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진지해져요.
신카이 마코토라는 감독을 말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가 신카이를 말할 때 애니메이션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무언가, 말하자면 대중적으로 성공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입지로 그를 평가하게 되는데 그건 문제가 있다. 어느 분야에서 이례적으로 성공한 이가 등장하면 으레 시선이 집중되기 마련이지만, 그러한 특별함이 특수성으로 변질된다면 우리는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신카이를 두고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든가 하는 호칭을 피해야 한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해냈을 뿐이고 그런 수고에 성공이 따라붙은 것뿐이다. 말하자면 이 성공은 서브컬쳐의 대중화라는 사안을 증명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상당히 마이너하다고 여겨져 왔던 서브컬쳐 분야에서 성공한 이 감독을 두고서 ‘일종의 돌연변이’ 취급을 했는지도 모른다. 즉, 서브컬쳐는 어디까지나 ‘서브’이기에 대중화될 수 없고 만약 그렇다면 돌연변이일 것이라고 말이다.
2019년을 기준으로 신카이는 7편의 장편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이미지의 묘사와 재현을 보면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작가라 할 수 있다. 분명 별개의 작품을 두고서 이것이 매우 뛰어나다거나 하는 식의 평가가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자기 생각을 꾸준히 관철한다는 점에서 그는 작가이다. 눈에 띄는 것부터 접근하면 하늘을 중심으로 한 빛과 날씨, 계절의 심상이 작품에서 반복된다는 점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미술적인 요소에 불과하며, 무엇보다 그를 작가로 만드는 것은 세카이계라는 장르의 이미지적 변주이다. 예컨대 세카이계라는 장르를 꾸준히 밀어붙이는 것에 불과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의 이미지를 빛과 날씨와 같은 것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 세계는 물화한다.
세카이계(セカイ系)라는 장르 자체가 해당 세계로의 진지한 이입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 세계의 법칙이 어떠한 이미지의 변주로 이루어지는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이미지는 우리의 현실에서와 다른 맥락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카이계를 들여다볼 때 우리 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왠지 모를 어긋남이나 오묘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런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현실과 장르 안에 존재하는 차이를 세계의 지축으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신카이는 그것에 능하다. 이를테면 신카이의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 세계를 하나의 장르로 여기게 된다. 즉 이것은 장르 대 장르로서 어느 한쪽이 우세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런 장르의 혼용성은 수용자의 관습에 의거해 결정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세카이계를 들여본 이상 우리는 그에 참가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게 되었으며 그 또한 우리에게 초대를 보내고 있다.
이쯤에서 간략하게 정리를 해두자면 다음과 같다. <별의 목소리>(2002). 우리는 남자 주인공이 되어 여자 주인공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우리는 남자 주인공이 되어 여자 주인공이 보내온 신호를 받는다. <초속 5cm>(2007). 우리는 남자 주인공이 되어 떠나간 여자 주인공과의 재회를 고대한다. <별을 쫓는 아이>(2011). 우리는 여자 주인공이 되어 남자 주인공과의 만남을 고대한다. <언어의 정원>(2013). 우리는 남자 주인공이 되어 여자 주인공에게로 달려간다. 여기까지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은 세계에 남녀 커플이 하나 있고, 두 남녀를 기준으로 세계가 만들어지되 주연과 조연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주연인 이가 조연인 이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짝사랑과 같은 형태로 서사에 대한 탐색과 진행이 이루어진다. 즉 여기까지는 전통적인 세카이계 안에서의 서사 흐름이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2016)에서 우리는 남녀 주인공의 육체가 뒤바뀌며 양측이 모두 주인공으로 개입하는 서사, 고대함과 고대함이 한 곳에 중첩되는 것을 확인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이 신카이 영화에서 어떠한 변곡점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신카이의 영화가 여전한 순수를 유지하고 있는 지점은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도중에 잠깐 추방을 겪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신카이의 영화를 세카이계라는 장르로 접근할 때, 핵심은 두 남녀가 서로의 이상을 기다린다는 게 아니라 세계의 안과 밖으로 드나드는 변주의 협곡이다. 즉 우리는 인물을 보조하는 세계가 아니라 인물이 소속된 세계라는 개념으로 세카이계에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살아가는 것이다.
2. 세상이 우리를 살다.
