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성찰
이 글을 보는 사람 중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도 다시금 그 정도가 갈릴 것이다. 영화관 멤버십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영화광들부터 인기 있는 간판 영화들만 극장에서 챙겨보는 영화 마니아들까지. 여기서 그 외의 부차적인 것은 대화에 있어 고이 접어둘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는 시선이나 지식, 혹은 그 외의 부차적인 행동력과 개인의 성격. 어찌 됐든 그들 모두가 영화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으로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
이때 그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는 분명 대중적인 취미이고 실제로 접근성이 무척 좋다. 30~40대 이전의 독자들이라면 분명 영화관에 들락날락하며 자라온 ‘시네 키드’일 것이 틀림없다. 분명 학창시절 학기 초 담임 선생님께 자기소개서를 제출할 때 취미 칸에 독서, 영화감상, 음악감상 등을 적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실제로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어도 영화 감상이라고 버젓이 적어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적어냈을까?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엔 영화가 너무 재밌다. 단지 구태여 영화에 소모할 시간을 내지 못하거나 혹은 낼 마음을 다른 취미에 쏟던가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 영화는 재미있다. 그런데 영화가 왜 재미있냐 묻는다면 솔직히 무어라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항상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이유를 따져 묻는 이성적 사고를 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해명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릴 테다. 감성적 사고로 영화를 보는 사람은 영화를 한 편의 시(時)로 보기 때문에 세세하게 따져 물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건 정확하게는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영화가 재미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의 재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원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는 왜 재미있는가?
영화가 왜 재미있냐고 다시금 되물어보자. 그 재미는 이른바 취향의 영역이니 장르적 접근을 해보자. 액션, 로맨스, 드라마, 애니메이션, SF, 다큐멘터리. 그런데 이것은 굳이 영화가 아니어도 재현될 수 있다. 만화에도 무협지와 판타지가 있듯이, 소설에도 로맨스와 SF가 있듯이, 물론 매체의 특성에 따라 그 재현이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지 영화가 영상의 문법으로 쓰였다고 해서 그것이 영화만의 특성인지는 의문이다. 소설에는 종이 위의 문법이 있고, 만화에는 지면의 문법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문법이 영상의 문법으로 번역되는 것을 가끔 목격하고는 한다. 원작 소설이나 원작 만화와 같은 것들이 이것에 해당한다.
물론 번역은 원본의 가치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하는 작업이다. 번역이라는 것, 단어와 문장의 일대일 변환은 사실상 그 언어를 벗어날 때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만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것이 번역된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그 이유는 지구상의 모든 언어가 본래의 기초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촘스키는 이를 인간이 언어능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생성문법’이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이것을 ‘언어’에만 국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언어란 카메라이고 따라서 그것은 본디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장면 하나를 상상해보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른바 ‘영화화’라고 불리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반지의 제왕>나 <해리포터>와 같은 것들인데, 여기서 논의할 것은 그런 영화화가 아니다. 말 그대로의 ‘영화화’란 당신이 생각하던 어떤 상상을 스크린 위에 구현해내는 작업이다. 로맨스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형태를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액션 영화에서 나타나는 전투의 양상을 바라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언컨대 우리가 영화를 보는 목적 중의 하나는 그것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러한 상상이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생긴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아마도 촘스키의 논고에 따른다면 전자일 것이다. 