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움 속의 차가움

by 수차미


1.jpg?type=w966 영화 <킬링 디어>의 작품 포스터 © 오드



뜨거움 속의 차가움, <킬링 디어>

우리가 잘 아는 로봇영화 <트랜스 포머> 2편의 제목은 패자의 역습이다. 이 영화에서는 오토봇과의 전투에서 패한 디셉티콘 군단이 재기를 꿈꾼다. 로봇들의 치고받는 거대한 전투는 마치 스크린 밖을 뛰쳐나올 듯하다. 그리고 거대한 쇳덩이들이 두 집단으로 나뉘어 싸운다는 점은 흡사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모습이다. 무조건 적보다 더 많이, 더 강한 병기를 생산해야만 하다는 점에서다. 더 나아가, 미국 본토에서 미군과 결합한 오토봇과 그에 대항하는 디셉티콘의 모습은 빼도 박도 못하게 미국이라는 국가의 자구책을 상징한다. 알래스카 아래에 자원이 묻혀있듯, 미국의 어딘가에 숨은 ‘큐브’를 찾아온 그들의 모습은 미국의 시각에서는 명백하게 침략자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저리 싸우는가. 미국의 자구책과 병진 노선으로 설립된 사이버트론의 자구책이란 과연 무엇인가. 첫 번째로 디셉티콘. 그들은 고향의 재건을 위해 강력한 권력을 떠올린다. 메가트론이라는 강권자를 필두로 뭉친 그들의 이름은 ‘전투용 로봇’이다.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부하는 그 자리에서 처단된다. 고향의 재건이라는 대업 아래에서 부하이든 지구이든 그 무엇도 부품처럼 소모된다. 그는 명백하게 군사적 독재자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연상케 한다. 반면 두 번째인 오토봇. 그들은 고향의 재건을 위해 강력한 민주화를 떠올린다. 옵티머스 프라임이라는 프롤레타리아를 필두로 뭉친 그들의 이름은 ‘노동자 로봇’이다. 명령을 수행하지 못해도 화해와 격려를 해주며, 고향의 재건보다는 민족의 정착이 더 우선시된다. 말하자면 돌아갈 고향이 아니라 정착할 고향만이 있는 셈이고, 이것은 곧 이민자와 토착민이 한데 어울린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도 연관된다.

디셉티콘이 오토봇의 대립항이라고 해서, 미국을 상징하는 오토봇과 대립하는 디셉티콘이 소련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다는 건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인데, 잘 생각해보면 표면적인 전투 없이도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때도 있다. 이를테면 냉전시기 소련과 미국의 우주개발은 물리적인 위협이 아니라 심리적인 자존심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전투라고 칭하지는 않았고, 한편으로는 누구라도 그것을 전투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경쟁상대가 다름 아닌 적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온갖 갈등의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싸움의 논리는 ‘나’와 ‘너’라는 이분법을 따른다는 점이다. 우리 몸에 들어온 병균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라는 형체 안에 들어온 타자에게 우리는 거부감을 느낀다. 몸 안의 타자를 필히 제거해야만 한다는 점은 우리 몸에 생겨난 종양을 떼어내야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종양을 제거하는 것은 끝이 날카로운 칼이다. 그런 칼날이 바로 메가트론과 같은 독재자요, 그러나 이 칼날은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양을 제거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칼날이라는 선택지를 테이블 위에서 배제한 채로 유동적인 치료요법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메가트론과 같은 독재자가 미국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단지 그에 비견되는 히틀러와 전쟁을 치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오토봇에 직접적으로 동일시되는 것도 무리다. 먼 곳에서 온 강력한 외계인이 지구의 토착민과 한데 어울린다는 점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웨스턴 장르를 내세운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칭호다. 결국 뜨거운 전쟁 속에 숨은 차가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미국과 미국의 대립 구도라는 점을 우리는 깨닫는다.



2.jpg?type=w966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 오드





이것은 냉전이 아니다


<킬링디어>는 미국과 미국의 대립구도를 그리는 작품이다. 다분히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 작품을 해석할 방법은 아마도 그것밖에는 없다. <트랜스포머>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전개가 지속되지만 사실은 어느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영화 밖의 이데올로기를 끌어온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유사하고, 반대로 그 폭력의 규모는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미국 속의 개인으로 축소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트랜스포머>에서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고 어느 인간에게 그 미래가 맡겨지는데, <킬링디어>에서는 외계인과도 같은 이가 등장해 오토봇처럼 자신의 출신지를 설명하고 그 정당함을 논한다. 피해자의 아들이라는 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피해를 줬다는 간접적인 위로 심리의 회로를 작동시키고, 그 회로가 가동된 이상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요컨대 출신지는 지워진 채로 그는 단지 외계인에 불과할 뿐이며,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협동하거나 대척해야 할 타자의 논리에 편입되고야 만다.

