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내외의 유튜브 영상이나 1분 내외의 숏폼 콘텐츠가 범람하는 가운데, 뭔가를 본다는 건 점점 더 무거운 일이 되어간다. 막 일어난 아침에 밥을 먹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만큼이나 ‘콘텐츠’는 마냥 즐길 수만은 없게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일에는 콘텐츠가 무언가를 ‘담는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재밌게 보고 있던 작품에 대외적인 논란이 생긴다거나 하면 팬으로서는 꽤 피곤해진다. 예전에는 팬덤 문화가 자신이 지지하는 것을 옹호하고 지키는 일에 중점을 뒀다면, 근래에는 과감하게 버리는 전략을 취한다. 캔슬컬처는 지지철회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는 피로를 느끼고 싶지 않아하는 자기 보호의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까지 ‘자기’를 지켜내야만 하는 걸까. 그게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선언해버리면 ‘자기’는 효율적으로 지켜진다. 취향의 세분화가 의미하는 건 자기를 특정하는 방식의 발달이면서 동시에 세계의식의 발현이다. 가령 근대 사회에서 시민의식은 [세계]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곳’이 ‘전부’가 아니게 되면서 세계시민이라는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소비자는 상품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먹으면서 잠자고, 무언가를 행하며 살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따른다는 점을 발견할 때가 바로 ‘상품’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한 미디어를 소비하는 일은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즉 무엇이 자기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한 미디어에 대한 지지철회는 자기였던 것에 고하는 안녕과도 같다.
줄리안 크리스테바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한때 자기였던 것들’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할 물질 대사다. 소비자는 단순히 미디어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자기에 흡수하고 남은 것을 배출해야만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자기를 버리는 정책을 취하는 근래의 모습은, 도리어 소비자의 대두를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미디어의 근대가 좋아하고 재밌는 것을 즐기는 팬덤 사회였다면, 미디어의 현대는 탈락되는 것을 ‘실패’나 ‘패배’로 규정하지 않는다. 다소 비약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만, 지지철회가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둬야만 한다. 지지철회는 캔슬컬처의 일부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흥미가 떨어져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때를 가리킨다. 이를 두고서 우리는 ‘갈아탔다’고도 보지만 절대로 미워한다거나 싫어졌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한때 자기였던 것들에는 항상 예우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빗대자면 어머니는 아기가 배출한 변을 두고서 더럽거나 혐오스럽다고 보지 않는다. 이는 어머니가 아기와 연결되어서다. 어머니가 아기를 자신의 안에 품었기 때문에 아기는 ‘자기’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서 삶의 풍경이 늘 ‘전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자기’가 없다는 풍경은 ‘한때 자기였던 것들’로서 배설물의 일종이다. 그런데 풍경이 과연 더럽던가? 혹은 우리가 그걸 싫어했던가? 유성우는 궤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길고 긴 꼬리를 남긴다. 이는 점점 부셔져 가는 본체를 암시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다운 꼬리로만 보인다.
둘 중 하나에 올인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둘 다 챙겨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를 두고서 ‘나아간다’고 보지 ‘탈락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이는 고용을 효율화하려는 움직임에도 빗댈 수 있는데, 경직된 고용 시장이 불경기를 만든다는 주장을 떠올려보자. 완고한 취향은 자기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취향을 이리저리 옮겨보는 일은 줏대가 없는 게 아니다. 경력을 쌓아 더 나은 미래를 향하는 발걸음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좀 더 쉽게 탈락시킴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반대로 새 취향을 고용하는 일에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이 관점으로 바라본 지지철회는 효율 경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상대방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이거 보면서 감정 소모할 시간에 더 나은 도파민을 위해 떠나가는 것뿐이다. 결과적으로 콘텐츠가 점점 더 무거워질수록 사람들이 이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 것은 책임의식의 부재가 아니다. 이동이 보편화해서 어딘가로 떠나간다는 게 더는 특별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콘텐츠 소비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이 특별하지 않게 됨으로써, 반대로 이동의 순간을 장악하는 일이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어딘가에 정주하면서 들여다보아야 할 게 정적인 콘텐츠라면, 사이를 장악한 콘텐츠는 그리 무겁지 않고 또한 사람들을 붙잡아 놓지도 않는다.
