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메리와 마녀의 꽃>에서 바라본 변화들
▲영화 <메리와 마녀의 꽃>의 작품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2013년,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선언했다. 2017년, 그 선언은 마지막 한 편을 더 만들고 은퇴하겠다는 하야오 본인의 발언으로 번복되었다. 그 사이인 2015년, 지브리의 주요 인력이 빠져나가 '스튜디오 포녹'을 설립했다. 다시 2017년, 하야오는 제자들이 설립한 스튜디오 포녹의 첫 작품 <메리와 마녀의 꽃>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메리와 마녀의 꽃>은 정식 후계자가 아니지만 후계자이기도 하다.
<메리와 마녀의 꽃>을 제작한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은 지브리를 재건하되,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한 후, 숱한 지브리의 팬들이 <메리와 마녀의 꽃>에 아쉬움을 표했다. 하야오와 히로마사 사이의 어중간함이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히로마사 감독이 차기 지브리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왕위 계승은 지브리의 해체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되었으나, 그간의 가르침으로 지브리를 재건할 힘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 지브리도 변하긴 해야 했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지만 새로운 힘을 주기도 하니까. 지브리는 이미 2014년의 <추억의 마니>를 통해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입장에서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스튜디오 포녹이 그러한 변화를 이어받았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지브리의 기조를 이어받았고, 변화할 때가 되었으니 <메리와 마녀의 꽃>에 실망하긴 이르다. 이 글로 <메리와 마녀의 꽃>을 보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려 한다.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곁들인다.
▲영화 <메리와 마녀의 꽃>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스튜디오 포녹을 맛보다
히로마사 감독의 전작 <추억의 마니>(2014)는 어중간했다. 아이가 봐도 좋고 어른이 봐도 좋던 지브리 성향과 달랐다.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어려웠고 어른이 보기엔 난해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건 <메리와 마녀의 꽃>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아이들이 보기에 무난하고 어른이 보기엔 너무 어리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리와 마녀의 꽃>은 지브리를 벗어나 포녹에서 만들어졌으니 앞으로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시 말해, 새 출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튜디오 포녹에게서 지브리의 그림자를 지워내야 한다. 지브리와 포녹은 별개의 스튜디오다. 포녹을 지브리의 후계자로 가정해버린다면 아쉬운 점이 많다. 반대로, 지브리의 새 출발로 여긴다면 즐거운 점이 많다. 스튜디오 포녹 측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브리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를 통해 사용했던 마녀 모티브를 포녹에서 다시금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인 즉슨 <천공의 성 라퓨타>의 스팀펑크나 <이웃집 토토로>의 시골도 다른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가 포녹에게서 지브리의 그림자를 지워낸다고 해도, 그들이 지브리의 그늘에 있는 건 변함이 없다. 그들이 지브리를 뛰어넘어도, 지금처럼 살짝 아쉬워도 선배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지브리의 팬이었던 우리가 포녹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뿐이다. 'Merry Go round' 포녹의 첫 캐릭터 메리의 앞날을 축복하며.
<메리와 마녀의 꽃>은 친절하다. 지브리가 극장에 온 가족 누구라도 만족할 영화를 만들었다면, 포녹은 순수하게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든다. 지브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었다면, 포녹은 '보이는 게 전부'다. <메리와 마녀의 꽃>의 서사는 기본 중의 기본을 밟아 나간다. 선과 악이 명확하고, 주변 인물은 전개를 위한 도구로 취급된다. 관객 대부분은 자녀와 함께 관람할 테니 어찌 됐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자녀만 만족하면 부모는 그것으로 큰 행복을 얻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단순한 것이 베스트일 때도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라바>나 <빼꼼>은 말할 것도 없고, 극장에선 <미니언즈>가 당신을 유혹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잘해주거나 못 해주는 이유가 확실하다. 가면을 쓰고 서로 대하는 직장인들에게 그러한 단순함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어른이 되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체 막연히 혼나게 된다. 억울한데 감정을 토로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떼를 써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떼를 쓰는데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드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아이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듯, 어린아이들은 '빙봉'과 같은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 혼자서도 재밌게 놀곤 한다. 그 상상 속에서 개연성이나 책임의 무게 따윈 없다. 꿈속에서, 당신이 사표를 내자마자 로또에 당첨되는 것에 이유는 없다. 한마디로, 아이들 영화는 아이들 눈높이에서 보아야 한다.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지는 몰라도, 막상 해보면 즐겁다. 생각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긍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당신은 현실에서 짊어진 무게를 벗고, 타인의 시선에 벗어나 스크린 위의 마녀가 된다.
