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역할 중 하나는 기후변화를 감지하는 일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는 1980년대부터 줄곧 이루어졌지만 그때는 아무도 이를 현실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몇 명민한 과학자들만이 통계와 데이터를 토대로 이를 주장했을 뿐이다. 이후 시간이 40년 정도 지났을 때 위협은 현실이 됐다. 여름이 끝나지 않는다든가, 사람 주먹만 한 우박이 내린다든가 하는 일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를 위기로 인식하게 됐다. 이 일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현실주의적 태도일 것이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감정에 찬 호소도, 이성적인 설득도 아닌 목전에 다가온 위기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는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매체로 인식됐다. 벤야민은 사람들을 꿈의 세계에 재워 현실감을 잃게 하는 영화의 기능적인 면모로 ‘마비’를 지적한다. 그는 언젠가 충돌할 것이 예견된 선로가 있고, 이 위를 달리는 게 바로 영화라는 이름의 열차라고 믿었다. 영화가 세계를 꿈에 덮는다면, 안에서는 바깥에 닥쳐올 위기를 감지할 수 없고 파국을 말하는 일도 불가하다. 결국, 파국에 관해서는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문제는 위기가 현실이 되기 전에는 파국에서 깨어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다. 위기가 현실이 되는 순간은, 현실이 위기가 되는 순간과 같다. 벤야민은 여기에 세기의 돌풍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천사를 가정했지만, 어떤 면에서 ‘깨어남’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불가하다면 서로를 끌어안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충돌은 이미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고 또한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걸림돌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위기’로 느끼는 건 그게 이미 벌어졌기 때문이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여서가 아닌 것이다. 판데믹 이후의 영상 매체에서는 이와 같은 면이 비교적 흥미롭게 다가온다. 판데믹은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위기 중 유일무이한 현상이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결국 지구 행성이라는 폐쇄병동임을 말해줬다. 꿈세계를 유리온실에 빗댔던 수잔 벅모스의 말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야는 한 세계의 불안이 끝없이 내부로 투영되고 증폭될 것임을 암시했다.
일본의 만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개성(=초능력)의 발현과 이를 토대로 한 종말론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다. 자손 세대로 갈수록 점점 더 개성이 강해질 것이라는 말은 한 사람의 사소한 감정변화가 세계 전부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 이를 따라 힘과 지배를 통한 통제를 하자는 게 메인 악역인 올포원의 주장이며, 이에 맞서는 쪽은 “한 명을 위한 모두”의 반대편인 원포올(모두를 위한 한 명)이다. 이 구도에서 흥미로운 건 조연의 이야기나 주연의 대립구도가 아닌 배경이다. 한 세계가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 불안을 반영하고 표출하는 일은 한순간의 선택으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극단을 다룬다. ‘순간’은 바깥을 외삽하며, 이때 ‘가상’은 실제를 압도한다. 즉, 사이버펑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연결에 대한 상상은 핵무기와 같은 순간의 위협으로, 지금 이후를 가정하기가 어렵다는 펑크로 나타난다. 사이버펑크는 사람들에게서 앞으로 나아갈 공간을 제공하지만 반대로 그곳 이외의 대안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사이버펑크는 우리를 앞질러 제안된 희망이고, 이와 같은 희망은 자유를 잃었기에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한 세계에 감금되어 길러진 사내를 다루는 영화 <트루먼쇼>를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원 포 올, 올 포 원”. 이 문구는 한 세계가 한 사내만을 위해 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누설한다. 이곳의 하늘은 가짜고, 트루먼이 배에 올라탈 때 내리치는 폭풍우도 가짜다.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지만 트루먼은 그곳에 무언가 있음을 직감한다. 트루먼은 외부를 향해 나아가려 하며 여기서는 단지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동인이 된다. 여기서 트루먼이 품은 게 바로 희망이라 할 수 있다. 테리 이글턴은 낙관과 희망을 구분하면서 기독교에서 ‘절망’은 메시아의 출몰을 잊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본다. 벤야민의 천사가 왜 기독교적인 물음인지를 생각하면, 사이버펑크가 인간의 삶이 외부로 확장되는 일이기보다 자기를 끌어안는 일에 더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펑크는 미래를 앞지르지만 한편으로는 원치 않는 미끄러짐이기도 하다. 트루먼은 자신이 밖으로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트루먼은 그 어떤 외부로도 자신을 확정할 수 없었지만, 그 어떤 자신이라도 외부로 끌어안을 수 있었다.