주인공 남녀라고 특정되는 인물이 작중에 나오지만 사실은 그 배경세계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인공이다. 예컨대 두 남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배경이 있다면 그곳이 주인공인 것이지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주연은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세계는 이미 만나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한데 속한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세카이계가 전제하는 연애라는 콘텐츠는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 즉 세계를 공유하고 있음에서 만남의 전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너의 이름은>은 남녀의 몸이 바뀌어 일방적인 이야기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아니라. 두 개의 세상이 한 곳에 중첩된다는 게 중요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칼 융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게 있는데,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초의 낙원이다. 이 낙원에서 인간은 아무런 고뇌나 고백 없이 단지 먹고 노래하는 존재일 뿐이다. 예컨대 이 시기의 인류는 의식의 바벨탑 안에 살고 있는데, 이는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그 안에 속해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뱀에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으로부터 바벨탑의 붕괴를 선고받는다. 이제 우리는 더는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아담과 이브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낙원 밖으로 추방되고야 만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우리는 그들이 다시 낙원으로 편입되기를 원한다. 하나의 마음을 공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이며, 모두가 같은 세계에 속한다면 그곳엔 갈등도 대립도 없을 것이며 싸움이나 전쟁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싸움이나 전쟁도 없는 세상, 이것의 구현방법은 모든 이가 현명해지거나, 아니면 나만의 세계에 갇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세카이계의 구현방식은 대체로 후자의 방식을 취한다. 세카이계의 주인공들이 대체로 청소년인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청소년이라는 시기가 내면의 자폐적 공간으로 숨어버리기에 좋은 때이기도 하지만, 나와 너라는 두 명의 타자를 지정하여 그들이 나이게 하는 방법은 하나의 세계에 나를 소속시키는 것뿐이다. 즉 이것은 ‘세계이자 상대인 나’이다. 이 세상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을 내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연애 상대로 물화하고, 이윽고 두 남녀는 그들의 세계 안으로 점점 파고들면서 바깥의 것들은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세상이 망하는 말든 별 상관은 쓰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과 세상과의 공존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세상이 바로 자신의 내면이고 그 안에는 모처럼 이상적인 대상이 눈앞에 있으니까.
이상적인 대상을 추구한다는 점이 세카이계를 여타 다른 장르와 동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요인이다. 서브 컬쳐 장르라 하여 일반 영화와 비교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을 정초로 하는 세카이계가 인간의 욕망을 직격한다면, 이는 관객의 욕망을 자신의 본류로 삼는 어느 스크린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이 세카이계에 접근해온 뱀,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꾀어낸 것이 바로 우리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영화를 관람한 순간부터 이미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니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모험담은 기본적으로 낙원으로의 복귀를 염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낙원은 자신의 반대항으로 나온 만나야만 할 누군가와 결탁함으로써 복구된다. 이것이 세카이계가 주로 연애의 형태를 한 이유이다.
여기서 연애라는 행위를 통해 밝아지는 세계가 아니라, 연애라는 행위가 발현되게 하는 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신카이가 천착하는 게 바로 이곳이다. 신카이의 영화가 기본적으로 세카이계의 형태를 띠지만 남녀가 어떻게 되든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되든 그 세계는 살아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쪽을 그는 택한다. 스크린이 보여주는 게 하나의 세카이라면, 이 세카이 안에 있는 두 명의 아담과 이브는 단지 집단 무의식을 보여주기 위한 원형에 불과하다. 이 원형은 언제든지 바뀌거나 교체될 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신카이는 그저 그런 사람들의 표본을 그에 대입한다.
그저 그런 사람들의 표본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그에 이입하기는 쉽다. 어쩌면 평범한 이가 평범한 이와 만나서 특수함을 구축한다는 만남의 논리가 작용할지도 모른다. 이는 마치 아담과 이브가 만나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구성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는 신카이가 좋아하는 빛과 하늘, 날씨와 우주와 같은 배경적 활용이 에덴동산의 효율적인 구축방법으로까지 보일 지경이다. 말하자면 에덴동산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생명체인 아담과 이브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었듯이, 이 에덴동산의 가치를 증명하려면 아담과 이브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이 없다면 아담과 이브로서 존립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 증거로 그들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그들의 이름은 인간이 되었다. 이름이 지워지고 세계에 환원된 것이다.
3. 이미지로의 환원, 세계로의 구축.
