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 아리아드네, 비트겐슈타인
미궁적 인간은 결코 진리를 찾지 않는다. 겉으로 무엇이라 말하든, 그가 찾는 것은 아리아드네 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미로/미궁에 대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은 "갈림길과 막다른 골목으로 이루어져서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물"이다. 이와 같이 당사자의 결정으로 인해 경로가 바뀔 수 있는 것은 미로(Maze, 독어 Irrgarten)로, 비교적 후대의 발명품이다. 미로 연구자 헤르만 케른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발견되며,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로/미궁의 의미는 이처럼 방문자로 하여금 길을 잃도록 만드는 특성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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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미궁(Labyrinth)의 원형은 유럽 최초의 고도문명인 크레타 문명 (기원전 2600-1450년)과 연관지어 등장하는 것으로, 이 구조물에서는 길을 잃을 여지가 없다. 방문자는 정해진 구획 내에서 중심에 이르는 가장 긴 거리를 돌아가야 하며, 중심에 이르는 것과 동시에 발길을 돌려 다시 나오게 된다 (나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대단히 다르다. 그런데 왜 미로/미궁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물"이라는 의미가 붙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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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기록을 조금 살펴보자. 로마 역사가 플리니우스는 최초의 미궁이 이집트에 기원을 두고 있고, 크레타 미궁은 이것을 본따 만든 것이라고 서술한다. 헤로도토스도 직접적 여행경험에 근거하여 이집트 아메넴헤트 왕의 무덤을 미궁의 원조격으로 보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도 이미 유명한 관광지였던 모양인 이 이집트의 건축물은 지상 1400개, 지하 1400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연구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무덤으로만 쓰였던 이 건물에는 방문자를 안에 가두려는 의도도 없고, 유적으로 추정해볼때 크레타 미궁의 단일경로 원형과의 구조적 유사성 역시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미로/미궁의 구분이 희미해진 후대의 의견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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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의 (희랍어 Labyrinthos)의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크레타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하는 Labrys "양날도끼"를 그 기원으로 보았다.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에 양날도끼 장식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헤르만 케른은 이러한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지적하며 (양날도끼의 크레타어 발음은 완전히 다름) -inthos로 끝나는 어미상 인도게르만 계열의 어원이라는 사실, 확인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암석, 돌"과 의미적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미궁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더 이상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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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미궁이 고대 유럽의 독자적인 문화적 상징물이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일어난 유럽 문명은 진공으로부터 홀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지중해 근처에서 융기했던 거대한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의 다른 고대문명들이 오랜 시간 축적한 지식과 문화를 전수받아서 발흥했기 때문이다. 오랜시간 그리스 문명의 발명품이라고 생각되었던 천문학, 수학적 지식 등은 물론이고, 문자, 신화와 전설, 정치체계까지 그 기원을 찾아보면 명백한 수입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문명권의 전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크레타의 미궁에 얽힌 문화적 컨텐츠는 타문명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미궁을 둘러싼 상징체계는 그리스 전승 내에서는 테세우스 전설에 가장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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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은 두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플루타르코스가 서술한 버전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보았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포세이돈이 제물용으로 내려준 황소를 탐하여 제물로 바치지 않고 스스로 취했다. 이에 진노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 왕비가 황소를 향한 광적인 애욕을 일으키도록 한다. 파시파에 왕비는 전설적 장인이자 예술가인 다이달로스를 사주하여 암소 모양의 나무틀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서 신성한 황소와 결합하고 만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이다. 다이달로스는 이번에는 거대한 미궁을 설계하여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버린다. 이 미궁은 어찌나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였는지, 다이달로스 자신도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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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테네는 문화적-정치적 패권세력인 크레타에게 9년마다 7쌍의 젊은 남녀를 조공으로 바치고 있었다. 이들은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산제물로 바쳐지는 끔찍한 운명이었다. 마침 갖은 모험을 겪으며 아버지 애게이스 왕에게 돌아온 테세우스는 자원해서 마침 인신공양을 목적으로 크레타로 떠나는 배에 오른다. 