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듣다 그리고 소통하다... <목소리의 형태>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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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작품을 만들 때 그 작품의 원형이 되는 원천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온다. 작품은 그 세계 위에 우리의 상상력과 철학을 덧붙여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각이 넓다면, 넓은 만큼 넓은 작품 세계가 완성되기 마련이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스크린 위로 옮기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작품은 세계 속에 있는 세계이기에 우리의 생각을 작은 것에 한정한다. 따라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영화화의 목표다.
<목소리의 형태>(2017)는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만화의 분량이 많지도, 적지도 않기에 내용을 스크린 위로 옮기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내용이 과하거나 덜할 수도 있기에 말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그 과정에서 선방한 편이다. 많은 분량을 스크린에 알맞게 눌러 담으면서도 내용의 득은 놓치지 않고 실은 과감히 버렸다.
물론 시야를 넓히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빨라진 감이 있다. 이야기의 전개가 빨라져 이야기를 따라가는 관객들에게 빈틈을 주지 않는 것은 장점이요, 원작의 디테일을 놓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디테일이 약간 사라졌다고 해서 작품성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딱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큰 주제에서 사족을 잘라낸 정도다. 원작의 팬들이 조금 아쉬워할 정도다.
학교폭력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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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이 작품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를 미화한다고 비판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개연성이 없는 설정이다. 그러나 작품은 완결까지 계속해서 학교폭력의 가해로 인한 인과의 업을 가해자에게 부여한다. 그 인과의 업을 짊어지고 피해자와의 소통에 나서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일차적으로는 학교폭력에 대한 비판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나누어진 두 인물(집단) 간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만약 목소리에 형태가 있다면 선한 말이든 악한 말이든 간에 보는 사람이 말이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목소리는 허공에 울려 퍼져 금세 사라지고 만다. 설령 그것이 듣는이에게 상처를 준다 하더라도, 타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허공에 손을 휘휘 저을 뿐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후자에 관한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을 부여잡아 삶을 구원하는 소년의 몸부림이다.
작품에 나오는 두 주인공, 쇼야와 쇼코는 서로를 붙잡아 삶을 구원한다. 과거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쇼야는 피해자로 몰락하고, 사춘기가 지나고 철이 들고 나서야 그 죄에 대해 속죄하고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반대로 쇼야가 자살을 하기 전에 마지막 속죄를 위해 찾아간 쇼코는, 쇼야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자살을 마음먹는다. 그리고 자살은 쇼야에 의해 저지된다. 주목할 점은 그 구원의 진행 방향이다.
형국은 원형으로 그려져 있지만, 톱니바퀴처럼 진행 방향이 다르다. 쇼야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상적인 삶에서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전락한 인간적 죽음을 맞이하고, 인간적 죽음은 쇼코를 만나 내면을 구원받은 삶으로 이어진다. 쇼코는 자기 자신을 걸림돌로 규정하는 안과 밖의 죽음에서 쇼야와의 만남을 통한 인간적 삶을 느끼지만, 인간적 삶은 자기파괴의 염세적 시선을 받아 내면의 죽음으로 향한다. 결국, 쇼야와 쇼코가 온전히 합쳐짐으로써 삶과 죽음이 동시에 공존하게 된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던 순환은 마침내 하나의 원이 된다. 즉, 어느 한쪽의 의지만으로는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그 소통의 부재로 인한 문제(그 끝은 자살이다) 또한 해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작가가 학교폭력을 포함한 모든 소통에 대해 보내는 메시지이다.
어렸을 때의 쇼야가 아무 이유 없이 다리 위에서 아래의 하천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즐겼다면, 절정 부분에서 쇼야는 쇼코를 구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하천으로 떨어지게 된다. 어렸을 때 쇼야의 삶은 따분하고 지루했기 때문에 무언가 변화하고 싶어서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쇼야는 그 따분함을 다른 것으로 푼다. 물에 뛰어내리는 행위가 그것이다. 얼핏 보면 자살처럼 보이는 행위는 자살의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현재의 삶, 그것이 따분하든 괴롭든 간에 현재를 지속할 명분과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쇼야 또한 그러했다. 쇼야는 하천으로의 낙하를 통해 자살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따분한 일상이 변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쇼코가 전학을 오자 소리를 듣지 못하는 쇼코에게 관심을 가지고 괴롭힘으로써 따분함을 풀게 된다.
