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원용숙

언제부턴가 책 읽기가 소원해지고 신문도 헤드라인만 읽는다. 작은 글씨는 여유로울 때 읽어야지 하면서 신문내용을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다. 가끔 보고 싶은 책이 있어 책장을 펼쳤다가도 얼마 못 가서 읽기를 그만둔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렸는데 반납 일을 세 번이나 연장하고 읽기를 마쳤다. 그러다 보니 활자가 있는 종이는 외면하고 유튜브 같은 짧은 영상만 자주 보게 된다. 가끔 눈에 안개가 낀 듯 흐려지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속눈썹을 닦아낸다(벼락치기 공부할 때 졸음 방지로 그렇게 했다). 그러면 글씨가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한동안 눈이 침침할 때마다 습관처럼 침을 묻혀 속눈썹을 닦아내고 책을 봤다. 시력 문제인가 싶어 남편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보니 글씨가 휘어져 어지럽다. 시력이 달라서 일수도 있지만 돋보기가 필요한 수준은 아닌 듯하다.


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왼쪽 눈에 잡티가 들어간 것처럼 눈알이 뻑뻑하고 찌르듯이 아파왔다. 집에 오자마자 그릇에 정수 물을 받아놓고 눈을 헹구니 진정된다. 며칠 지나자 오른쪽 눈마저 먼지가 들어간 듯 따끔거리며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껄끄럽다. 다시 물을 받아 눈알을 굴리면서 헹구어 내니 통증이 가라앉는다. 물에 뭐라도 나온 게 있는지 살펴봤지만 잡티 하나 없다. 혹시 백내장이 아닐까?


아무래도 안과 검진을 받는 게 나을 거 같아 예전에 갔었던 안과에 갔다. 기록을 보니 13년 전에 왔었다. 그동안 받아왔던 직장 건강검진에서는 시력검사만 했다. 나에게 통찰력을 발휘하게 하는 조력자 눈을 이렇게 소홀하게 대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에 대한 관찰이 엉망인데 누구를, 무엇을 알 수 있다고 하겠나 싶어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간호사가 눈 검사실로 안내한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한쪽 눈을 가리개로 가리게 하더니 작은 숫자 네 개를 내보인다. 세 개는 또렷이 읽을 수 있으나 마지막 한 개는 헷갈린다. 나머지 한쪽도 마찬가지다. 간호사는 두 번 묻지 않고 왼쪽 오른쪽 1.0이라고 한다. 소수점 아래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의사도 자신의 눈이 나이 먹는 걸 막을 수 없나 보다. 예전보다 안경알 도수 줄이 더 많아졌다. 의사는 나의 윗눈썹을 뒤집더니,

“오른쪽에 혹 하나, 양쪽 눈 각막 손상이 심합니다. 혹은 제거했고, 렌즈 3일 끼고 약 넣으세요. 눈에 물이 들어가면 렌즈가 빠지니 조심하세요.” 한다.


각막이 찢어졌다고? 그것도 심하게 찢어졌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됐다.

“왜 찢어졌을까요?”

“잠이 부족하거나 책 같은 걸 많이 보면 손상이 옵니다.”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책은 많이 보질 않았으니 수면 부족이 원인일 수 있겠다. 유아기 손주를 일 년 동안 돌봤으니 잠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눈이 흐릿했거나 통증이 있었던 건 각막손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상처 난 눈에 계속 침만 바르고 비벼댔으니 각막 손상이 더 심해질 법도 했다. 삼일 약을 먹고 다시 병원에 가니 다 나았다고 한다. 그러나 글씨는 여전히 깨끗하게 보이질 않는다. 의사한테 안경을 써야 하냐고 물으니 아직 쓸 필요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글씨는 잘 보이다가 이중으로 보이다가 몸 컨디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차라리 안경을 쓰는 게 삶의 질이 나아지겠다.



그동안 돋보기안경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지금 안경을 쓰면 영원히 안경에 의존하게 될까 봐 두려움이 있었다. 무언가에 의해 내 자유의지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불행해질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제 위치에서 당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해왔던 눈을 새삼스레 들여다보고 어디가 고장인지 파고들면 없던 병도 생기겠다 싶었다. 보는 일에 있어서 지금까지 어떤 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기에 눈에 걸치는 안경은 다분히 액세서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안경의 편리함보다 불편함에 치중하고 있자니 점점 안경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 비나 눈 올 때 김 서림을 어떻게 할 것이며, 매번 몸에 지녀야 하고 자주 잊어버리기도 할 테고, 시력은 회복되지 않고 점점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더 거부반응이 드는 건 돋보기를 쓰는 순간 시력이 좋았던 내 안의 청춘과 영원히 결별할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자애로운 할머니 상징처럼 코에 안경 걸친 내 노년의 모습조차 그리 유쾌하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동안 감각적 즐거움을 얼마나 추구했었던가? 맛있는 거 먹기, 좋은 음악 듣기, 재미있는 영화 보기,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오감으로 느꼈던 즐거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감각기관이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는 건 살아있음과 동시에 몸이 건강하다는 증표다. 그동안 아무 거리낌 없이 오감각을 잘도 사용해 왔다. 그중에서도 눈은 사물의 실재를 쉽게 통찰할 수 있는 기관이다. 그걸 보완해 주는 섬세한 도구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체들을 확인할 수 있는 현미경이나 망원경은 궁금한 게 많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던가. 이런 도구 사용이 의학이나 과학 또는 인류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몸에 안경 하나 걸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을 받아들이고 엄살떨지 말자.

패션의 완성은 안경이라지만, 멋짐이 아닌 생존을 위한 돋보기안경을 샀다. 진열장 안에는 비싸고 예쁜 안경테가 많았지만, 도수가 가장 낮은 안경을 만 오천 원에 골랐다. 붉은 자주색 테두리 안경이 맘에 든다. 거울 앞에서 안경 쓴 내 모습을 본다. 안경을 벗었다 썼다, 머리에 걸쳐도 본다. 콧등에 올려놓으니 만화 속 호호 할머니 같다. 지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소설 속 나이 든 비사감 얼굴은 아니다. 무엇보다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니 살 것 같다. 그동안 안경을 불신하고 거부했던 내 몸은 금세 새로운 보조도구에 적응하며 기뻐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TV나 컴퓨터, 핸드폰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의 눈을 갈수록 흐리게 만들고 있다. 육체의 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마음의 눈일 것이다. 애써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아래 배에 숨을 깊게 들여 마셔본다. 그동안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작은 사물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 눈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새해에는 안경과 더불어 한 편으로 기울지 않은, 균형 있는 시각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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