▲영화 <메리와 마녀의 꽃>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가장 순수한 상태
지금부터 당신은 어린아이다. 다섯 살 무렵이라 가정하자. 당신의 눈에 메리가 어떻게 보일까. 메리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다. 그녀는 당신보다 나이가 많고 성숙해 보인다. 메리는 갑작스레 큰 힘을 얻어 출세의 길을 걷다가, 거짓이 들통 나 주변 사람을 위기에 빠뜨리고 만다. 이때, 당신은 메리를 보며 크게 실망하게 된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메리의 모험담은 일종의 성장통이다. 아이들은 점점 커가며 현실을 자각하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사회의 차가움에 내던져진다. 당연히 메리보다 어린 아이들은 실패란 걸 경험해본 적 없다. 뭐든지 부모가 대신해주니까. 그런데 영화에서 메리는 매번 실패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열등감에 가득 차 있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그런 메리가 인정받는 건 아주 우연한 기회로 얻어진 재능에 빗자루가 결합한 결과다. 그야말로 우연에 우연이다.
그러니까 아이들 입장에서 메리의 존재는 정말로 판타지다. 그들로서 보호받는 건 무척 당연한 일이고, 메리처럼 내쳐진 상황은 상상도 못한다. 그것을 어른 식으로 해석해보면, 살면서 돈 걱정 안 해본 금수저가 우연하게 서민의 삶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에게 보호란 돈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메리의 모험담은 자본의 획득을 통한 계급상승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메리가 원하는 건 주변으로부터의 '인정'이다. 인정받을수록 어른들의 눈에 띄어 더 많은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정'이란 계급상승을 뜻한다. 회사로부터 성과를 인정받아야 승진하고, 이성에게 인정받아야 연애할 수 있다.
메리와 하늘 위의 것
▲영화 <메리와 마녀의 꽃>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하늘 위에 떠있는 마법 대학에서 <천공의 섬 라퓨타>를 떠올렸을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 영화나 이 영화에서도, 하늘 위로 날아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간다는 건 명백하게 상승의 이미지다. 메리는 야간비행 꽃을 통해 일시적으로 마녀가 되고,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로또 맞았다'라는 표현으로 정리된다. 갑작스레 생긴 돈이 메리를 저 하늘로 인도하고, 그곳에서 메리는 난생처음으로 인정받는다. 돈이 있어야만 인정받고, 그게 곧 마법이라는 뜻이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붉은 머리 혈통은 무조건 우등생…". 이러한 말들은 메리를 붕 뜨게 한다. 우연히 얻은 재능이 가히 천재 급이라는 건, 로또 중에서도 '대박'이라고 지긋이 암시해준다. 하지만 이 글은 <메리와 마녀의 꽃>을 통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는 의도가 없다. 우리가 정말로 알고 싶은 건, 인간의 욕구가 살아가며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며 사회에 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어렸을 때부터 '계급 상승'과 같은 욕구를 품고 있던 것이다.