어릴 적 쇼야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쇼코의 손을, 시간이 흘러 쇼야가 붙잡는다. 떨어지는 과거를, 현재가 붙잡는다. 절정부에서 쇼코를 구하고 대신 하천으로 떨어지는 쇼야의 모습은 쇼코의 자살이 쇼야의 자살로 치환되는 장면이다. 쇼야의 과거와 현재 삶의 일대일 대응이 일어나고, 단순히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자신으로 인해 망쳐진 쇼코의 삶을 바꾸어 놓고 싶어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하천으로의 낙하가 무료한 현재를 일탈하고 싶어 했던 행위였던 것에 반해, 쇼코를 구하는 현재의 낙하는 어긋나버린 자신의 과거를 바꾸어 놓고 싶어서 하는 목적성이 있다. 목적 없이 살던 삶은 이제야 그 목적지를 찾은 것이다. 이러한 목적성을 통해 물의 이미지는 변화에서 환생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쇼야는 다리의 은유를 통해 죽음으로서 다시 태어나고자 했고, 쇼코는 자신이 타인에게 폐가 된다는 자기 혐오에 빠져 영원한 죽음을 원한다. 쇼야는 과거(쇼코에게의 사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올라선 다리에서도 떨어지지 않았고, 쇼코는 자신이 사라짐으로써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쇼야의 미래가 바뀌는 것을 고대하며 난간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두 인물의 죽음은 수동과 능동으로 갈린다. 과거를 바꾸기 위해 미래로 향하는 것과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향하는 것의 차이다.
작품이 진행되며 서로서로 치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에게 벌어진 특정한 사건을 통해 죽음의 이미지가 재발한다. 쇼코와 여동생 유즈루에게는 할머니의 죽음이 그것이고, 쇼야에게는 과거의 직시가 그것이다. 쇼야는 여태까지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자신의 폭력"을 사죄하고 반성했지만, 어린 시절 폭력에 함께 가담했던 친구에게서 "타인의 시점에서 바라본 자신의 폭력"을 듣게 되자, 홀로 속죄해도 이미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을 폭력의 가담한 유일한 악인으로 몰아세우는 모습에 염세를 느낀다. 아마 장소가 다리 위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쇼코와 유즈루의 상처받은 정서는 기본적으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던 쇼코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심했고, 그 결과로 쇼코와 유즈루는 감정적인 결핍을 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런 쇼코와 유즈루에게 정서적으로 어머니 역할을 하던 것이 할머니였는데, 할머니의 죽음으로 자매는 큰 상심에 빠진다.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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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두 이미지는 다리 위에서 교차한다. 상처받은 두 사람(쇼야와 유즈루)은 다리 위에서 만나 상처를 공유하고 어루만진다. 그러나 유즈루가 할머니의 죽음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새 출발(나가지 않던 학교에 가게 된다)을 하는 반면, 쇼코는 다시 한 번 자살을 택하게 된다. 자살을 택하기 전에 셋이서 함께 떠난 여행은, 쇼야와 유즈루에게는 죽음에서 치유된 후로의 새 출발이고, 쇼코에게는 죽음 이전의 마지막 여흥이었을 것이다. 여행은 마침내 과거의 사건을 포용하게 된 쇼코 어머니(전에 가출한 유즈루를 데리러 오면서 쇼야를 보았을 때 뺨을 때렸다)의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집 안으로 이동하고, 이어서 화려하게 폭발하지만 금세 사라지는 불꽃을 바라보는 축제로 이동하고, 다시 자살로 이어진다. 이미지는 죽음(할머니)–삶(어머니의 생일)–죽음과 삶(폭죽)으로 전환되며 절정부의 비극성을 부각한다.