이때 다시금 궁금증의 여지가 생기는데, 바로 ‘심상’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분명 영화를 보며 겪어보지 못한 것들에 공감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본디 그것을 겪어보았거나 혹은 상상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우리의 넓디넓은 상상에 대응할 수는 없기에 분명 이것은 모종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쉽게 말해 영화의 상상력은 이따금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곤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동시에 영화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추측을 약화시키곤 한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문법체계를 이루고 있다. 마블 영화의 히어로들이 각자 개성이 다르지만 결국 하는 일은 비슷한 것처럼, 애당초 우리가 꿈꾸던 영웅의 양상에 크게 엇나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 각자 영화가 ‘영웅’이라는 언어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방언’이라고 불리는 것, 조금은 달라질지 몰라도 알아들을 수는 있는 ‘이웃사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장르의 변형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아마 그렇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선호하는 장르가 명확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다른 나라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영화를 보지 못한다. 여기서 ‘본다’라는 것은 시각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해’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재미없다’라는 말로 표현하고는 하는데, 그것은 결국 ‘보기 싫다’와 비슷한 맥락의 뜻이니 그 두 가지는 같은 선에서 읽을 수 있다. ‘재미없다’는 곧 ‘보기 싫다’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해석에는 어폐가 있다. ‘재미없다’는 단순히 재미가 없다는 사실관계에 기초하지만 ‘보기 싫다’란 그 의미에서 조금은 더 열려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재미뿐만 아니라 신념에 맞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의 논고 중엔 정치나 종교처럼 개인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보편적이지 않은 문법체계가 존재하므로 그렇다. 비기독교인이 기독교 관련 영화를 보면 재미를 느낄 수는 있어도 관심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해할 수 없다란 두 가지 측면에서 읽혀야 한다. 하나는 정말로 그 문장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장의 뜻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영화의 언어인 카메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바, 그 영화의 카메라를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화를 사랑하는 정도가 나뉘게 된다. 영화를 조금 더 사랑한다면 그 영화의 문법을 익혀 대화할 것이고, 메시지를 해석하고 그에 의견을 표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그저 영화를 즐기기만 하는 정도라면 표면적인 흐름에서 영화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호감도가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재미있다는 것이란, 그 한 가지 단어에서 두 가지 측면으로 읽힐 수 있다.
영화라는 문법, 시간과 공간
하지만 그런데도 그 읽힘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가 영상이라는 문법, 말하자면 언어라는 평면성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최초의 언어는 종이 위에서 출발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 언어란 공기 중에 흐르는 ‘체계’를 종이의 평면성 위에 바로 세운 것이다. 하지만 영화란 그 평면성 위의 언어를 ‘공간’ 위로 바로 세우는 작업의 총아이다. 영화의 언어는 바로 그 평면 위에 기초하지만 사실상 그 평면이 수도 없이 밀집된 것이 ‘공간’이다. 따라서 기존의 언어에서 이탈하는, 예외적인 무언가가 생긴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예외가 바로 ‘시간’이다. 언어가 아무리 종이 위에 묘사를 해보아도 카메라의 눈을 따라갈 수는 없다. 렌즈의 범위, 깊이, 중심. 이것은 사람의 눈을 재현한 것이지만 분명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고, 사람의 언어를 재현한 것이지만 분명 사람보다 뛰어나다. 다시 말해 영화의 카메라란 이미 현실 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며, 그것이 비추는 공간도 그렇다. 영화 속에 비치는 공간이란 현실 세계의 그것이지만, 렌즈를 거쳐 맺히는 상은 사실상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영화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건 그것이 우리 언어의 변형, 방언이기 때문일 테다.