메리의 손에 깃든 마력은 일회용이다. 꽃을 짜서 즙을 바르면 마녀가 된다. 작중에서 메리는 그 과정을 세 번 정도 반복한다. 이것은 사실 아주 무서운 일이다. 없다가 있으면 좋은데, 있다가 없으면 무척 허전하기 때문이다. 계급의 상승과 반복, 거기에 자신을 '하락'하게 만든 마녀대학에 다시금 발을 디뎌야 한다. 그래서 메리가 처음으로 하락한 그 순간부터 이 영화는 더는 판타지가 아니다. 그건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강의 판타지, 메리와 마녀의 길
그런데 메리는 하강을 반복하며 점점 행복해진다. 타인에게 인정받지 않고도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낸다. 메리는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능동적 사고의 길을 찾는다. 아주 흔한 자기 성장담에 불과한 이야기, 그런데 어떻게 하강하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하강이라고 한다면 '추락'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이카루스는 신에 호소하기 위해 상승을 거치나, 곧 강제적인 하강을 겪는다. 그리고 그는 죽는다. 즉, 우리 사회에서 추락은 곧 죽음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하강의 판타지를 펼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강은 구원의 길이다. 기독교의 구원자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서 현재의 지금으로 온다. 하지만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것을 뒤집어 구원자의 존재를 상정한다. 그는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부터, 지금 이곳에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과거 어딘가에 뿌려진 구원자의 형상이 지금의 '우리를' 미래로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희미한 구원자의 형상을 느끼곤 한다. 행복한 미래로 이끄는 힘은, 이미 우리 주변 어딘가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메리가 야간비행 꽃과 빗자루를 얻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자. 오래전 어느 마녀가 훔쳐 달아난 씨앗과, 그녀의 추락으로 남겨진 빗자루다. 그녀는 타락한 마법 대학을 구원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하강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녀는 하강 후에 다시금 날아가지 못한다. 그녀의 구원은 그것으로 제 역할을 마친 것이다. 그리고 메리를 보라. 메리가 반복하는 하강이란 그녀, 혹은 그녀가 사는 마을에 뿌리는 구원의 손길이다. 메리는 상승과 하강의 어딘가에서 고민하며,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은 야간비행 꽃을 저 아래에 버려버린다.
▲영화 <메리와 마녀의 꽃>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구원자는 사람들에게 기적과 미덕을 전파하려 하강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자는 사람들의 고통과 업보를 대신 짊어지고 다시금 상승한다. 그래서 메리는 하강을 통해 성장한다. 꽃을 가져와야 피터를 살려주겠다던 마법대학 총장의 말은, 피터가 실종되어 온 마을 사람이 숲을 뒤지고 다니던 것을 상기시킨다. 그녀의 문제는 피터의 문제고, 피터의 문제는 마을의 문제다. 메리는 아주 우연하게, 과거 어딘가에서 주어진 사명을 통해 메시아의 의무를 대행하게 된다.
상승할 때마다 그녀의 고민은 깊어진다. 그녀의 고민은 어느 순간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이 된다. 가장 처음에 '재능 없음'에 고민하던 소녀는 '재능'에 놀라게 된다. 우연하게 일시적인 재능을 얻은 소녀는, 우연하게 그 재능의 비밀을 들키고 만다. 그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에 아무런 통제도 가할 수가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결핍을 채우고, 결핍을 내보이는 것뿐이다. 상승은 자유로우나 하강은 의무가 있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이 구원자에 대해 말했던 건 전쟁의 광기가 요동치던 20세기 초반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광기는 어느 한 사람의 의견이 모여 형성된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복잡하다. 전쟁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동시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메리는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안착'한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은 모두가 전쟁에 지쳐 광기를 멈출 신을 부르짖을 때, 그것이 개인으로부터의 과거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영화 <메리와 마녀의 꽃>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야간비행 : 활주
이 영화에서 메리는 야간비행 꽃을 가졌고, 그건 마법 학교가 인공적인 인재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메리는 이미 야간비행 꽃을 가진 상태였고, 마법 학교는 그런 메리를 '그토록 찾던 인재'로 여겨 환대한다. 구원자 메리를 환대하던 마법 학교는 오히려 그녀가 '텅 비어있음'을 알고 경악한다. 끝내, 마법 학교는 그녀의 혈투로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그것은 곧, 거짓된 희망을 구원자의 역할로 부여한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돈의 형상으로 우리를 채찍질하기도 하며, 혹은 우리가 돈처럼 매달리는 무언가에 덧씌우기도 한다. 권력이라던가 사랑과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영화 마지막에 기계장치가 폭발하는 장면이 일본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건으로 느껴졌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러한 담론을 보기 전에 어린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하강을 두려워하는데, 어린 시절엔 미끄럼틀과 같은 하강의 모티브를 즐기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