그럼에도 목소리의 형태가 누구의 이야기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쇼야와 쇼코의 이야기이다. 작품에서 사건을 주도하는 것은 쇼야고, 쇼코의 모습은 쇼야의 시점에서 그려진다. 그래서 "쇼야의 다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유독 중요하게 느껴진다. 쇼야의 변화 의지는 다리 위에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으로 나뉜 양쪽 길을 다리가 잇는 것처럼, 쇼야와 쇼코가 주로 만나는 다리는 서로를 잇는다. 두 사람이 재회를 한 후로, 약속을 잡고 만나거나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곳은 대부분 다리 위다. 그리고 매번 둘은 정확하게 다리의 중간에서 만난다. 정중앙이라는 위치는 서로가 양쪽에서 동일한 거리를 걸어와야 하기에 그 자체로 서로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그것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일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 평등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더 나아가서는 과거를 마주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쇼야와 쇼코 두 인물만이 다리 위에 서 있다가, 이어서 쇼야의 친구인 나가츠카와 쇼코의 여동생인 (친구에 해당하는) 유즈루 또한 함께한다. 최종적으로는 왕따와 연관된 과거의 친구들을 대면하게 된다.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은 주로 잉어에게 밥을 준다. 그리고 영화의 곳곳에 물결과 잉어의 모습이 담긴 쇼트가 삽입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죽음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두 인물 사이의 감정선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물 위에서 원형을 그리며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물결은 감정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물 속에 들어가면 귀가 먹먹한 것처럼,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소리가 없는 세계"에 사는 쇼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덤으로, 물속에 던져지는 바게트는 쇼야의 마음이다. 어릴 적에 쇼야가 알던 쇼코는 비둘기에게 빵조각을 던져주는 것이었고, 후에 이것을 떠올리며 바게트를 구매해 쇼코에게 물고기 먹이로 쓰라며 건네주기 때문이다. 쇼야가 쇼코를 대면하기 위한 최초의 도구였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바게트 조각(마음)을 먹는 물고기의 모습은 쇼야의 마음을 가지고 싶어 하는(사랑하는) 쇼코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수면 위로 잔잔하게 퍼져 나가는 물결처럼, 목소리 또한 파동이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그 외침을 붙잡기 위해 우리는 소리를 기록한다. 작품의 제목에서 목소리라는 청각적 요소는 형태라는 단어를 통해 시각화된다. 청각과 시각의 두 감각은 서로 만나 하나의 새로운 감각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이 감각은 새로운 소통의 면모를 부각한다.
소통
쇼야는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 이후 자기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에 X 표시가 처져 있게 되고, 그 표시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X 표시는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워 더는 타인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쇼야는 사실상 눈이 먼 상태가 된다. 그래서 쇼야는 청각만이 남았고 옛날에 자신이 괴롭혔던 쇼코를 떠올리며 속죄를 하게 된다. 쇼코의 귀가 들리지 않기에 쇼코와 감정적으로 동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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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청각적인 소통이 불가능했고, 그 청각적인 소통을 대신하던 것이 "목소리의 형태(글)"가 그려져 있는 필담 노트이다. 그래서 쇼야는 자신의 말(진심)을 전하기 위해 필담 노트를 쇼코에게 돌려주려 한다. 이것은 말을 전하고자 하는 동시에 "네 이야기를 듣겠다"라는 뜻으로도 보이고, 네 이야기와 동시에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거의 가해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속죄의 증거로서 가져온 쇼야와, 피해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미소로 맞이하는 쇼코는 분명 과거보다 성장했음이 틀림없다. 과거의 필담 노트가 두 인물 간의 불가침 영역이었다면, 이젠 두 사람을 잇는 성장의 증표로 작용한다.