이름이 지워지고 세계에 환원된 것들은 영웅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어느 영웅의 일대기를 볼 때 처음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지만, 종국에 남는 건 그들이 살았던 시대이다. 말하자면 영웅의 참뜻은 이름이 아닌 시대에 있다. 그게 바로 영웅의 시대이다. 영웅이 시대와 만날 때 시대는 영웅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도래한다. 마찬가지로 신카이의 영화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신카이의 영화에서 영웅이 빠진 적은 없었다.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성취한다기보다는 용사와 괴물이라는 대상과 피대상의 관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주체의 모습이 영웅의 임무수행과 별반 다를바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자 생각해보라. 영웅이 왜 공주를 구하러 가는지를. 여기서 공주는 여성이라는 성이 아니라 감금된 히로인의 맥락을 지닌다. 그리고 그런 감금된 히로인이 바로 우리의 욕망이다.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금지한 것, 허나 세계를 비집고 들어오면서까지 뱀이 전하려 했던 것. 예컨대 우리는 에덴동산에서의 뱀의 역할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너의 이름은>이라는 예외적 작품을 살펴보자. 첫 번째, 타키는 현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두 번째, 미츠하는 과거의 세계에 살고 있다. 세 번째, 황혼의 시간이 되면 두 세계는 한 곳에 겹쳐진다. 여기서 우리는 타키와 미츠하의 세계가 겹쳐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세계가 돌아가는 것이다. 세카이라는 거대한 무의식으로 자아가 환원되는 것이다. 마치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모두를 죽음으로 환원했을 때처럼, 하지만 절차는 정반대이다.
어쩌면 고집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기존에 세카이계라고 부르던 장르의 법칙에서 이탈하는 게 단순히 고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신카이가 그걸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점이 그가 믿는 무언가임은 틀림없고, 그걸 이어나가는 게 그의 몫이라면 이는 작가적 신념이다. 그렇다면서 여기서 우리는 신카이의 작품에 대한 다른 부분을 살펴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세카이 안의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다. 신카이의 작품이 후기작으로 갈수록 점점 더 작화가 좋아지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단지 기술적 발전에 의한 자아실현의 꿈, 또는 실사에 대한 애니메이션의 오마주라고 할 수도 있겠만 다르게 볼 구석도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에서 구로사와는 자신이 꾸었던 꿈을 스크린으로 재현하는데 여기에는 어떠한 순서나 주제가 있지 않다. 그냥 꾸었던 꿈이고 그래서 그게 정말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구로사와가 꾼 꿈은 정말로 기억되었다기보다는, 그에 준하는 비슷한 무언가로 변형되어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절차 속에 어떠한 흐름이 생기게 되었고, 그런 흐름의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 무분별한 배치이다. 예컨대 무질서에는 질서가 있다. 그것은 무질서라는 이름의 질서이다. 그런데 이때 그런 꿈을 영화로 만든 게 이미지의 실사화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구로사와의 세카이는 스크린에 물화하는 것일 테다. 마찬가지로 신카이도 그런 일을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구로사와가 영화인으로서 자신의 꿈을 최대한 영화로 구현하려 했듯이, 그 또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애니메이션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예우를 갖춘 것일 테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노력이 단순히 명장의 자세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게 일종의 바벨탑이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이 완전한 실사의 길에 들어서는 게 신의 영역, 즉 창조의 영역이라면 신은 진노하여 바벨탑을 무너뜨려 하나의 인간을 별개의 주체로 만들 것이다. 바벨탑이 무너지며 언어가 산종되었듯이 신카이는 세카이의 실사화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세카이를 이리저리 흩트려 놓으려 한다. 그 결과 스크린이 보다 현실에 다가설 때 오히려 스크린은 파국을 맞이한다. <별의 목소리>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이 표현될 때 그들 사이는 멀어지고, <초속 5cm>에서 봄의 풍경이 짙어질수록 소식은 희미해지며, <너의 이름은>에서 하늘을 가르는 유성우의 시간에 남녀는 찢어진다.
세상천지에서 서로를 모른 채로 살아가던 이들이 우연한 기회로 만나고, 하지만 찢어지고,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재회할지 아닐지의 물음을 던져보게 되는데 <너의 이름은>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신카이가 만남의 장으로 진입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예컨대 집단 무의식으로 흩어진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시금 에덴 동산으로 복귀하는 것, 즉 환원이었다. 시간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타키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내달리는 장면은 세계로의 환원을 직시하는 한편, 그렇게 돌아간 세계에서 더는 아담과 이브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의 바벨탑을 원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고, 영화는 뱀이 없는 에덴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남녀의 우연한 재회로 끝나면서 신의 낙원이 아닌 인간 주체로서의 낙원을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이를 두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오타쿠들의 폐쇄된 세상을 허물고 세상에 나오라고 했던 말, 그것은 관객과 감독과의 만남이자 주체와 타자라는, 세카이라는 나르시시즘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4. 마음은 흘러갈 뿐.