일본의 만화평론가 오스카 에이지는 영화의 만화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언젠가 만화가 웹으로 옮겨간다면 사이를 요구하는 형식에 변화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출판만화만이 할 수 있는 연출을 영화론에 접목한 그에게 ‘사이’의 부재는 만화와 영화 간의 연결고리를 끊는 일이었을 테다. 만화가 영화의 연출을 사용할 수 있던 건 그와 같은 사이가 시선의 움직임과 같은 이동성을 담지하는 덕택이었다. 즉, 만화에서 ‘사이’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시간이었고 이는 곧 근대적인 형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동성이 강화되어, 즉각적으로 서로와 만나며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스마트폰 이후의 세계는 ‘사이’를 두기가 어려워졌다. 구태여 밖에 나가지 않아도 자신과 취향이 같은 많고 다양한 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이 변화는 만화가 갖는 가능성 중 하나였던 영화를 박탈했지만, 도리어 새로운 형식을 발명해냈는데 인스타툰은 아마도 이런 형식을 한 작품군으로 분류될 수 있다. 24년도 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공모전의 수상작 “만화 대신 만화”가 지적하듯 만와라는 표현을 해볼 수도 있겠다. ‘만와’는 깊은 이야기나 담론등을 말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보는 이의 일상에 더 잘 침투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만들기의 한 가능성을 선보인다. SNS 시대 들어 등장한 이 만와는 장면과 장면을 판으로 배치한 출판만화와 이를 세로로 나열한 웹툰의 다음 단계로 여겨진다. 장면과 장면에 집중한 형식은 중요 장면만을 배치한 콘티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는 아기자기하거나 간결한 그림체 등이 주를 이루는 만와가 성의 없게 보이기도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사이가 발생한다는 점이 간과될 수는 없다. 화면을 계속 넘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새는 만와가 연재되는 플랫폼이 SNS라는 점에서 일상의 틈새와 공명한다. 웹툰 플랫폼이 이야기의 밀도를 위해 점점 연출을 고도화하고 세밀화한다면, 만와는 그와 반대로 향한다. 빈틈을 내어주고 또 확장하면서 보는 이가 내용에 진입하도록 돕는다. 물론 그 안에 깊고 넓은 것을 담을 수는 없다. 점점 더 판형이 축소된다는 건 단일한 칸에 담을 만한 이야기가 줄어든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도리어 만화가 영화에 가까워지면서 ‘무겁다’라고 느껴진다면, 여기에 손을 대기란 곤란해지기 마련이다. 너무 연결되었기에 도리어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것만큼이나 ‘사이’의 형성은 일상을 영유하는 일에 중요한 가치가 된다. 연결은 사람 사이를 잇지만 반대로 ‘자기’를 침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로에 어디까지 연결되어야 할지를 자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고민거리다. 상대방과 적절한 거리감이 어떨지를 생각해보는 일은, 다가서는 일만큼이나 서로를 밀어내야 함을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만와의 밀어내는 형식에는 고민이 없다. 컷과 컷 사이를 밀어내는 일은 인간관계와는 달리 거리감을 잴 필요가 없다. 한 걸음씩 내딛는 것처럼 경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는 것들 사이에는 질투와 오만, 혹은 나태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섞이고는 한다. 형식으로서의 만와는 이런 일에서 잠시 틈새가 되어준다. 점점 더 세분화하는 취향이 서브 컬처의 부흥을 이끈다면, 이때 틈새는 자기를 세상에서 잠시 분리하려는 시도가 될 수도 있을 테다.
그렇다면 행여나 이러한 거리두기가 감정적으로 삭막한 사회를 만드는 건 아닐까. 엑스와 인스타그램 같은 서비스는 팔로우를 끊기보다 거리두기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소식을 ‘차단’하기를 권장한다. 이는 팔로우를 끊으면 그 점이 상대방에 전달되어, 당신에 거리를 둔다는 점이 즉각 밝혀지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거리두는 법’이 형식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즉, 만와가 상대적으로 만화에 비해 가볍고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여기에는 ‘안전하다’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전하다는 말을 생각하면, 뭔가 상반된다는 느낌이 있다.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무해하다는 뜻이지만, 그만큼의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어서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처럼 들린다. 가령 컷과 컷으로 구성된 만와에서 더 연결성을 떨어트리면 컷 하나로 이야기가 축약된다. 이 경우는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해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모티콘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부드라미의 <바들바들 동물콘> 같은 사례를 살펴보면 한 컷에 담긴 캐릭터의 모습이 이모티콘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NC소프트의 <도구리>는 신입 사원이 겪는 다양한 상황을 무해하게 그려냄으로써 자칫하면 스트레스받을 수 있는 상황을 ‘안전하게’ 그려냈다. 꿀김의 <악어과장>도 직장인으로서 겪는 고독과 우울함의 순간을 귀여운 캐릭터를 통해 중화한다. 최유나 변호사가 그리는 <메리지레드>나 비자의 <병원툰>도 자칫하면 자극적으로만 묘사될 수 있을 사건들을 독자에 ‘안전하게’ 전달한다. 이처럼 ‘만와’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술회하며 마음을 치유 받던 자전만화와 유사한 맥락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