쇼야는 어린 시절 물에 젖어 쭈글쭈글한 필담 노트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고, 쇼코는 그것을 손에 받아 든다. 쭈글쭈글한 노트에는 어린 시절 받았던 혐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고, 일방적인 혐오를 포함한 양방향의 어긋난 소통은 물속에서 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피해자의 상처받은 마음이라는 게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쇼코는 실수로 물에 떨어뜨린 노트를 직접 뛰어들어 건져낼 정도로 소통에 대한 의지가 간절했다. 과거와 변함없이 말이다.
쇼코는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필담 노트를 사용하지만, 현재의 필담 노트와 쭈글쭈글한 과거의 필담 노트는 성격이 다르다. 현재의 (새것) 필담 노트는 사건 이후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상처를 주지 않은)과의 소통에 사용하지만, 쭈글쭈글한 과거의 필담 노트는 상처받은 과거가 적힌 물건이다. 그런 쭈글쭈글한 필담 노트를 집어 드는 것은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 노트가 전해짐으로써 쇼야와 쇼코의 성장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쇼코 쪽이 훨씬 성장했으리라 생각한다. 과거의 노트는 가해자가 가해한 후 내버려 둔 상흔을 주워든 것이지만, 현재 쇼야에게서 돌려받은 노트는 과거의 상처를 가해자로부터 돌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처가 주어지느냐 주어진 것이냐의 차이이다. 같은 노트가 수동에서 능동이 되고, 쇼코는 받아들지 말지 선택을 하게 된다. 과거를 현재에 주워든 것이 쇼코의 추가적인 성장이다.
쇼야는 시각을 잃고(X 표시가 쳐진 상태) 오로지 청각만이 남았고, 쇼코는 청각이 없고 시각만이 있다. 쇼야는 자신의 감정을 수화라는 시각적 언어로 전달하고, 쇼코는 자신의 마음을 발화라는 청각적 언어로 전달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세계의 언어를 배운다. 위에서 삶과 죽음이 원형으로 결합한 것처럼, 두 인물의 두 감각을 통한 소통 의지는 그것이 서로의 모습 위에 겹쳐질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 서로의 언어를 받아들인 두 인물은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보게 된다. 위에서 쇼야가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던 것처럼, 쇼코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며 (추상화된 시각의 이미지) 깊은 자기파괴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그렇게 두 인물의 내면은 세계로 확장된다.
세계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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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된 세계에서 두 인물의 인간관계는 넓어진다. 쇼야의 자기반성이 쇼코와 그녀의 가족들과 연결되고, 쇼야는 수년 만에 친구를 사귄다. 쇼코 또한 초등학교 시절 자신과 친했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나고, 다시 만난 쇼야와 친해진다. 쇼야는 자신에게 까칠했던 쇼코의 여동생과 친구가 된다. 쇼야의 우연한 호의로 사귀게 된 친구가 쇼야와 쇼코의 옛 친구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서로를 잇는다. 두 사람은 함께 옛 친구들과 재회한다. 이 과정에서 쇼야는 적극적으로 보이고 쇼코는 소극적으로 보인다. (마음은 둘 다 적극적일 것이다)
작품에서 만남과 이별은 반복된다. 쇼야가 쇼코를 처음 찾아갔을 때, 쇼야를 알아본 쇼코의 여동생 유즈루는 쇼야를 적극적으로 제지한다. 자신의 언니를 괴롭힌 당사자가 곱게 보일 리가 없으니 대하는 태도도 좋지 않다. 유즈루는 그 과정에서 쇼야 에게 "친구가 무엇인지"에 관해 묻는다. 거절당한 이후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쇼야에게 나가츠카가 다가와 같이 놀자고 제안하고, 쇼야는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사귀는 친구인 나가츠카에게 "친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이에 나가츠카는 쇼야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우정이란 것은 말이나 논리를 초월한 것"에 있다고.