어떤 공간을 떠올려 보자. 어떤 시간을 떠올려 보자. 당신은 그 두 가지를 어떻게 합쳐놓을 것인가? 그것은 어떻게 ‘시공간’이 되는가? 아마도 당신은 공간 위에 시간을 올려두지 시간 위에 공간을 올려 두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법에는 ‘후자의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을 달려간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시간’이 주체가 되어 어느 공간 속을 헤쳐 나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보자. 집이 빨라진다. 학교가 느려진다. 이와 같은 말은 분명 어색하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시간’이라 여기며 이곳, 공간을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분명 살면서 시각을 자각하고 있다. ‘불타는 금요일’이나 ‘어중간한 수요일’ 혹은 ‘퇴근 시간’이라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과 함께 이동하고 있음을 말해주며,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시간에 우선해 공간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시공간의 모양새란 공간이라는 그릇에 시간이 담겨있는 것일 테다. 그것은 영화에도 ‘방언’의 형태로 있을 테다. 카메라에 비치는 아름다운 공간이 현실 세계의 눈으로는 무척 평범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경험이 당신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부동산에서 집을 구할 때나 여행 가기 전에 호텔을 알아볼 때가 그렇다. 혹은 동네에서 조깅하며 찍은 풍경이 눈의 시선과 괴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것, 당신이 찍은 사진에서 느껴지던 괴리감은 ‘수십 장이 모여진 동영상’에서 더욱 확대된다. 영화란 사진의 집합체, 총아이며 ‘흘러가는 사진’이다. 즉 영화란 시간이 담긴 공간, 시간이 담긴 ‘사진’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시금 되짚어 보면 영화의 시간이란 공간 속에 담긴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볼 때 현실 세계의 법칙에 따라 시간에 이입하게 되고, 공간은 후행으로 남겨진다. 이따금 시간이 뒤죽박죽인 영화를 보며 새로움을 느끼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편집이란 바로 그런 힘을 지닌다. 편집이라는 것은 시간을 잘라내는 행위이고 따라서 현실에 있을 수 없다. 시간이 잘린다면 그 뒤에 붙은 공간도 잘린다는 뜻이며, 그때 우리는 ‘어느 곳’에서 ‘어느 곳’으로의 이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른바 일종의 교통수단인바, 그 승차감에 따라 영화의 재미가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진의 가장 큰 목적이 기록이라는 것을 안다. 기록이란 그때 그 순간을 보존하겠다는 뜻이며, 그것은 후에 ‘그 시절’이라는 것으로 변환된다. 여기서 ‘그때’란 시간을 지칭하는 말이며 ‘그 순간’이란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둘은 한 데 섞여 ‘그 시절’이라는 시공간의 단어로 변형된다. 영화 또한 그러한 ‘그 시절’의 어법에 충실한바, 하지만 우리는 아주 이상하게 여겨질 만한 사실을 자각하고 만다. 보통 기록이란 ‘지금’을 기록하는 것인데, 어떤 영화에서의 기록이란 ‘오래전’의 것을 현재에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극’이나 ‘서부’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것이 ‘진짜’ 같다고 느끼지 ‘거짓말’ 같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기록, 그 해석의 지점
그렇다면 영화의 기록이란 ‘거짓’인 걸까? 우리는 ‘가상의 진실’을 만들어내어 그 착각 속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현실로부터 도피해 새로운 삶을 꿈꾸기만은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기만은 하지 않은 게 분명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쩌면 구 나치 선전 영화들처럼 믿음과 신뢰로 악용될 수도 있는 효과,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의 영화를 보자. 사라져 가는, 이미 사라져 버린 일본의 한때를 담은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심상을 준다. 그 심상은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직접 보아도 말로 이루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회상’ 적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그 시절’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므로 그 느낌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일 테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따져 물을 수 없는 ‘이상한’일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화를 이성적으로 따져 분석하고 감명의 이유를 해석하려고 들지 않았는가?
이야기하기에 앞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서둘러 보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것은 벌써 7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이지만 단지 영화 마니아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고전이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 고전이라는 뜻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전이란 시대를 초월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유지하는 작품을 뜻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단테의 신곡이 그러한 예다. 말하자면 ‘그 시절’의 가치를 현대에도 유용하게 받아들여지도록 지도하는 ‘선봉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고전이 아니다. 오즈의 영화는 ‘그 시절’의 가치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한때를 붙잡아 둔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고전보단 추억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고, 그 누가 보아도 공감하며 볼 수 있다.