애게이스 왕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는데 성공했다면 돌아올때 흰돛을 달아서 알리고, 실패했다면 출발할 때와 같이 검은 돛을 달라고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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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는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와 사랑에 빠져서, 그녀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녀는 칼 한자루와 실타래를 주면서, 미궁의 입구에 실을 묶어두었다가 반대로 길을 찾아서 나오라고 알려준다. 그 말대로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미궁을 빠져나온다. 승리하고 아테네로 돌아오는 길 낙소스 섬에 이르러,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 신의 부인이 될 것'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껴 그녀를 이 섬에 버리고 떠난다. (전승에 따라,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실제로 부인으로 맞는 버전도 있다) 델로스 섬에 이르러 테세우스는 아프로디테의 신상을 세우고는, 동료들과 함께 '미로에서 빠져나오던 움직임을 재현하는 춤'을 제단에서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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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로 돌아오는 길에 기쁨에 겨운 일행은 흰 돛으로 바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검은 돛을 보고 절망한 애게이스 왕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버린다. (그래서 그 바다의 이름이 에게해가 되었다고 한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새로운 왕이 되고, 정치체제를 민주정으로 개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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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은 역사적 서술이 아니다. 게다가 테세우스 전설같은 경우에는 너무 오랜시간 동안 다층적인 정보와 의도가 혼합되면서 형성된 것이어서, 원래의 메세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원형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사건과 최초의 기록 사이에 최소한 1000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몇가지 면모만 선택적으로, 조심스럽게 해석해보도록 하겠다. 첫번째는 미궁의 구조에 대한 것이다. 글의 도입부에서 설명한 (단일경로) 크레타 미궁 형태는,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던 궁전의 형태일 수 없다. 하나의 길로만 이루어졌다면, 천재 장인 다이달로스가 스스로 만든 미궁을 빠져나오는데 어려움을 겪었을리도 없고, 미노타우로스를 가두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리아드네의 실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곳 (미궁의 중심)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단일경로 형태의 미궁은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경험한 미궁의 형태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델로스 섬에 이르러 일행이 미궁 탈출 경험을 춤으로 승화시켰다는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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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스 섬에서 전승되며 "학춤"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전설적인 춤은 (테세우스 역할 + 14명의 탈출자들= 총 15명) 참가자들이 일렬을 이루어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형상화하는 춤이었던 듯하다. 플루타코스 시대에는 아직 이 춤이 델로스 섬 제전의 일부로 남아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1920년대 남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민속춤에서도 이와 같은 계열로 추정되는 춤 형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승, 그리고 실제로 크레타에서 미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구조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미궁은 애초부터 춤이었다"는 케레니Kerenyi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고대부터 주술적/제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던 춤의 형태가 상상의 건축물의 형태로 변환되어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견해다.
대략 기원전 1450년까지 지중해의 패권국가였던 크레타에서 미궁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다. 가장 명료한 예로, 크레타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주화들에는 미궁의 도식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한국의 국기에 태극문양이 있는 것에 비할수 있을 듯 한데, 한 문명의 철학적/의미론적 핵심이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궁의 최초형태가 춤이었는지 건축이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마찬가지로 크레타 섬의 동굴이나 크노소스 성을 미로의 원형으로 보는 것에도 "미궁의 건축적 원형을 찾으려는" 무익한 노력일 수 있겠다. 미궁은 한 문명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깨어나는 인간이 세계와 조우하며 빚어낸 자기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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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미노타우로스 신화는 지중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 섬의 승패와 성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400년을 기점으로 (몰락에 가깝게) 쇠락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화산 폭발, 해일 등이 거론된다. 그 전까지 크레타 문명에 군사적/문화적으로 짓눌려 있던 아테네 문화는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크레타를 군사적으로 압도하고 문화적으로 흡수하면서 성립한 것처럼 보인다. 황소를 섬기는 크레타 문명이 아테네 귀족자제들을 볼모로 삼았던 역사적 사실이, 아테네의 입장에서는 황소머리를 한 괴물로 코드화되어 기억되었을 여지가 농후하다. 