이것이 곧 작품의 주제가 된다. 만남과 이별의 합, 소통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밂으로써 완성된다. 그것은 이성(논리)과 감성(말)을 초월한 "목소리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을 깨달은 쇼야는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인물이 된다. (나가츠카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자전거를 빌려주어서이지만, 지나가다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자신 말고는 도와줄 사람이 없기에 약간의 강압적인 마음으로 도와준 것이다.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손을 내밀어 달라는 요구가 있었고, 또 망설였다)
쇼야가 쇼코를 만나 필담 노트를 전해준 후에도 유즈루는 쇼야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둘의 관계는 쇼야가 유즈루 에게 먼저 손을 내밂으로써 결합한다. 쇼야는 놀이터의 미끄럼틀 안에서 지저분한 상태로 웅크리고 있는 유즈루(언니와 싸우고 가출했다)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간다. (피해자의 가족인 유즈루를 집에 들일만큼 쇼야의 가족들은 과거의 사건을 포용했다) 쇼야의 가족과 저녁을 먹고 방에서 잠자리에 든 유즈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맨발로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그것을 알아챈 쇼야는 쫓아와서 우산을 씌워준다. 자신이 사용하던 신발을 주기도 한다. 유즈루는 쇼야의 자기 반성하는 태도와 먼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유즈루는 쇼코와 쇼야 두 인물을 잇는 징검다리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피해 사실은 명확하지만, 입장은 상반된다. 양쪽 모두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모두 들어보아야만 제대로 된 판단이 이루어진다. 작품은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내용을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로만 국한하지 않는다. 작품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의 처지를 대변하는 주변 인물들이 나오고, 이들의 사연은 관객이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쉽사리 판단하지 않도록 한다.
그중에서 유즈루는 피해자인 쇼코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가해자인 쇼야에게 언니가 화를 내지 않자 대신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라도 언니를 삶으로 이끌고자 한다. 자기 혐오에 빠진 쇼코는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유즈루는 학교를 결석해가며 그런 언니의 곁을 지킨다. 작중에서 유즈루가 카메라로 포착하는 죽은 생물들의 주검은 언니의 죽음 충동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자신 또한 항상 죽음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현실을 포착하고 현실은 사진으로 재현되니 카메라를 분신처럼 여기는 유즈루에게 현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반대로, 어린 시절부터 쇼야를 좋아해 왔던 우에노는 가해자의 처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물론 가해자에게 입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데도 개개인의 사정이란 것이 있기에 간과할 수는 없다. 어쨌든 작품에서 쇼야가 했었던 폭력은 합당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쇼야를 대변하는 우에노의 말 또한 뒤틀리고 이상한 것이 된다. 우에노의 "너 때문에 쇼야가 왕따를 당하게 됐고, 이렇게 삶이 망가졌다."는 논리는 정신병과 같은 논리다.
희한하게도, 피해자를 대변하는 유즈루는 쇼야를 쉽게 용서하지만, 가해자를 대변하는 우에노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품는 증오가 컸으면 컸지 가해자가 피해자를 증오하는 이 상황은 이상하다. 작품은 이것을 소통으로 잇는다. 초반에 쇼야가 유즈루에게 우산을 씌워주던 작은 호의는, 후반부에 쇼코가 우에노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것으로 되풀이된다. (구도 또한 똑같다) 유즈루가 쇼코의 마음을 대변하고, 우에노는 쇼야의 마음을 대변하기에 우산의 의미는 대칭된다. 비 오는 날의 유즈루가 우산 아래에서 쇼야를 용서한 것처럼, 우에노 또한 쇼코를 살짝이나마 용서하게 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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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에 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대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쇼야와 쇼코의 마음은 변한다. 쇼야와 쇼코의 가족의 마음 또한 변한다. 두 가족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서로 이해하고 보듬게 된다. 이해와 용서는 일방적인 피해를 봤던 쇼코의 가족이 더욱 어렵고 힘들다. 그래서 쇼코의 가족은 쇼야가 쇼코의 죽음을 대체했을 때야 진정으로 쇼야를 용서하게 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인물도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인물 중에서, 변하는 인물들 외에 다른 인물들의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고, 이들은 마치 두 인물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에노는 쇼코처럼 쇼야를 좋아하는 인물이며, 그 방식에서 쇼코 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다. 쇼코가 소극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면, 우에노는 적극적이면서도 소극적으로 행동하며 앞에 나서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인 감정을 지녔기에 자기 혐오와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쇼코의 안티테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쇼코가 우에노에게 우산을 건넨 것을 생각해보면 무엇이 정말로 현실적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우에노는 쇼야와 죄의식을 공유한다. 우에노 또한 쇼코에게 폭력을 가한 가해자였고 과거에 있던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쇼야와 같다. 그러나 쇼야와는 반대로 쇼코의 현재 처지가 자업자득이라고 비난하며, 쇼코를 위선자로 생각한다. 우에노는 폭력이 있던 과거를 되돌려 모두가 함께하는 현재를 상상한다. 그리고 쇼야의 마음 또한 그렇다. 다만 우에노는 이상적이지 못한 현실을 부정할 뿐이고, 쇼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은 미래로 변화하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우에노의 왜곡된 합리화는 쇼코가 건넨 우산으로 붕괴한다.
