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유독 베토벤 음악이 많이 나오는 이유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이 그린 이해와 보듬기

by 수차미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눈앞에 맞닥뜨린 재앙, 자신을 넘어뜨리는 시련 등.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어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다리를 다친 건지, 겁이 나서인지 알 수 없다. 왜?라고 물어도 돌아오는 건 "그냥"혹은 "그저"이다. 그때마다 근본 없는 물음은 향할 곳 없이 방황한다. 우리는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고민하고, 그런 것들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여태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죽음과 다를 바 없는 현실을 보여줬다. 카메라는 돌봐주는 사람 없이 방치된 이들의 뒷모습을 비춘다. <로제타>(1999)에서 와플을 팔던 소녀, <더 차일드> (2005)에서 자식을 팔아버린 부모, <로나의 침묵> (2008)에서 사랑과 생존을 고민하는 커플. 크게 보면 사회, 작게 보면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이들의 모습은 그저 슬프기만 하다. 그들을 누구도 감싸지 않는다.

이해와 무지

다르덴 형제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되는 것들 천지다. 개인이 고통받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회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냉소적인 카메라의 시선으로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는 카메라가 반대의 역할을 맡는다. 자신과는 일절 관계도 없는 소년을 입양한 사만다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헌신적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투명한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현실 세계를 스크린에 동화하게 된다.

다르덴 형제가 펼친 투명한 스크린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형식적인 화해로 상처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다면 당당히 드러내고 이해받는다. 그러나 이해를 할 수는 있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해한다고 해서 행동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관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르덴 형제는 관객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지옥도를 살아가는 인물을 보여준 뒤,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전후의 상황도 상세히 묘사하지 않으며, 사건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내 주변 사람의 이야기처럼 묘사할 뿐이다. 관객은 철저하게 관찰자, 동시에 방관자의 입장에 있다. 어떠한 감정을 느끼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르덴 형제의 사실주의다.

어쩌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기에 더욱 이해가 잘 될지도 모른다. 한 두 번의 구멍이라면 개연성이 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사는 현실이란 건 영화보다 더욱 비현실적이다. 현실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천지고, 다르덴 형제의 영화도 그렇다. 그래서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현실과 맞닿아 있다.

죽음이 멀어진 이승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마치 저승사자 같다. 핸드헬드로 촬영해 흔들리는 화면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인물에 따라 보낸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벌거벗겨져 지옥에 내동댕이쳐진 이들을 묵묵하게 지켜본다. 앞에서 얼굴을 보기보단, 뒤에서 조심스럽게 관찰한다. 영화는 인물의 삶 자체만을 보여줄 뿐, 그 어떤 외부적 간섭도 허용치 않는다. 설사, 그게 영화에 흐르는 음악일지라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자전거 탄 소년> (2011)은 특이하다. 음악을 사용하지 않던 다르덴 형제에게 또 다른 삶이 찾아왔다.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2악장이다. 베토벤은 전쟁의 광기 한복판에 있었지만 아름답고 희망찬 곡을 작곡했다. 곡이 <자전거 탄소년>에 삽입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는 <황제>를 통해 여태까지 보여준 삶들과는 다른 것,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하지만 그게 삶이라며 말하는 듯하다.

<자전거 탄 소년>을 기점으로 다르덴 형제의 이해는 상처 입는 것에서 치유 받는 것으로 나아간다. 여태까지 다르덴 형제가 상처를 이해하는 법을 보여줬다면, <자전거 탄 소년>에서의 소년 '시릴'은 치유를 이해하게 된다. 일상 그대로를 비추는 다르덴 형제의 사실주의 카메라는 이전처럼 묵묵히 인물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렌즈에는 감정이 실려있다. 지금껏 인물을 따라다니던 저승사자에게서 저승을 떼놓은 것 같다. 카메라는 죽음이 아닌 신의 사자로서 다시 태어나 인물을 구원한다.

평소의 영화처럼 <자전거 탄 소년>은 불친절하게 시작한다. 스크린이 올라가면 한 소년이 전화를 받고 있는데, 앞뒤 맥락을 알 수 없다. 관객은 인물의 대화를 통해 소년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정도만 알게 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얼마 가지 않아 놀라게 된다. 대답 없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소년이 보육원을 탈출해 달려나갈 때, 조용하던 다르덴 형제의 세계에 음악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많은 베토벤의 곡 중에서 <황제>가 들려오고, 웅장하지는 않아도 숭고한 <황제>의 선율에서 관객들은 소년을 이해하게 된다. 여태껏 인물의 삶을 방관하듯 이해를 구하지 않았던 다르덴 형제가 관객에게 이해를 구한 것이다. 소년의 마음은 이렇다고 말이다.

신기한 것은, <황제>가 여러 번 나온다는 점이다. <황제>는 영화에서 총 4번 나온다. 초반, 중반, 후반, 그리고 결말에서 나온다. 그때마다 소년은 감정적인 변곡점을 맞이한다. 동시에, 관객에게도 곡의 느낌이 4번에 걸쳐 변화한다. <황제>는 여전히 숭고하면서도, 뒤로 갈수록 느낌은 계속해서 변한다. 마치, 다르덴 형제는 <황제>를 통해 관객에게 소년을 이해하게 하려는 것 같다. 하나의 곡에서 소년의 변화와 성장을 보듯이, 인생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여러 관점으로 보인다고 말하는 듯하다. 변하지 않았지만, 변해버린 것에 대한 이해를 말이다.