헤르만 케른은 인질로 잡혀가 있던 아테네인들이 크레타의 의식 중 하나인 - 극도로 위험한 - 황소 뛰어넘기에 참가하도록 강제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부녀자를 취했다는 사실은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귀국하는 사실에 나타나며, 신성한 미궁-춤을 전수받아 돌아온다는 이미지는 타문화를 수용하고 융합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전설 속에서, 미궁-춤의 개발자는 미노스 왕을 섬기던 다이달로스다) 이렇게 보면, 미궁을 뚫고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는 서사는 정치적으로 아주 단순한 메세지를 던진다. 억압자 크레타의 문화적 심장(미궁)을 간파하여 그들의 신(황소)를 처치했으며, 부녀와 문화를 취했고, 이는 아테네 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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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으로는 미궁의 진짜 의미가 전부 간파되지 않는 듯하다. 미궁이 본래 손을 잡고 하나의 사슬을 이루어 추는 의식적 춤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미궁이 크레타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제아무리 길을 잃고 헤매고, 같은 길을 맴돌고, 막다른 골목에 수십번을 도달하며 절망했더라도 - 결국 미궁을 탈출한 자의 시각으로 보면 미궁경험은 결국 실타래 하나, 하나의 선형적인 서사로 설명될 수가 있다. 어쩌면 이것이 아리아드네 실타래의 의미이다. 인간의 이해와 힘을 초월하는, 복잡하고 위험한 현실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방법은, 그것을 하나의 실로 관통하여 추상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며, 이성의 힘이며, 문자의 힘이다. 언어와 이성은 희랍어로 같은 말로, 이것이 바로 로고스Logos이다. ("텍스트Text"의 본 뜻은 직조물, 즉 실을 엮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렇게 바라보면 미궁의 서사는 문자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의 탄생에 관한 서사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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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이후로 수많은 고대문명이 있었지만, 오늘날 세계의 모습에 가장 중심적이고 비가역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다. 우리는 그리스식 공부를 하고(과학, 철학), 그리스식 원형 경기장에서 경기를 보고, 그리스식 비극과 희극을 보고, 그리스식 정치제도에 따라 나라를 운용한다. 고대 그리스 정신에는 무슨 특별한 요소가 있어서, 바빌로니아, 이집트, 이스라엘, 중국 문명 등 여타 고대 문명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문자체계, 정확히 말하면 문자체계를 바라보는 그리스인의 시선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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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크레타 문명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크레타 문자가 발견된다. 아르툰Aartun에 따르면 고대 크레타 문자는 이집트 상형문자 계열의 상형문자(음절문자)이다. 이는 후대의 그리스 문자가 페니키아 계열 표음문자라는 점과는 대비되지만, 지중해 최초의 문자체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문화적 패권이 크레타에서 아테네로 옮겨갔다는 역사적 사건은, 미궁(의 주인)을 파괴하고 그 핵심(춤)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전설에서 나타난다. 그리스인에게 비춰진 미궁은 위험한 것, 끔찍스러운 것이지만, 크레타인 자신이 바라본 미궁은 문명의 상징 그 자체이다. 그리고 문자체계와 함께 부여받는 문명의 힘은, 세계의 선형적 해석과 관리에 있다. 그리스 신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담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를 보면, 어떠한 구분도 없는 순수한 혼돈에서 옛 신들 (티탄)과 새로운 신들 (올림포스 신들)이 차례로 태어나면서 무질서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문명이 일어나는 과정, 인간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는 과정도 이와 같아서, 본질적으로는 무질서의 정돈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있다. 그 첫번째 정점은 문자의 발명이다. 본래 세계에는 아무런 방향이 없다. 개념과 사상의 발전과 함께 세계에는 서서히 방향성이 부여된다. 하늘-땅의 구분은 가장 원초적이다. 이어서 농경생활과 연관된 천문관측을 통해서 동서남북의 구분이 생겨나서 공간을 세부적으로 분할한다. 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시간의 분할, 즉 선형적 시간관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문자의 발명이 필수적이다. 일개 개인의 기억력을 뛰어넘는 안정적인 기록술이 존재해야만 역사적 관념이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형태를 얻은 후에야 과거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언어를 문자화(루만의 표현을 따르면 "디지털화")하면서 생겨나는 역사/시간의 선형성은 깨어나는 초기문명에 엄청난 안정성을 부여한다. 크레타 미궁의 단일경로 형태, 즉 선형성은 이런 문명의 핵심 면모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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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이 없던 세계는 문자와 함께 선형화되었다. 문자의 선형성은 세계 자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고 해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문명 그 자체의 상징으로 읽은 미궁의 의미는, 세계와 대등한 입장에 서서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자연에 압도 당한 채로 존재를 영위해왔다. 전설에 대입하면, 그런 "야만"의 상태는 아직 짐승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미노타우로스-인간이 미로 속에 갇혀있는 상태에 해당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식인)도 제어하지 못하고, 자연도 제어하지 못하여, 끝없는 어둠(지하) 속에서 길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한줄기 빛과 같은 이성-언어라는 도구로써 미궁을 헤쳐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빛은 실타래의 형태를 하고 있다. 자연이 강대하기는 하지만, 인간 내부의 어두운 욕구와 인간 사회의 복잡성은 그것을 정돈하고 관리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항상 다시 꺾어버리곤 하지만, 우리가 끊어지지 않는 실과 같은 이성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상황을 극복할 것이다. 몇천 행에 달하는 서사시처럼, 수만 두루마리에 달하는 과학의 체계처럼, 끊어지지 않는 토론과 사유처럼, 문자와 이성과 기억의 바른 길을 따라가라! 이것이 크레타에서 그리스로 전수된 미궁의 의미다. 이토록 명료하게 이성/문자를 도구적으로 바라보고, 이처럼 가차없이 세계를 해석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그리스 문명이 유일하였다.