사이버펑크가 말하는 희망은 현 상황에 대한 긍정과 지지가 아니다. 자신을 다치게 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임을 알아차릴 때 외부는 감금의 양식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외부는 단일 형식으로서의 자기를 말하기 때문에 끌어안음의 형태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다. 가상이 실제를 압도하는 게 사이버펑크라면, 반대로 이 현실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사이버펑크다. 이 점에서 사이버펑크는 단순히 실패를 말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이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살펴보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은, 반대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이 문을 열고 한세상을 나서는 모습으로 끝나지만 동시에 한세상을 마주하는 것으로도 끝난다. 인류가 겪은 판데믹은 이런 부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구촌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을 무렵은 인터넷 사회의 등장과 맞물렸었다. 지구촌은 한 세계가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세계 시민 의식을 강조했다. 하지만 판데믹은 다른 나라나 장소로의 이동을 제한하면서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끔 했다.
이곳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건 오즈의 도로시만큼이나 오래됐다. 이곳에서 ‘미래’는 멀리 있지만 내다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부로의 이동에 제약이 생기고 나면 당장 살아가는 곳은 어쩔 수 없이 끌어안아야만 하는 게 된다. 이곳에서 삶은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다. 대개는 삶의 바깥으로서 한 세계로의 이동을 꿈꾸지만, 한 삶이 곧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세계 전체가 될 때 희망은 사라지고야 만다. 열차가 평행을 달릴 때 제동을 걸만한 장치가 없다는 건, 그야말로 메시아의 부재라 할 수 있다. 세계시민이라는 말이 도래할 미래에 관한 방지책이었다면 단어를 구성하는 조어들에 유기성을 잃어버렸던 판데믹 시기는 미래가 곧 희망을 뜻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모든 세계가 하나의 삶을 향해 펼쳐졌지만, 유리온실 안에서 한 세계는 모두의 삶을 집어삼킨다. 1851년 열린 세계 최초의 박람회는 유리제작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거대 온실로 지어졌다. 아케이드의 형태로 지어진 수정궁은 앞으로의 세계가 점점 더 자기를 투영하게 될 것임을 예견했다. 내부로 반복되어 투영되는 불안은, 폐쇄 기관이 되어 수정 불가능한 알고리즘을 생성하고야 만다.
세계시민은 네트의 발명 전에는 없었을까?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라는 인식은 이미 현대의 초입에서부터 있었다. 핵무기가 발명되면서부터 서로에 대한 인식이 공존에서 공멸로만 바뀌었을 뿐이다. 서로가 진정으로 연결되는 순간이 바로 세계적인 재난이라는 점은 여기서 사용되었던 ‘네트’라는 말을 달리 보게 한다. 네트는 고저차가 없다. 즉 모든 지평이 곧 모든 순간이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의 순간을 살아간다는 건 반대로 사이나 틈새와 같은 표현이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모두가 이 앞에 다가올 미래가 파국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길 때 ‘사이’와 ‘틈새’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세계는 핵무기를 통해 정해진 미래를 끝없이 지연하기만 하는 것일 뿐인 게 아닐까. 누군가는 유년기의 끝을 두고서 어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어른은 성장이 끝났다는 점에서 발전 없는 미래를 향해갈 뿐인 존재다. 하지만 유년기가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가 바깥에 속해있다는 걸 알게 된다. 유년기는 이미 끝나버린 것들을 대표하기에 생각해봐야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 하나는 우리가 마주할 모든 것을 향해 펼쳐져야만 한다. 사이버펑크는 사이버공간이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편입될 것을 가정하며, 이때 사이버는 인간이 진출한 영역으로 규정된다. 애니메이션 <디지몬> 시리즈가 묘사하듯 가상 세계가 이미 그곳에 있고 인간이 진출했을 뿐이라는 가정은 인도 대륙으로의 탐사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여정, 달세계 여행과 같은 부류의 탐험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더 나아갈 구석이 있다면 우리에겐 아직 남은 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아주 단순하게 볼 때 우리의 미래에도 아직은 ‘여지’가 있는 듯 느껴진다. 사이버펑크는 이 점에서 우리가 네트를 세계의 완충지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만약 사이버펑크가 현실에 앞서 존재하는 사이버를 말한다면, 이를 어떠한 낙관 아닌 희망으로 보는 것도 가능할 테니 말이다. 판데믹 시기에 ‘위기’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위기는 하나의 미래를 소유하게 해줬다. 점점 더 소유에 관한 의식이 약해지고 자신조차 타인에 대여받는 세상에서 ‘하나’를 말하게 되는 일은 우리가 앞서 갖지 못했던 미래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