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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끼장미 Jan 22. 2023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용기'

[어떻게 죽을 것인가] 리뷰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1. 저자에 대하여 / 아툴 가완디 

지은이 아툴 가완디는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버드 보건대학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건대학 교수.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 외과의이며 뉴요커지 전속 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첫 저서 <나는 고백하다 현대 의학을>은 내셔널 북 어워드 최종 후보에 올랐고, <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는 2007년 아마존 10대 도서에 선정되었으며 < 체크, 체크리스트> 역시 베스트셀러에 올라 저술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최고의 과학 저술가에게 수여하는 루이스 토머스 상을 비롯해 내셔널 매거진 어워즈를 2회 수상했고, 사회에 가장 창조적인 기여를 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맥아더 펠로십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량력 있는 사상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2015년 영국 프로스펙트지가 선정한 세계적인 사상가 50인에 선정되었다. 


2. 목차                                          

서문

추천사

독립적인 삶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무너짐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의존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다

도움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다

더 나은 삶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삵 싶어 한다

내려놓기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

어려운 대화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용기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3. 가슴을 치고 들어온 구절 

9> 마흔 다섯 살인 이반 일리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간급치안 판사로, 항상 사회적 지위에 대한 자잘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만과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가 그는 죽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아플 뿐이며, 잠자코 치료를 받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 말이다. ” 이반 일리치는 때로 어쩌면 상황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몸이 허약해지고 수척해지면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극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채 산다. 그러나 의사, 친구, 가족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일리치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아무도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통증을 겪고 난 후에 그가 가장 원했던 건 사람들이 아픈 아이에게 그러듯이 자기를 동정해 주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독거리면서 안심시켜 주기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공무원인 데다 턱수염이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나이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위안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열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식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공감하고 동정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출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 그들을 도울 준비가 얼마나 안되어 있는지를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3> 하지만 암을 완치하거나 마비를 되돌릴 수도,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수술로 삶의 질이 나빠지고 수명이 단축될 위험이 있었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되, 너무 가혹하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내 말이 그를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래서 날 포기하겠다는 거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당시 나는 라자로프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수술에 따르는 위험 때문이 아니라 수술을 받아도 그가 원하는 삶을 되찾을 확률이 없었기 때문이다. 

14> 우리가 그 앞에 놓여 있던 선택지에 대해 정직하게 이야기하기를 얼마나 꺼려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절대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몇 달에 걸쳐 그의 치료를 도왔던 의료진 모두가 그 문제를 노하려 하지 않았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그가 가장 중요한 것을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은 물론이다. 라자로프가 환상을 좇고 있었다면 의료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기 병원에 있었고, 몸 전체로 점점 퍼져가는 암 때문에 부분적 마비를 겪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단 몇 주 전에 누리던 삶 으르도 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환자가 그 현실에 대처하도록 돕는 일은 우리 능력 밖의 일로 느껴졌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지도, 환자를 위로하지도, 적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환자가 시도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치료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어쩌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면서 말이다. 

15>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18>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19> 만족감은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왔다는 데서 오기도 하지만 어렵고 난해한 문제를 기술적으로 능숙하게 해결했다는 데서 오기도 한다. 능숙함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연결괴는 문제다. 따라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환자를 만날 때만큼 정체성에 위협을 받는 때는 없다.

20> 의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실망시키는지 알 수 있다.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늙어 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정직하게 살펴보기를 꺼려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환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더 많아졌고 환자들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위로와 인식을 거부당해 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22>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3> 삶의 마지막에 이른 사람들은 차마 꺼내기 어려운 대화를 기꺼이 나눠 줄 의사와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아무도 원치 않는 창고 같은 시설에서 잊혀 갈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나이 들고 병들어 가는 과정에서 그 무엇보다 필요한 건 ‘삶에는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이다. 


독립적인 삶 – 혼자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4. 리뷰 –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을 가까이에서 마주한 경험이 없는 나에게, 죽음은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먼발치에서나마 죽음을 감지했던 것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빠를 만나러 들어갔을 때였다. 