카와이는 자신의 잘못을 최소화하고 타인의 잘못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우에노가 그나마 폭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반해, 카와이는 있던 사실마저 부정하는 건지 피해자인 쇼코 앞에서도 위선적인 말을 쏟아낸다. 자신보다는 타인이 더 많이 괴롭혔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는 회피의 목소리다. 자기애가 결핍된 쇼코와는 달리, 넘치는 자기애가 자기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사실을 왜곡한다.
카와이는 자기 자신이 짝사랑하는 마시바(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를 현재의 사건에 끌어들인다. 카와이는 마시바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시바가 한때 왕따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쇼야가 과거에 왕따 가해자였다고 몰아세우지만, 오히려 마시바는 왕따 피해자였음에도 가해자인 쇼야를 지지한다. 마시바는 쇼야가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대한다.
과거를 아예 없던 일로 하고자 하는 카와이와는 달리, 마시바는 과거를 수용하고 미래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쇼야처럼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피해자였음에도 가해자인 쇼야를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쇼코가 피해 사실을 가슴에 묻어두고 죄책감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과는 다르게, 마시바의 분노는 외부의 가해자를 향한다. 그러나 속죄하는 자에게는 관대하다. 가해자도 속죄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답은 이 인물이 될 것이다.
쇼야의 현재 친구인 나가츠카와 쇼코의 과거이자 현재의 친구인 사하라는 두 인물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나가츠카는 쇼야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을 알려주고, 사하라는 쇼코에게 "미움받지 않을 용기"를 부여한다. 두 인물의 의지가 결합해 작품의 결말로 이끌지만, 두 인물은 각자가 그 의지의 결합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시마다, 그리고 히로세는 쇼야의 어릴 적 친구다. 쇼야가 왕따의 주요 가해자로 지목된 후에는 쇼야를 따돌리며 어울리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도 쇼야를 계속해서 따돌리고 그 후로 쇼야와는 일절 관련이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로 "쇼코를 구하고 떨어진 쇼야"를 하천에서 건져낸다. 두 인물은 과거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행동이 합당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두 인물은 모두에게 있어 과거 그 자체를 상징한다. 작품에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에 쇼야를 구하는 두 인물의 모습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아픈 기억과도 같다. 과거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사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투사력이다.
작품은 쇼야가 내내 견지하던 "과거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쇼코에게 전이되며 끝난다. 삶의 의지를 찾은 쇼코는 더 이상 자살충동을 느끼지 않고, 유즈루는 그동안 모았던 생물의 주검사진을 내다 버린다. 쇼코는 쇼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과거 사건의 인물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소통하게 된다. 그 인물 중에는 과거를 회피한 채 위선을 떠는 위선자도, 사건과는 관련 없는 제3의 인물도, 모든 것을 방관하던 방관자도, 여전히 자신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해자도 있다. 모두가 과거에서 변하지 않았고, 과거의 사건 또한 변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쇼코의 의지다. 작품은 그 의지가 쇼야의 눈에 가려진 X 표시를 때어내며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