재인 가부키 극과 꼭 닮아있다.


제목부터 얘기해보고 싶다. 일본 전통 가부키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내게 '국보'라는 제목은 영 흥미가 안 가는 제목이었다. 일본 인간 문화재 이야기에 흥미가 안 갔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게다가 '국보'라는 단어는, 너무 정직하지 않나? 2인자 살리에르도, 미쳐버린 천재도 아닌 그냥 '탑(=국보)'의 이야기라니. 노력과 성공의 뻔한 휴머니즘일 것 같아서 영화를 봐, 말아 고민을 했더랬다.


결론은, 이 영화를 안 보고 제꼈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싶다. 3시간의 러닝타임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최근 본 영화들에 들인 시간이 아까워질 정도의 3시간이었다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영화를 보고 나니 <국보>라는 제목 또한 더함도 덜함도 없이, 이 제목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 나라 국보의 경지에 이른 인물을 위아래 수직으로 펼쳐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그것의 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생을 제물처럼 바치는 운명. 그것이 영화 속에 그려진 가부키 배우들의 운명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생의 지향점.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곳을 향해 걷는 길은 지극히도 인간적이었다. 궁극의 예술을 탐미하는 생은 고상하지도 고고하지도 않았다. 신적인 존재처럼 현실에 초연하거나 진보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미완성 앞에 갈등하고 혼란스러워 하다 이기적으로 변모하는 범인의 순간들이 가득할 뿐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최고의 배우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키쿠오의 말을 듣고, 딸 아야노는 어린 나이에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의 눈빛이 자신이 아닌 허공을 향하고 있었던 것을. 또한 그에게 필요 없는 것에는 자식인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락의 최저점에서 옆을 지켜준 아키코에게서도 키쿠오는 대체 어딜 보고 있느냐는 똑같은 원망을 듣는다. 키쿠오 자신에겐 위안이었으나 그만한 위안을 돌려주지는 못했던 하루에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키쿠오에게 순애를 지키던 하루에가 예상 외로 그의 프로포즈를 에둘러 거절하고 종국에 키쿠오를 떠나 뜬금없이 슌스케와 결혼한 것도, 키쿠오를 동경하고 존경하지만 끝내 그와는 삶의 정서를 공유할 수 없을 거라 결론 내린 때문 아닐까.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으려는 길 위에는 인간적 삶을 망쳐야 하는 대가가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을 한 번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는 삶. 그것이 키쿠오가 악마와 거래하여 일본 최고 배우의 자리에 오르는 결과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국보 기념 인터뷰 씬에서 키쿠오의 눈빛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초월적 눈빛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취약한 눈빛이다. 네가 없어도 상관 없다 말했던 아버지의 목소리와 표정을 평생 안고 살았을 딸 아야노. 인터뷰장에서 십수 년 만에 그녀를 마주한 키쿠오의 표정엔 씁쓸함과 회한, 수치심이 담겨있다. 어딘가 불편한 듯 묘하게 뒤틀려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생을 나는 그저 받아 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적어도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키쿠오를 연기한 배우 요시자와 료도 동일한 해석 하에 이 씬을 연기했을 것이라 혼자 믿어본다.


이에 더해 피칠갑하며 그릴 수도 있었을 키쿠오의 여정을 덤덤하게 그려낸 이상일 감독의 연출이 정말 좋았다. 키쿠오-슌스케 콤비는 서로의 운명을 질투했지만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외딴 예술의 섬에서 궁극을 향한 자기파멸의 길을 걸을 때 둘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제거할 수 없는 정적이자 사랑하는 동지적 관계. 이 관계가 도파민 자극 없이 깊은 여운이 남도록 그려졌다. 두 콤비의 마지막 가부키 무대는 극 자체로나 서사로나 둘의 관계성에 대한 묘사를 압도적 형태로 종결짓는다. 그렇게 모든 장면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며,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가 한계 없는 아름다움을 좇을 때의 절망을 3시간 동안 아름답게 그려낸,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영화였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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