그것이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영화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겠지만, 기록이나 추억이라는 ‘보존’의 관점에서는 단언컨대 그 어떤 영화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따라갈 수 없다. 우리는 분명 일본 사람도 아니며 나이 든 노인도 아니며 어쩌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오즈의 영화는 끝내 물속에서 녹아내리고 마는 솜사탕처럼 희미해지는 추억의 단편을 보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그것이 거짓은 아닐 테다. 그 영화 속 이야기가 배우와 작가에 의해 짜여진 거짓 삶일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시절’로 여겨진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문법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보편적인 추억의 가치, 그 문법을 스크린 위에 구현해내는 작업이 바로 영화라고 보아야 한다. 흔히 아름다움의 척도로 사용되는 미쟝센이라는 단어가 영화 내의 공간 구현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미 영화의 공간에 많은 노력을 할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공간의 구현이란 우리가 공유하는 특정한 추억, 바로 시간을 담기 위한 그릇임이 틀림없다. 그 공간은 우리 마음속 어느 곳에서 와서 어느 곳으로 나가는 문을 만들어 준다. 어쩌면 그 문의 입구와 출구는 단지 현실 세계로 연결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단지 거짓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하게 번역될 수 있는 그 문법적 연결고리가 영화의 시공간에 해당한다.
카메라의 심도와 시간의 깊이
카메라의 심도를 보자. 카메라가 심도를 깊게 하면 원경의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고 전경은 흐릿해진다. 카메라가 심도를 얇게 하면 원경의 사물이 흐릿하고 전경은 또렷해진다. 만약 우리가 이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을 하나의 시간으로 볼 때, 전경은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까운 시간일 테다. 그렇다면 얇은 심도의 카메라란 가까운 시간을 비추는 표지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카메라의 심도를 균일하게 맞추는 딥 포커스가 시간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두를 비춰준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딥 포커스는 화면 내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그 영역 밖에 있게 된다. 우리의 시간관은 다름 아닌 현재만을 바라보고 있고, 딥 포커스는 먼 과거에서 먼 미래를 한 자리에 묶어두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 대부분은 전후경에 걸쳐 골고루 조명된다. 그런데 오즈의 영화가 대부분 그들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저 단순하게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오즈의 카메라는 딥 포커스를 통해 시간을 붙잡아 두고 있다. 그 시간은 과거부터 미래에 걸쳐 있고, 그 인물들은 모두 가족이라는 구심점을 잃고 원심력을 통해 점점 바깥으로 이탈하려 한다. <동경 이야기>, 늙은 노부부는 자식들을 만나러 동경으로 상경하지만 자식들은 그다지 부모를 반기는 태도가 아니다. 에둘러 온천 여행을 보내준다며 말하는 그 맥락에서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매몰찬 속뜻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여관방이 따듯하다며 행복하게 미소 짓기만 할 뿐, 그리고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홀로 남는다. 동경에 온 부모님조차 외면하던 가족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드디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때 그 장면 역시 오즈의 주특기인 딥 포커스가 빛을 발하는데 전후경에 걸쳐 인물들이 골고루 분배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 시선이 같은 선상에 있지를 않아 사실상 단절의 풍경을 보여주고, 그 인물들의 시공간이란 끝내 어디로도 향할 수 없는 것이 돼버린다. 부모의 죽음은 곧 일말의 희망이었던 중심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그들이 묶여 있는 가족이라는 시공간이 해체될 것임을 암시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인 추억, 그것은 ‘혈연’이라는 것으로 정당화되는 일종의 시공간이다. 좋든 싫든 간에 그들을 알고 보아야 하고 인식하게 되는 그 공간의 의미가 분열되고, 마침내 그 속에 담겨있던 그들의 시간 또한 분열되고 만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다시금 합쳐질 일이 없을 것이다. 어느 하나의 시점에서 갈라져 나온 분기점은 이내 평행 세계가 되므로 그렇다.