하지만 사실은 타자는 없었다. 그것은 오토봇에 이입한 마틴 랭(배리 코건)을 맞이하는 인간 진영의 스티븐 머피(콜린 패럴)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논리의 형벌을 주장하는 마틴의 모습은 피해자의 아들은 동정받아야 한다는 선악의 논리를 붕괴시킨다. 아니, 이 물음은 보다 근원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머피는 마틴을 피해자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가 마틴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시계를 준 것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그 근원으로 되돌려 완벽한 에고(Ego)를 보상받으려 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이것은 <트랜스포머>의 서사에서 가져온 심리 도식이다. <트랜스포머>는 현대 미국의 과학기술이 사실은 오래전 땅속에 묻힌 메가트론의 신체에서 발원했다는 점을 설명하고는 그 과학기술이 다시금 메가트론을 때려잡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미국의 과학력은 근본적으로 타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결함을 타자의 개념을 지움으로써 보상받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머피는 마틴을 자신의 편으로 편입하여 타자의 개념을 지우고 그것으로 도덕적인 결함을 떨쳐내려 한다. 그 결함은 머피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간에 불완전한 에고를 채우려는 항상성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므로, 어쩌면 이 영화의 결말은 영화의 시작점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냉전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 냉전의 흐름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등가교환의 법칙은 과연 누가 누구에게 제기해야 할까. 복수가 나의 것이라면 그 복수의 대상은 누구인가. 혹시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회포를 푸는 원죄는 아닐까? 마틴과 머피는 서로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 피해자라는 생각은 어느 한구석을 콕 집어서 언급하기가 힘들다. 영화는 진실을 보여주지 않고 진실이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진실게임은 스페인 축구전술 티키타카(tiqui-taca)처럼 마취 의사에게로 책임 떠넘기고 그는 다시금 외과 의사에게로 떠넘기고 그 과정에서 머피가 했던 두 잔의 유흥은 그가 수술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하지 못한다. 술을 마신 것이 음주 운전의 기준은 되고 또한 음주 운전이 사람을 살해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그 살해대상이 지나가던 행인이 아니라 그가 탑승한 자동차 자체이기에 잘못을 명쾌히 따져 물을 수가 없다. 결국 책임은 분명 음주하고 수술실에 들어선 머피에게 있는 게 확실한데 그 죄는 명확하게 추궁되지 않는다. 이때 그것을 추궁하려 드는 건 마틴이고, 이 마틴의 처벌과정은 서사 상으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마치 존 매카시의 마녀 사냥처럼 원인과 결과는 형체가 없다.




3.jpg?type=w966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 오드




암묵적인 승자와 패자

이 영화에는 미국이라는 국가 내에서 암묵적인 승자와 패자와 분할되나 그럼에도 승패를 가로지를 수 없는 형이상학의 공포가 깃들어 있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는 과연 형체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절대 악과 절대 선을 마주했을 때 느끼게 되는 종류의 공포가 아니다. 외계로부터 온 타자인 오토봇은 자신을 선하다고 소개하는데 어느 순간 인류에게 불필요한 정치적 희생물로 변모하고야 만다. <트랜스포머> 4편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크툴루적 공포에 시달리며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프레임에 싫증이 난 인류는 트랜스포머라는 단어의 개념 자체를 아예 말살해버리려고 한다. 단어의 개념을 말살하지만 그들의 눈앞에는 명백하게 커다란 쇳덩어리가 현실의 위협으로 다가오기에 개념은 없되 공포만이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그것이 바로 냉전의 해체이다.