힘없이 누워서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나는 '괜찮아요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을 건네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손을 꼭 잡고 활짝 웃어 보였을 뿐. 면회 시간을 마치고 중환자실을 나온 나는 펑펑 울고 싶었다. 하지만 무너져 내릴지 모를 친정엄마 생각에 그러지 못했다. 남몰래 눈물을 삼켰던 그때의 경험은 죽음이 어쩌면 가까이에 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뒤로 두어 차례 고비를 넘기신 아빠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셨다. 멀리 계셔서 자주 뵙지 못하지만 매일 아침 전화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는다. 특별할 것도 없는 전화통화지만 목소리를 들으며, 친정 부모님의 건강을 살핀다. 요즘은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시는지 묻는 말에 대답하시기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가끔 친정에 다녀올 때면 마지막 인사는 꼭 안아드리는데, 이제는 내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어릴 적 그렇게 넓었던 아빠의 품이 어느새 이렇게 작아지셨나 싶어 마음이 아려온다. 


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루고 싶었지만 미처 다 이루지 못한 것들, 사랑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들, 말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삼켜버린 말들, 그 많은 것들을 모두 놓아버려야 하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이루고 싶은 수많은 바람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랑해주고 싶어도 이제는 이별을 고해야 한다. 머뭇거리며 삼켰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제는 전해야 한다. 움켜쥐고 있던 이생에서의 모든 것을 죽음에게 내어주고, 저승으로 발을 옮겨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저마다에게 다른 느낌을 줄 것이다. 아쉬움이 남는 삶도 있을 것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어 여한이 없는 삶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맞이하게 될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은 나에겐 여전히 어렵다.  


 너무 오랜 시간 타인을 위해 살아온 나의 어미는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그런 어미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무너져 내리는 남편을 곁에서 지키는 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자식을 떠나보내는 일을 감당하지 못한 어미는 하루하루 허물어진다. 애처롭고 쓸쓸하게 무너지는 어미를 지켜보아야 하는 자식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어미의 삶을 갉아먹고 자란 내가 행복해도 되나 싶어 마음이 무겁고 애달픔이 커진다. 애달픔과 마음의 짐이 커질수록, 나를 온전히 세우는 일은, 내 아이를 위해서도 중요해짐을 알게 된다. 


 한동안 돌보지 못한 나를 살핀다. 기다렸다는 듯이 몸 여기저기에서 돌봐달라고 아우성이다. 어느 날은 허리가 그리 아프더니, 요즘은 두통이 지끈거린다. 운동을 시작하려니 다리는 왜 그리 또 아프던지...... 몸에 탈이 나니 해야 하는 일들도 하나 둘 내려놓아야 함을 알게 된다. 


아이 뒷바라지 조금 더 하고, 경제적으로 조금 더 안정되고, 퇴직하고 시간이 많아지면, 그때는 하고 싶은 것들 마음껏 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때'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죽음은 내게 가르쳐 준다. 


올해로 쉰을 바라보는 47이 되었다. 새벽기상이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고, 눈이 곧잘 피곤해진다. 밥 한 끼 거르고 나면 몸이 휘청거리고,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밤새 뒤척인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일찍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조급하게 한다. 


 이루지 못한 꿈들, 차마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것들, 시도해보지 못한 것들, 이 모든 것들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이 책을 통해 나는 배웠다.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마지막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였으면 좋겠다. 딸아이 혼자 이 세상에 남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딸아이가 자신의 삶을 함께할 배우자를 만나고 손주 아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나의 죽음을 슬퍼할 딸아이와 남편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면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고 싶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려주고 싶고, 글을 쓸 수 있다면 편지를 써서 읽어주고 싶다. 꼭 안아주며 우리가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스물에 만나 함께한 남편과 오랜 친구로 배우자로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혼자 몸을 가눌 수 없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녀에게 짐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말할 자신은 없다. 나의 안위를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죽음에 이르는 경위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다면 좋겠다. 평온한 하루 일상을 보내고 조용히 죽음에 이르면 좋겠다. 의학적 도움을 통해 다시 사랑하는 가족과 평온한 일상을 맞이할 수 있다면 기꺼이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의미 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상황이라면 가족들이 나에게 솔직히 말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했던 페그 선생님처럼, 나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죽음을 늘 생각하고,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음을 인식해야겠다.

모든 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임을 받아들이고,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할 대화를 먼저 나눌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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