홀로 남은 아버지는 죽은 아들을 기억하는 며느리에게 새 출발을 권하고 며느리는 애써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허탈해 한다. 그 과정은 홀로 남은 두 사람간의 유대가 점차 진해지는 과정을 묘사함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모이다’와 ‘멀어지다’라는 이질적인 두 단어가 한 자리에 묘사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마치 ‘모이는 축’을 벗어나려 하는 ‘진자’처럼 보이고, 이에 앞서 원심력이라는 힘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자각하며 그 과정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간의 지속성과 비가역성
여기서 ‘진행 중’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러한 진행은 지속성을 표하는 것으로써, 영화의 전후경으로 묘사되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계속’될 것을 말해준다. 영화 속 그들이 겪는 일련의 해체 과정들이 단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틀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것이 영화 속 밖에서도 계속될 것임을 뜻한다. 그 계속성이란 다름 아닌 우리를 향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분열의 이미지에 연쇄된 충격을 받게 된다. 그 분열의 이미지란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되돌아올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종의 불가항력의 힘이다. 어머니는 ‘죽고’ 아들은 장례식에 ‘지각’한다. 아버지는 창밖 너머로 ‘떠가는’ 배를 바라본다. 며느리는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서둘러 ‘내보내려’ 한다. 이러한 일련의 단어들은 모두 ‘어느 한쪽으로’ 진행된다는 공통점이 있고, 그것이 시간의 비가역성과도 같다.
지금껏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달려오던 오즈의 가족들은 이제 그 순간을 기점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동시에 그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시공간도 거대한 평행선처럼 분열될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의 특수성이 사라지는 어느 순간이 오즈의 영화에 있으며 우리의 삶에도 있기도 하다. 오즈 카메라의 특수성으로 언급되는 두 가지는 바로 그 일방적인 시간을 우리에게 인지시키는 효과가 있다. 오즈 영화에서 인물들은 카메라를 직시하며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것처럼 보이고, 암묵적으로 ‘바로 지금, 여기’를 암시하는 효과가 있다. 그 효과가 바로 동일시이며, 그 가상의 공간으로 우리를 불러들인다. 전체 화면에서 굳이 아래를 고집한다는 것, 바닥에서 60cm에 해당하는 다다미 쇼트의 참뜻이란 바로 그 공간의 그 시간을 암시하는 것일 테다. 단순히 카메라의 앞쪽에 위치하는 전경을 넘어서 정말로 그 공간에 있는 우리가 아주 가까이 서로를 마주하는 ‘전경’이 되는 것이다. 그 시간은 스크린 너머로 느껴지는 것보다 무척 가까운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오즈의 가족에 속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즈의 영화는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라 불러야 한다. 오즈의 영화, 공간은 마치 오즈의 가족들이 떠나간 자리의 여백처럼 공허함만을 남긴다. 그 공허함 속에는 끝없이 산재되어 가는 시간의 파편만이 있다. 여기서 기록이란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지이기 때문에 결코 시간처럼 추상적인 느낌으로 분류되는 오즈의 영화에 적용할 수 없다. 그러한 추상성은 우리가 흔히 정서라고 말하는 마음에서 나아가 ‘정동’이라는 ‘동사적’ 언어가 된다. 오즈의 영화가 슬픈 것은 단지 가족의 해체를 뜻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어느 보편적인 ‘생성 문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 한 자리에서 계속 분열된다는 것. 그 분열의 시간 이전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 마침내 그 이전이 점진적으로 흐려지기 시작할 때 애써 붙잡아 두려는 사진 한 장. 그 추억의 비가역성이란 마치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달리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그 시간에 더욱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영화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성
우리가 영화에서 시공간에 관한 소재를 유독 좋아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닐 듯싶다. 이를테면 요즘 유행하는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들은 그 공간을 일종의 ‘시간 저장고’로 사용하고는 한다. 아마 신카이의 팬이라면 벚꽃이나 기찻길을 떠올릴 텐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때 그 시절의 표지에 해당한다. 벚꽃은 봄이라는 명확한 시간 속에 위치하며 등하굣길이라는 명확한 공간 속에 위치한다. 기찻길은 한쪽에서 한쪽으로만 달려가는 ‘비가역성’을 지니고 있으며, 달려가는 도중에 건널목의 양극단을 ‘강제로’ 갈라놓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그 기차의 횡단에 달려들면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카이 영화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계절의 심상은 그사이의 시간을 죽음으로 묘사하는 듯 느껴진다. 봄에 만났던 만남은 그다음 봄까지 마치 죽은 듯한 시공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른바 봄이라는 한정적인 시간에만 깨어날 수 있는 겨울잠, 차가운 죽음이란 아주 강력한 단절의 이미지이며 동시에 분열의 자리에 위치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카이의 영화에서 눈은 그들 세계의 종언을 알리는 결정적인 신호이자 확언이다. 우스갯소리로, 그래서인지 신카이 영화 속 남녀는 끝내 잘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대로 추운 겨울을 나고 다시금 따사로운 봄을 맞이하면 이미 그들의 시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너의 이름은>조차도 그들이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던, 사는 중이라는 분열의 이미지를 끝내 봉합하지 않고 끝이 나지 않던가.