냉전이라는 기표는 단순히 한 가지 의미만을 담은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하위에 여러 의미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변증법이었다. 냉전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알레고리도 완성할 수 있었고 어떠한 공포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이 현상은 공포스럽다. 그러나 알 수는 없다. 그럼 왜인가? 그것은 바로 빨갱이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적이기 때문이다. 라는 조건없는 논리가 냉전 시대를 편리하게 해주었다. 어느새 우리는 그 속에 잠식되어 버렸고, 이 작품은 ‘형용할 수 없는’ 크툴루 신화적인 공포를 작품의 소재로 가져온다. <겟 아웃>이나 <곡성>이 그러했듯이 이런 장르에서는 오래전에 우리가 알던, 너무 오래되어 출처를 알 수 없는 아군과 적군의 그 논리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되는데, 그런 공포 중에서도 정말로 공포스러운 것은 아마도 우리 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생활의 공포다. 그들은 이제 적이 없으나 그 적은 어느새 내면을 파고들어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게 된다.

오토봇과 디셉티콘이라는 양측의 대립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말해서 냉전이 해체되고 나자 빨갱이 사냥조차 사라지고 냉전의 공포는 자신을 명칭 하는 단어를 잃고 미국 사회를 하염없이 떠돌게 된다. 이 유령은 파시즘이 사라진 유럽 땅을 떠도는 것처럼 냉전이 사라진 미국 땅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다. 마치 오토봇이 ‘빨갱이 사냥’이라는 이름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피해 온 지구를 떠돌았듯이 그들의 이념 또한 기표를 잃고 기의만이 남은 채로 그들 사이의 물리법칙이 된다. 어쩌면 일종의 자장에 해당할지도 모르는 이 인과는 분명 영화 밖에서 존재하지만, 영화 밖에서 끌어오면 안 된다고 나지막이 말해준다는 점에서 현실과는 모순관계이기도 하다. 이것은 영화이지만 관객은 자신의 세계를 투영할 것이고, 그런데 그 세계를 투영하지 않아야 한다고 내면의 목소리는 말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4.jpg?type=w966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 오드




드러난 심장

영화는 카메라 구도의 중심에 인물을 놓으면서도 항상 어딘가 불완전한 부분을 남김으로써 대칭의 완성을 일부러 피해가는데,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주체적으로 삶을 산다고 느끼는 게 사실은 주체적일 수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카메라라는 타자의 시선이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셀프 카메라의 성격이라면, 그것은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자신이 만들어 내어 타자로부터의 관찰을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재를 직시하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현재를 살아간다고 가정하는 것은 이 카메라요,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불균형한 부감 쇼트로 깨어지는 편집의 불연속성은 ‘위’에서 내려다본 ‘현재’라는 미래로부터의 구원을 상정하고는, 그런 카메라가 이어서 잡는 건 자신의 ‘과거’가 가족이라는 ‘현재’를 구원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왜 구원인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아이는 또 낳으면 되잖아.”라는 말로 자식 살해를 정당화하는 두 부부의 행복한 말로로 끝이 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되었던 마틴과 머피의 만남은 결말부에서 아들의 빈자리를 통해 강조된다. 아마도 영화는 가족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듯한데, 실제로 영화의 전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머피가 말했듯이 한 사람이 죽었다면 한 사람이 죽는 게 정의이자 구원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이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마틴과 머피는 이분법의 프레임을 지운 채 자기 자신의 과거 덕분에 구원을 받으려는 시도를 성공시킨다. 차가운 서사 속에서는 그 무엇보다 따스한 심장이 콩콩대며 뛰고 있었던 셈이다.

적과의 싸움에서 진 패자는 기회를 엿보며 힘을 기르게 된다. 물리적인 위협이든 심리적인 위협이든 자신이 패배할 확률을 다들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제는 적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을 때다. 적이라는 하나의 교집합이 없을 때 집단은 분열되고 형상은 분해된다. 어둠은 ‘내부의 적’이라는 공포로 형상화되고 형체 없는 그것은 대응조차 할 수 없다. 이 시꺼먼 침묵은 승자와 패자를 하나로 모으기도 하지만, 그런데 냉전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생각해보면, 표면적인 접촉 없이도 갈등의 씨앗이 금세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괜히 ‘차가운 전쟁’이라는 용어가 쓰인 게 아니다. 뜨거운 전쟁이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갈등을 상징한다면, 차가운 전쟁은 미국을 수호하는 이와 미국을 공격하는 이들의 이데올로기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뜨거운’ 이념에도 관심을 둔다. 아마도 이 영화의 시작이 마틴 아버지로 추정되는 어떤 이의 심장이 뛰는 모습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 테다.