신카이의 <날씨의 아이>를 보면서 느낀 건 그가 <너의 이름은>에서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한 변화를 겪었다는 점이었다. 남녀를 위해 구축된 세카이가 그들만의 나르시시즘을 전력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이전까지와 같다. 사실 이는 신카이의 아이덴티티이니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본작에서 비라는 ‘가장 환원주의적인 매개’를 목격한다. 비가 내리면 강물이 되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며 바다는 기화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이하 반복. 이는 물의 순환과정이자 바다로의 환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에반게리온>에서 인간의 피가 일종의 바다, 집단 무의식의 형태와 유사하게 지칭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날씨의 아이>에서 내리는 비는 그만큼 파편화된 주체 혹은 개인일 테다.
그러니까,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빗방울마다 별개의 주체라면 구름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 구름이란 건 분명 무의식은 아니다.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위치는 작중 무대인 도쿄의 근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인공은 집단으로서의 무의식에 소속되려고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니 이 소속감에는 무언가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는 심리적인 연대가 필요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는 알 수 없는 반항심, 가출이라는 행위로 지칭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비를 걱정하는 작품 속 모든 인물이 가출을 했다고 말해야 한다. 주체로부터의 가출, 또는 탈출. 그건 마치 ‘인체의 신비전’에서 자신의 피부 거죽을 손에 든 인체조직과도 같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분리된 껍질이다. 나는 껍질로서 바다에 환원되려 한다…
비가 내린다. 이 비는 구로사와가 그토록 좋아했던 죄를 씻어내리는 무죄판결로서의 환원주의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꿈>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여우비라기보다는, <라쇼몽>에서 라쇼몬 문 앞에 내리는 퍼붓는 비에 가깝다. 모든 것이 한여름밤의 신기루로 취급되기보다는 바로 이곳에 우리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의사행위, 또는 그 치레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 <날씨의 아이>가 도쿄를 거대한 호수로 만들어버릴 때 그것은 재난에 관한 무언가를 은유하는 게 아니라 전작에 대한 오마주이다. <너의 이름은>의 결말은 물이 고인 이토모리 마을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는 게 아니라, 재난 상황이라는 무의식적인 불안감이 물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고, 이는 <날씨의 아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곳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호수가 아니라, 차분히 쌓여온 빗방울 그 주체가 하나로 환원되는 곳이 그런 집단적 불안의 형태일 뿐이다.
오늘의 날씨는 언제나 맑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대게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면 이 대목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한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비가 오면 어머니가 이 땅에 찾아온다. 그러니 비는 멈추어선 안 된다. 예컨대 비는 어머니를 도래하는 도구이고, 혹은 아이의 상상이 만들어낸 정신적 분열의 형태일 수도 있겠지만 남편에게도 그녀가 보인다는 점에서 이는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살아생전 아이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책이 그들의 세계를 세카이로 만든 것에 가깝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세카이는 언제든지 후천적으로 구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가 평범하게 태어났더라도 세카이로의 진입을 통해 태초의 에덴, 아담과 이브가 기다리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단지 우리가 뱀인지 아니면 인류인지를 선택하게 될 뿐이다.
세상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리다 하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그게 전하는 교훈이 아니라 기분이 날씨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흐림, 기분이 좋으면 맑음이다. 그런데 이미지상으로 구름이 낀 형태나 맑은 날씨나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빛이 내리쬔다는 건 그것이 모두에게 잘게 내려온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비와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빛이라는 한줄기를 구원의 형태로 자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먹구름이 따라다닌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반대로 빛이 내리쬔다고는 생각하곤 한다. 신이 자신만을 봐줄 것이라고, 하지만 슬픔은 모두가 함께 겪는다고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모두라는 인격이 아니라 그 세계가 겪는 일이다.
이에 따르면 모두가 슬펐으면 좋겠다는 말은 세상에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쯤이 된다. 비는 잘게 쪼개진 물로서 세계의 파편화, 즉 어두운 감정이 최대한 불특정 다수에게 뿌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비를 곧이 맞는 행위는 어둠을 긍정한다는 것이며, 비를 몰아낸다는 건 어둠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이는 비를 쫓는데 사용되는 미신 인형 테루테루보오즈를 처마에 거꾸로 매달아두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의 모습은 떨어지는 것으로 누군가에게는 죽음 또는 자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비가 내리는 것을 대신해 땅에 떨어지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형은 어둠을 머금은 것, 먹구름의 요인이며 먹구름이 땅에 있기에 하늘은 맑아진다. 이것이 <날씨의 아이>의 기본 원리이며 그런 맥락으로 보면 <너의 이름은>에서 떨어지는 유성, 파괴의 상징물을 다시 하늘로 되돌리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일 테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쪽이 더 기적이다. 시간은 되돌린다는 인식으로 이루어지지만 비는 그저 흘러갈 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