<황제>가 흘러나올 때마다 깨달음을 얻는 소년은 오르페우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음악으로 구원받는 모습이 그렇게 느껴진다. 좌절이 의지로 바뀌는 건 오르페우스가 음악으로 행하던 기적과도 같다. <황제>의 숭고함이 소년에게 삶을 되찾아 준다. 물론 음악은 영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려오니 실제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이 구원하는 건 소년이 아니라 관객이다. 소년은 지옥 같은 현실을 그대로 살고 있을 뿐이고, 영화 외부에서 유입된 음악은 관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관객에게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상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이 어떻게 치유 받았는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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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버지에게 버림당한 소년의 상처를 보듬는다. 상처를 보듬고, 이유 없는 호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를 찾아간 병원에 아버지는 없고, 보육원 관계자들에게 붙잡힌 소년은 병원에 있던 한 여성에게 도움을 청한다. 얼마 뒤, 그 여성은 아무런 조건 없이 소년을 입양한다. 사만다는 계속해서 소년과 친해지려 노력하지만, 소년은 버림받은 자신에게 이상하리만치 호의적인 사만다를 적대한다. 동시에 자신이 버림받았음을 부정하며,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줄지 고민한다. 사만다는 그런 엇나감조차 따스하게 품는다.

사만다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간 소년은 아버지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집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소년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울부짖는다. 자해하며 조용히 울먹이고, 사만다는 그런 소년을 품고 위로한다. 중반부의 <황제>는 그렇게 시작된다.

초반부의 <황제>가 상처를 받아들인다면, 중반부의 <황제>는 상처를 이해한다. 찾아갈 때도, 돌아갈 때도 소년은 조수석에 앉아 있다. 사만다에게 소년은 뒷좌석에 앉아야 할 손님이 아니라 조수석에 앉아 함께 살아갈 동반자다. 운전자인 동시에 조수석을 바라보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막연하게 소년을 받아들였던 사만다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어 한다. 사만다는 관찰자로서 소년이 맞닥뜨린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하고, 동반자로서 소년이 느끼는 상처에 공감하게 된다.

초반에, 사만다는 소년을 입양하며 도난당했던 자전거를 되찾아준다. 이 자전거를 통해 소년은 나쁜 친구와 어울려 돈을 훔친다. 전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 스쳐 지나갔던 말을 기억하곤, 돈이 있으면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훔친 돈은 필요 없다며 자신을 내쫓는다. 아버지에게 떠밀려 되돌아가는 골목길에서, 결말부의 웅장한 <황제>의 연주는 시작된다.

작중에서 소년이 내내 타고 다니는 자전거는 아버지를 대체할 무언가다. 아버지가 전부였던 소년은 아버지를 잃고 그리워한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긴 건 낡은 자전거뿐이다. 소년은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달린다. 그 과정에서 행인을 때려 돈을 훔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아버지를 대체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서니 가짜로 진짜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대신, 사만다는 소년에게 잃어버렸던 가짜라도 되찾아준다. 그리고 진짜를 대신해 진짜가 된다.

소년에게 사만다가 진짜가 되는 순간은 골목길에서 <황제>가 울려 퍼질 때다. 슬피 울며 현실을 부정하던 소년도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음을 반쯤은 받아들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하고, 그래서 물질적인 것으로 교섭을 시도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소년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아버지에게 내쳐진 소년은 이제 마음속의 반쪽도 내려놓게 된다. 그때 <황제>는 흐른다. 여태껏 자신을 치유했던 사만다를 이해하게 된다.

자전거는 사만다와 소년을 이어주는 끈끈한 가족애이기도 하며, 마음속의 공허를 채우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게 하나쯤은 있지만 얻을 수는 없다. 내가 바라던 때의 그것은, 얻고 나면 느낌이 달라져 그때의 느낌을 얻을 수가 없다. 정말로 원하던 것과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어도 본질은 이미 달라져 있다. 우리는 대체되지 않는 목표를 정하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에 대체품을 찾는다.

사만다와 소년은 서로를 대체한다. 소년에게 사만다는 잃어버린 가족의 품이며, 사만다에게도 그렇다. 우리네 이웃들의 이야기처럼 영화는 인물의 전후상황 같은 건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만다가 무슨 생각으로 소년을 입양했는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만다와 소년이 서로의 품에 안겨 가족이라는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말부를 지나 서로의 품에 안긴 가족이 함께 자전거를 탄 모습이 감동적이다. 인위적으로 설정된 작품의 장치가 아니라, 우리네 삶이 실제로 그렇기에 감동하게 된다. 다른 가족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는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해할 수 없는 치유력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소년의 마지막 <황제>는 엔딩 크레딧과 함께 한다. 돈을 훔치며 폭력을 가했던 남성에게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했음에도, 남성의 아들은 소년을 용서하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소년이 왜 자신의 부모님을 폭행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소년 또한 사죄했음에도 분노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아들에게 쫓기다 나무에서 떨어진 소년을 보고 그는 겁에 질리고, 남성을 불러 병원에 데려가려 한다. 하지만 소년은 묵묵히 일어나 자전거로 향한다.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남성의 아들에게서 보고, 부끄럽다는 듯 맨손으로 얼굴을 씻는다. 그렇게 <자전거 탄 소년>이 화면 밖으로 사라질 때 마지막 <황제>가 흘러나온다.

소년은 사만다의 치유를 이해하게 되고, 사만다는 소년의 상처를 이해하게 된다. 작중에서 소년이 사만다에게 묻는다. 왜 자신을 입양했느냐는 질문에 사만다는 이렇게 답한다. "네가 원했잖아." 처음에 소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가서야 뜻을 이해하게 된다. 아마 우리가 가진 고민의 답도 그럴 것이다. 왜 상처받아야만 했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음에도 대체되는 건 확실하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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