드러난 심장은 신체의 급소가 아무런 보호 없이 노출되었다는 점에서 공포감을 준다. 우리는 그 심장을 단순히 신체의 장기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뜨거움을 투사하는 어떤 것, 이데올로기 혹은 사랑 더 나아가서는 어떤 생명과도 같은 활동의 중심지로 여기고는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의아한 것은 그런 중심지로부터의 파괴,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을 암시하는 듯하면서도 정작 영화의 내용은 자신을 제외한 가족이 서서히 죽어갈 것이라는 성서의 예언이다. 신체의 말단인 사지가 마비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척수에서 심장으로의 전이이며, 그 끝이 사망이라는 점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허나, 이 영화에서 폭력의 근원은 중심지에 자리 잡지도 않았고 또한 제거되지도 않는다. 마틴은 사회적으로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유한 계급도 아니고 그러나 예언을 주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를 죽이면 가족 전체가 몰살하는 자폭 스위치에 해당한다. 결국 머피는 신체의 중심인 심장을 살리려고 주변부의 사지 하나를 잘라내게 된다. 눈을 가린 채로 빙글빙글 돌아서 자식을 쏴 죽인다.




5.jpg?type=w966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 오드




너무나도 불확실한

“마르크스의 정신은 미래에도 유령처럼 출몰하리라.”라는 데리다의 예언은 ‘과거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벤야민의 메시아론과 거의 유사하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구원자라고 여길 경우일 테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구원은 미래로부터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은 이 영화를 독해할 때 의미가 깊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은 차츰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의 속성을 지워버린다. 이민자에 의해 설립된 국가라는 점은 희미해지고 이민자에 의해 망가지는 국가라는 피해의식만이 강하게 대두된다. 여기서 이민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만 (우리가) 도움을 주기 싫은 이들이다. 그럼에도 미국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정통성이 그들의 과거로부터 암시된다. 미국은 이민자의 국가이기에, 다시 말해서 그들의 현재는 이민자가 몰아닥침으로써 맞이할 불행할 미래가 아니라 사실은 과거로부터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이 이민자라는 존재를 이물질이라는 단어로 교환해보자. 마틴의 말처럼 일대일로 대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주변부의 의미는 어느 정도 맥락이 닿는다. 사회를 서서히 잠식해오는 그들은 지금 눈앞에 지하철 한구석을 떠돌면서도 사실은 뉴스 속이나 서류뭉치 속에서 범죄와 실업이라는 수치를 통해 제시되는 유령들이다. 바로 그 유령들이 이 영화에서 메꾸어지지 않는 앞뒤 서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제 다시금 이 영화를 마틴과 머피가 사는 세계로 가정하고 그 세계에 우리가 자신을 대입한다고 가정해보자. 현대인에게 공포영화보다 두려운 것은 자신을 이루는 세계가 서서히 붕괴되는 것이다. 개인의 시야에 보이는 세계가 하나의 방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방의 테두리부터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아야 하는 심리가 이 영화에 있다. 그것은 그 붕괴현장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존의 심리가 작용하면서도, 막상 문밖을 나서기에는 너무나도 불확실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마치 <미스트>의 주인공이 안개를 피해 마트에 숨었고 그 마트 밖을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마트 밖에는 괴물들이 있는 게 분명함에도 군대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구해준다는 점이 뒤늦게 밝혀지듯이, 어찌 되었든 간에 선택의 순간은 분명 온다는 점에서 시간의 흐름을 통탄하게 된다.

영화의 시간은 그런 불확실함 속에서 조용히 흘러간다. 이야기는 몹시 간단해서 요약하기가 더할 나위 없이 쉽다. 음주 상태로 한 남자의 심장 수술을 집도했다가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외과의사 스티븐 머피에게 죽은 남자의 아들인 마틴 랭이 복수를 벌이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끝내 머피는 마틴의 예언에 따라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이고 나서야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 영화는 그 결말까지 달려가는 과정을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의 흐름으로 묘사하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만을 늘어놓을 뿐 그사이의 인과를 일일이 봉합하지 않는다. 극은 시작되었고 복수가 무대에 올라옴에도 시선은 서로를 응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이의 시선은 극의 논리에 의해 관객의 시선으로 봉합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제거한 채 보아야 한다. 복수란 무엇인가. 복수란 그들 사이의 관계이지 외부 관찰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모호한 공기의 흐름만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 영화 밖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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