또 다른 영화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자.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시공간에 관한 논고를 충실히 이행하는 이 제목은 소녀가 어떤 이야기를 겪게 될 것인지를 미리 말해주는 듯하다. 시간을 달리고 소녀도 달린다. 작품 내에서 소녀는 아주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끝내 변하지 않는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른바 시간이 변해도 사건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비가역성이라는 특징이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것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어느 한 지점에서 어느 한 지점으로 도약하는 소녀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기억의 편재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도약 간의 시간은 금세 잊혀지고, 우리는 그것을 ‘드문드문’이라는 말로 언급한다. 오랜 시간은 금세 드물어지고 가물어지고 메말라진다. 소녀는 갈림길에 서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선택지를 선택해보지만 끝내 결과는 변함없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말하는 논고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시간이 얼마나 편재적인 것인지 소녀의 뜀박질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소녀가 좋아하는 야구조차 던져질 때는 빠르지만 내려올 때는 멀게만 느껴진다. 따라서 그러한 시간의 상대성, 편재성을 박물관에 걸린 미술작품에 빗대어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총칭하는 소녀의 모습이 아주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오즈의 영화처럼 흩뿌려지는 것을 애써 붙잡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는 어느 정도 우위가 존재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했던 논고를 뒤집는 게 아니라, ‘공간’이 주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분명 시간이 주체적인 위치이기에 ‘시간에 우리를’ 몰입 시키는 것이라 말했었다. 하지만 반대로 공간이 주체가 될 경우, ‘우리가 시간을’ 몰입 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는 뜻일까? 당연하게도 그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맥락상 비슷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 무언가가 바로 시간의 가역성이다. 시간적 주체가 비가역성을 뜻한다면 공간적 주체란 가역성을 뜻한다.
공간의 현재성과 시간의 가역성
엄밀하게 말하자면 혼동의 여지가 있으므로 그 뜻을 정확하게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시간의 특정한 무엇을 느끼곤 한다. 이를테면 죽어버린 지인이 생활하던 공간, 방안에 남겨진 그 풍경에서 알 수 없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어쩌면 과학적이지 않은 표현으로 ‘혼’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고인이 이 방에 당장이라도 뛰어올 것만 같은 그 느낌, 마찬가지로 공간 위에 새겨진 시간이 우리의 기억을 붙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사진을 보며 느끼던 그리움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 속에 남겨진 시간은 그 시절에 해당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남겨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겨진 현재의 공간, 시간에서 과거의 시공간을 겹쳐 떠올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시공간에서 공간이 주체가 될 때는 시간이 가역적이므로 과거와 미래 중 어느 곳으로도 향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시간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시점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지아 장 커의 <스틸 라이프>에서는 댐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매몰된 지역에 특정 추억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 댐이 건립되기 이전에 남겨진 쪽지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은 이미 그 주소가 물속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상실에 빠진다. 그 영화에서 댐이라는 공간은 마치 시간을 아래에 묻어두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른바 시간은 물이며, 그들의 추억은 구체적인 주소를 지닌 채로 시간 어딘가에 잠겨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댐이란 시간을 막아두는 공간임이 틀림없고, 이것은 공간이 시간을 담아두는 것이라는 논의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공간이 시간을 막아둔다는 것, 보존한다는 것이다. 그 댐이라는 공간은 시간이 오가는 것을 정리하기도 하며, 반대로 그 아래로 사라진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공간이 주체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을 인물이 아니라 ‘댐’으로 보아야 한다.