미궁을 문자와 이성에 대한 신화적 상징으로 읽는 것으로 수수께끼가 전부 풀리는 것은 아니다. 아직 크레타 미궁의 특별한 형태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다. 미궁에 들어가는 자는 들숨-날숨이 이어지듯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서 중심점을 향해 걸어가다가 이내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결국 중심에 이르면 안과 밖, 앞과 뒤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한다. 미궁의 이러한 경험구조는 입교 의식이나 성인식의 구조를 닮아있다. 즉, 크레타 원형 미궁구조의 핵심은 내부와 외부의 비밀스러운 연결이며,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자기변화이다. 많은 학자들이 미궁의 구조를 내장, 특히 자궁과 연관지어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미궁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죽음-재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농경사회의 문맥에서 보면 계절의 순환과 대지의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만, 철학적-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인식의 전환을 통한 진리경험을 뜻한다. 미궁구조가 (변형된 형태로) 중세 기독교에서 명상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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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을 끝까지 걸었다가 나온 자는 새로 태어난 자이며, 안과 밖이 뒤집힌 자이다. 그가 이런 변화를 쟁취하는 길은 단순반복과 목적없는 이동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명상적이다.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되는 것, 즉 시선의 역전이다. 철학적/종교적 진리는 어떤 명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모두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철학적 의미에서는 조금의 진보도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부터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에 의지해서 논점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니체, 하이데거와 함께 비트겐슈타인은 근대에서 미궁의 전통을 가장 잘 전수해 받은 철학자라고 보인다.) <논고>시절의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든 가능한 학문적 질문들의 해답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의 문제들은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질문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나, 바로 이것이 해답인 것이다. (논리철학논고 6.52)
(그리스 문화의 정수이기도 한) 철학은 미궁에 들어갔던 테세우스가 그 혼돈과 승리의 경험을 되살리는 기술이다. 시대에 따라, 철학자의 성향에 따라 미궁의 재료와 위치와 깊이는 달라지지만,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온다는 점, 그리고 그 경험이 변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는 항상 같은 서사적 틀에서 펼쳐진다. 이런 면에서 미궁은 인간의 원초적 무지에 대한 비유이다. 철학의 기술은 "길을 잃고 다시 찾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문제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일이다. 철학자는 미궁에 들어가는 자에게 실타래를 쥐어주며, 그런 의미에서 아리아드네이다. 케임브리지로 돌아간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철학 수업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나 스스로나 청중을 물에 빠뜨린 다음에 다시 건지면서, 구조하는 법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우아하지만은 않다. 가끔은 청중을 물에 던져넣는 일이 잘 되지 않아서, 물가에 닿지도 못한채 바닥에서 청중을 이리저리 굴리고만 있을 때도 있고, 가끔은 일단 물에 던져넣었지만 다시 건질 수가 없어서, 익사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기도 한다. (1930년 10월 25일, 학기 중의 일기)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행위"(논고 4.112)이기 때문에, 여타 지식처럼 체계적으로 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테세우스 전설에 빗대어 표현하면 철학은 어떤 원형적인 체험의 전승이다. 위협적이고 괴물적인 혼돈에 맞서면서 이성의 끈을 직조해낸 위업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전통에 접속하는 일이기도 하고, 직접 미궁과 탈출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의미에서, 철학은 안내자와 함께 하는 연습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아리아드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끔, 그는 미궁을 집처럼 여기면서 사는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그에게는 어둠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철학을 할 때에 우리는 오래된 혼돈 속으로 내려가야 하며, 그곳을 편안하다고 느껴야 한다. (VB 542)
좋은 철학자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는 달리, 바깥세계의 빛을 본 뒤에 동굴로 돌아갔다가 옛 동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정도로 서툴지는 않다. 비트겐슈타인이 능숙하게 안내하는 혼돈의 이름은 언어다.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매일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를 이해하고 정돈하려고 하는 순간,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궁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스스르 꿈에 빠지듯이 우리는 경계선을 넘고, 어느새 철학적 문제들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철학적 문제가 가지는 형태는 '길을 잃었다'이다"(탐구 123번)
