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하루, 순천 선암사

by 무아


* 웹 매거진 LiiS에 기고 중인 아티클입니다. 원문은 LiiS 웹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안녕하세요. 템플스테이를 핑계로 절밥 먹으러 가는 에디터 B예요.


학창 시절 현장학습을 간다고 하면 으레 사찰 방문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꽤 흔한 코스였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절을 둘러보는 것보다 돌탑 쌓기에 더 진심이었어요. 누가 더 높이 쌓나 경쟁까지 했으니까요. 할머니 손 잡고 갔을 때도 아마 비슷했을 거예요.


그때는 몰랐어요. 몇 년 후에 제 발로 절밥 먹으러 가게 될 줄은요. 이번 글에서는 첫 템플스테이를 경험했던 선암사를 소개하려 해요.





단아한 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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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에 자리한 선암사는 천년 세월을 품은 고찰이에요. 태고총림으로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왔고 2018년에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어요.


주차장에 내려 천천히 산길을 오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승선교(보물 제400호)예요. 무지개 모양 홍예교는 다른 사찰에도 있지만 강선루와 함께 바라보는 승선교의 모습은 특히 인상 깊어요.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단정함인데요. 크지 않은 규모지만 오래된 매화나무와 굽은 소나무,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해우소와 어우러져 선암사만의 고요한 풍경을 만들어 내요.



해우소, 근심을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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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 있어요. 바로 300년이 넘은 전통을 자랑하는 해우소. 전남문화재자료(214호)로 지정된 국가 유산 화장실이에요.입구에는 ‘깐뒤’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뒷간’으로 읽어요. 바닥은 아찔할 정도로 깊게 파여있어 볼일을 보면 승선교에 다다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예요.


시인 정호승은 <선암사> 라는 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고 했고,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 여행> 에서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며 언급한 곳이기도 해요. 어쩌면 이 '깐뒤'는 한국에서 가장 문학적인 화장실일지도 모르겠어요.


해우소 (解憂所), 근심을 푸는 곳. 이름 그대로 이곳에서는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비워내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봄날의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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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봄날의 선암사는 잘 가꾸어진 정원 같아요. 매화부터 시작해 겹벚꽃, 수양벚꽃, 철쭉이 차례로 경내를 물들이고, 고즈넉한 화려함 속에서 늘 단아함을 잃지 않아요.


특히 '선암매'라 불리는 매화나무는 절을 대표하는 보물이에요. 종정원 돌담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2007년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으며 수령은 350년에서 길게는 650년에 이르러요. 껍질이 벗겨지고 밑동이 드러난 모습에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해마다 굳세게 꽃을 피워내는 힘은 여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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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백매와 홍매, 시기만 잘 맞는다면 동백과 목련, 겹벚꽃까지 함께 흐드러진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을 감상할 수 있어요. 그 풍경 하나만으로도 선암사를 찾는 이유가 충분해요. 다만 때맞춰 방문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눈치싸움이 필요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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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향 가득한 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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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는 작설차로도 유명해요. 작설차는 참새의 혀처럼 작은 새싹만 골라 찻잎으로 쓰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에요.


스님과 함께한 차담 자리에서 들은 일화가 있어요.한 식물학자가 차나무 연구를 위해 뿌리째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대요. 당시 주지 스님은 흔쾌히 허락했는데 정작 학자는 빈손으로 돌아갔어요. 뿌리가 차나무 높이의 아홉 배가 넘게 뻗어 있어 뽑을 수가 없었거든요. 이처럼 깊고 튼튼한 뿌리가 선암사 차나무의 특징이라 하셨죠. 그 얘기를 들으며 마신 차는 왠지 더 깊게 느껴졌어요. 아마 기분 탓이겠죠?


차밭은 지금도 스님들이 직접 가꾸기에 쉽게 구경하기 힘들어요. 혹독한 겨울을 지나 찻잎이 얼면 수확이 줄어들기도 한대요. 꽃은 풍성하지만 차는 귀한 봄, 그래서 선암사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은 작은 호사처럼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선암사에서 하룻밤

몇 해 전 연말, 선암사에서 첫 템플스테이를 경험했어요. 새벽 예불 후 먹은 잣죽, 편백숲을 걷던 순간, 공양간에서 맛본 선암매 고추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이후 두 차례 더 찾을 정도였으니 절밥 핑계가 꼭 핑계만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사찰을 온전히 느끼려면 그저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 공간이 품은 이야기를 곱씹으며 온 하루를 보내는 것. 어쩌면 이게 템플스테이의 본질일지도 몰라요.


템플스테이는 흔히 여행이라 부르지 않죠. 특별한 체험을 기대하기보다 쉬며 자연의 호흡을 따라가는 것에 더 가까우니까요. 마음이 무거울 땐 굳이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냥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계절처럼 바뀌어 간다는 것. 숲과 절, 차와 종소리가 함께한 기억은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어져요.


다음에는 또 다른 사찰의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순간을 전해드릴게요. 혹시 모르죠. 그때는 절밥이 아니라 다른 걸 핑계 삼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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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명상까지 함께

템플스테이를 마친 후에는 차 체험을 곁들이는 것도 좋아요. 선암사에서 차담만 경험하고 돌아오기 아쉽다면, 인근 전통야생차체험관을 찾아가 보길 권해요. 멋스러운 한옥에서 차 우리는 법을 배우고 우전, 세작, 중작 같은 차이를 직접 느껴볼 수 있어요.


순천만습지 산책

조계산과 선암사의 경치를 눈에 담았다면 순천만습지로 발걸음을 옮겨보세요. 광활한 갈대밭과 나무데크 길은 명상하듯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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