댐으로 보아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묻힌 시간이 존재하는 주변 지역을 일컬어 모두 댐으로 지칭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영화 속의 댐이 시간이 파묻힌 공간이라면, 혹은 시간을 가두는 어떤 칸막이의 역할을 한다면 단지 시간에 국한 것만은 아닐 테다. 그 물속 아래에 파묻힌 공간은 단지 그곳으로만 한정되지 않고 그 주변의 공간, 삶 전반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 거대한 면적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과 상실감이 그 주변인의 삶에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보상금과 주거권에 관한 갈등으로, 떠나간 누군가와의 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단절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오래도록 살아온 공간에서 자리를 떠야 한다는 것, 떠나간 사람을 찾아 먼 거리를 달려올 정도로 크나큰 공간의 차이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것들, 자리를 뜨는 것과 차이에서 살아왔다는 의미는 그들의 시간도 그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 나오는 두 주인공을 보자. 그들은 십 년 하고도 육 년이 지난 상태에서도 그들이 살던 그대로 댐 아래가 존재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댐 아래에 묻힌 것은 그들의 시간이니 영원토록 시간을 되찾아올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그들이 함께했던 추억, 그들 주변인이 살던 추억은 매몰차게 매몰되고 만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 수몰된 시간과 동기화된 공간
그 영화에서 카메라는 어떤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애당초 이 영화의 주인공이 공간, 댐인 것처럼 오히려 인물이 풍경 속 피사체로 남겨진다. 우리가 줄곧 카메라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인물을 놓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포커싱이 사실은 인물 너머의 정경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체적인 장면을 롱 숏으로 촬영해 화면 속 모든 것이 작게 보이는 와중에도 전경에는 인물이, 중경에는 강이, 후경에는 산이 위치한다. 말하자면 인물의 시간은 과거이며 흐르는 강은 현재이고 변함없는 미래는 산인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속 시공간을 찾아 헤매는 인물은 바로 그대로 신기루에 사로잡힐 것이며 강은 서서히 지금 현재를 유지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여러 번에 걸쳐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사실, 이번에 3차로 댐의 수위를 156m까지 올릴 것이라는 새빨간 표식만이 그들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강처럼 보이는 댐의 수위는 점진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높아지지만 그 와중에도 산만큼은 그 높이 덕분에 우뚝 서 있을 수 있다. 반면 그들의 과거, 파묻힌 시간은 점점 더 수면 아래로 매몰될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숏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느낌으로 넓게 잡음으로써 결국엔 이 풍경 모두가 미래에 남겨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수몰된 과거이거나 새로 쓰인 풍경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자신이 어떤 방향성도 제시하고 있지 않음을 말하는 동시에 일종의 선택권을 주는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시공간은 단순히 영화 속 어딘가에서 재현되는 모사품이 아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 실제로 그곳은 댐 건설과 점진적인 수위 상승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영화 속 시공간과 현실의 시공간은 동기화되어 있으며 영화가 촬영된 지 십 년이 넘은 현재로선 오히려 영화 속 그곳이야말로 지나간 시간의 총아라고 볼 수 있다. <스틸 라이프>라는 작품의 영어 제목에서는 삶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단어를 의미상으로 짚으면 정물화라는 뜻이 된다. 우리가 보통 정물화에 대해 언급한다면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를 정교하게 묘사해내는 것이라 대답할 것일 텐데 정작 영화 속에서는 그러한 피사체가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는 이미 없고 영화 속에 남겨진 그 풍경,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이며 느릿하게 잡아내는 삶의 여유와도 같은 그것들이 물속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움직인다는 말은 그들 풍경에 적용하기에 앞서 시간에 적용하거나 적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시간과 공간의 관계, 시간이 움직인다. 그 시간은 미래로 뛰거나 과거로 걷는다. 미래로 뛰어야만 차오르는 물, 시간의 거센 흐름에서 도피할 수 있다. 