철학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우리가 대상을 한 눈에 보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때 겪는 어려움은 마치 모르는 나라에서 지도가 없거나, 고립된 몇몇 장소들에 대한 지도만 가진 채로 지리를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길들의 연결로만 파악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나라는 언어이며, 지리는 그 문법입니다. 우리는 별 문제 없이 이 나라를 돌아다니다가도, 갑자기 지도를 제작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합니다. (강의록, 1933년 10월)
우리는 철학적 문제가 일어나는 전형적인 장소 - 일상언어 - 자체의 구조가 미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의 치유 또한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반복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치유의 장소, 미궁은 갈등이 소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위의 "수영을 가르치는" 1930년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아직 대가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나, 그의 건축가적 면모는 곧 미궁의 건축으로 이어진다. 정확한 교육적-치유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 비트겐슈타인=다이달로스는 1929년부터 1951년까지의 만년의 사유를 <철학적 탐구>라는 유례 없는 미궁체계을 건설하는데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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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론가들이 <탐구>에서 언어이론을 도출하려는 헛된 시도를 했으나, 사실 <탐구>의 텍스트는 거대하고 정교한 모형 정글이자, 철학적 생존술을 익히기 위한 훈련장이다. 그곳에서 독자가 만나는 모든 질문과 해답은 너무나 진짜처럼 보여서 숨돌릴 여지 없이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기게 하지만, 사실 전부 모형일 뿐이다. 미궁의 환상성은 세계/언어 자체의 환상성에 눈뜨게 해준다. 이것이 "미궁 탈출의 경험"을 비트겐슈타인이 전수하는 방식이다.
언어는 모두를 위해서 똑같은 덫을 쳐놓았다. 이는 잘 보존된/통행이 용이한 잘못된 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망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두들 똑같은 방식으로 길을 가는 모습을 보며, 똑바로 가야하는 곳에서 길을 꺾거나, 길이 꺾어지는 곳을 알아채지도 못한채 똑바로 나아갈 것 등등의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잘못된 길로 들수 있는 모든 위치마다 표지판을 세워서, 위험한 부분들에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TS 213, S. 423)
우리는 걸어가다가 어느 순간, 미궁 속에 갇혀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어린시절 부드럽고 유연했던 현실은 어느덧 개념과 관념의 단단한 장벽으로 분절되고, 진리로 향하는 길은 단절되어 있다. 미궁의 중심에 가닿는다면, 내 마음을 찢어버릴듯 잡아당기는 이 낯선 힘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의 길은, 마치 미로처럼, 끊임없이 갈래를 뻗치며 이어지며, 결코 중심으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심=진리를 향하려는 마음마저도 또다른 갈래를 치면서 "진리에 대한 이론"만을 부글거리는 거품처럼 만들어낼 뿐이다. 하나의 머리를 치면 두개의 머리가 자라나는 히드라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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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하나의 의심을 맡긴다. 이 의심의 이름은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이다. 이 의심을 이해하게 되면, 모든 문제, 모든 생각을 "이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형태로 치환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기술이고 방편이어서, 진실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라고 부를만하다.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가 나를 옥죄어 온다면, 나는 사색과 공포에 빠지는 대신에 "'죽음'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받아칠수가 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만이 아니라 예리한 칼도 주었음을 상기하자. 사실 실은 칼이기도 하다. 한쪽을 잇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끊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나의 강력한 의심의 힘으로, 모든 이론과 개념의 함정을 끊어버리면서 우리는 미궁을 걷게 된다. 이제 미궁에는 하나의 방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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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비트겐슈타인이 구축한 미궁의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아무런 답도 없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노타우로스도 없다. 그곳은 길이 끝나는 곳이다. 걸어온 모든 길이 뒤집히는 곳이다. 지금까지 쉴 틈없이 쪼아대며 날아들었던 온갖 날개 달린 문제들, 모든 가시돋친 개념들이 보잘것 없는 벌레들로 변하는 곳이다. 그것은 잠깐 평화의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진정한 발견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철학함을 멈출 수 있도록 해준다. - 철학을 고요히 잠재우고, 더 이상 스스로를 의심하는 질문들의 채찍질을 받지 않도록 해준다 (<탐구>, 133번)
미궁에서 나올 때, 우리는 춤을 추는가? 물론 환희의 춤을, 기억의 춤을, 정화의 춤을 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미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계속해서 중심에 도달했다가 다시 변방으로, 길이 구불구불한 곳으로 나오기를 반복해야한다. 다른 사람에게 실타래를 쥐어줄 수 있는 지혜가 쌓일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테세우스가 아테네로 돌아간 이유,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로 돌아간 이유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