이미 잠겨버린 과거에선 그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느긋하게 걸을 뿐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분위기를 깨는 사물이 등장하는 데 바로 비행접시다.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한 CG로 나타난 그 비행접시는 산 저편에서 나타나 산 너머로 사라진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두 주인공 중 남자는 접시를 보지 못하고 여자는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분명 말했듯 이 영화의 시공간은 현실과 동기화되어 있고 그러므로 이 비행접시의 존재는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른바 브레히트 효과, 이 방해는 어쩌면 그들이 정말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 마치 볼을 꼬집어 보는 것처럼, 이미 파묻혀 버려 모종의 신화적 공간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죽어버린 시간을 잡아채려는 그 얄팍함이 괘씸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자는 비행접시라는 비현실적 피사체를 외면했던가 혹은 정말로 보지 못했으니, 그러한 시간 속에 계속 파묻혀 살아갈 것이다. 반대로 여자는 그곳에서 유통기한이 남은 차 한 봉지를 찾아 물 위에 둥둥 떠나 보낼 것이다.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시간 속에 많은 삶을 할애하고 이제 떠나 보낼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영화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풍경, 대화를 나누는 사람, 그들이 찾아 헤매는 인연, 그리고 두 명의 주인공조차 그 댐을 따라 둥둥 떠가며 점차 잊힐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공간을 사는 것일까.
혹은 곤 사토시 감독의 <천년 여우>를 보자. 엄밀하게 말해 작품 속에 묘사되는 그것이 공간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영화 속에서 영화가 일종의 시공간으로 기능하는 ‘메타 영화’적 특성을 보아 할 때 그것이 맞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영화배우로 살아온 주인공이 여태껏 자신이 찍었던 영화 속을 달려가는 그 장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그녀가 현재에서 떠올리는 과거인 동시에 현재의 시공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천년 여우>의 시공간은 현재에서 불러오는 과거인 동시에 과거에서 불러오는 미래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의 공간은 어느 한 시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녀의 시간을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면 그녀의 공간이 시간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품의 서사는 어느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이 영화배우가 되고, 평생에 걸쳐 그 남자를 사모하는 주인공이 찍은 영화들을 시간의 흐름에 걸쳐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러니 그녀가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선 그녀가 찍었던 영화, 말하자면 기억 속 어느 ‘세트장’이라는 공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영화란 공간이 시간을 끌어안은 채로 진행되나, 그 우위에 있어 영화마다 다른 특성을 보인다. 공간이 시간을 유도할 수도 있고 시간이 공간을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가 우리 현실의 기록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보면 단순히 영화에만 한정되는 논의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물론 영화는 그 재현에 있어 완벽한 현실의 공간이 아니나 그 의의만큼은 어느 정도 맥락상 부합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시간으로부터인가 혹은 공간으로부터인가? 단순히 시간에 맞추어 일하고 기억하는 것인가 아니면 공간에 맞추어 그 성격이 변화하는 것인가? 시간에 맞추어 일한다면 열심히 일한 만큼 계급이 오른다는 가정하에 있을 것이고, 공간에 맞추어 일을 한다면 어느 팀에 속하는지에 따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이끄는 것이 우리의 의지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러한 시공간에 우위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영화를 처음 좋아하게 된 그 순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살면서 바빠 영화를 외면하게 되더라도, 줄곧 마음속 한쪽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면 영화는 언제나 당신의 품으로 달려갈 것이다. 영화의 시간은 당신의 슬픈 과거를 비가역적으로 흘려보낼 것이며, 영화의 공간은 당신의 추억을 가역적으로 돌려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의 시공간을 음미하고 탐미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당신의 삶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마치 <천년 여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