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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ul 26. 2022

울고 싶을 땐 도서관으로 간다.

어릴 적부터 운동을 좋아하던 첫째가 야구를 시작하고부턴 셋째, 넷째도 주말반 야구를 다니기 시작했다. 또래보다 발육이 좋아 덩치도 크고 힘도 센 첫째가 힘껏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던 아이들은 형과 함께 메이저리그에 입성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처음 학원에서 맞춘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하러 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럽던지. 차량 운행이 되질 않아 매번 데려다주고 데려 와야 하는 것쯤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 그저 기특하고 대견했다.


괴로움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야구를 시작하고부턴 주말 아침이면 양말을 돌돌 말아 고무줄로 묶어 캐치볼을 하고, 책을 읽다가도 벌떡 일어나 타자 연습을 한다고 방망이를 휘둘러 대는 것이다. 밥을 먹고 일어섰을 때, 물을 마시러 정수기를 향해 걸어갈 때, 화장실을 갈 때처럼 몸을 일으키는 모든 순간에 아이들은 타자 흉내를 내며 잽싸게 몸을 휙휙 돌려댄다. 정신없는 것쯤이야 어떻게든 참아 보겠지만, 천장으로 날아간 공이 전등을 깨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 머리에 돌돌 말린 양말이 날아오면 감정과 나를 분리하는 것은 예견된 실패가 되고 만다. 고민할 틈도 없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마는 거다. "제발, 쫌!"


아이들이 야구를 시작한 후론 부쩍 더 그렇다. 게다가 피아노를 치는 둘째는 성질만 나면 방문을 닫고 들어가 피아노를 두드려 대니, 주말이면 난 소프트볼과 양말을 피해 곡예하듯 청소를 하고, 둘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아침 일찍 야구장과 피아노 학원으로 열심히 왔다 갔다 하고도 집으로 돌아오면, 신발을 벗는 순간부터 새로운 피로가 쌓인다. 다녀온 일 때문이 아니라, 벌어질 일 때문에.




주말은 언제나 너무 길고, 시간은 또 왜 이리 더딘 건지. 밥을 두 번이나 차리고, 식탁 맡 과자 부스러기를 벌써 몇 번은 주운 것 같은데 어쩌다 마주친 시침이 아직도 '숫자 2'를 가리키고 있으면 어떤 날은 정말, 울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그 순간 휴대폰의 진동이 울리고 생각 없이 열어본 문자에 '희망도서가 도착했습니다'라는 글자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보통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문자가 오는데, 그날이 주말이면 기쁨은 배가 된다.


주말에 희망도서를 가지러 도서관을 가는 일은 아이들을 두고 나가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 유일한 일이다. 나는 대출권수가 더 많은 읍 소재지의 도서관을 이용하는데, 차를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잠시나마 당당하게(?) 해방의 순간을 갖게 되는 거다. 아이들은 읍 소재지의 작은 도서관을  좋아하지 않아 따라나서지도 않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나.


나는 들뜬 마음으로 바닥이 단단하고 큰 대형마트 장바구니와 작은 에코백을 챙겨 도서관으로 간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익숙한 길을 따라 달리는 15분의 시간이 내겐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그렇게 도서관에 가면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네며 바로 희망도서를 찾아주시는 사서 선생님이 계신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정도의 인사가 전부지만 단골손님 대하듯 먼저 알은체를 해주시면 어쩐지 특별한 대출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처음부터 읍 소재지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했던 건 아니다. 언젠가 아이들과의 전쟁에서 격렬하게 전사하고 차를 끌고 나왔는데, 갈 데가 없어 도서관으로 갔었다. 차 속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면 답답했을 마음이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달리다 보니 한결 누그러 졌다. 게다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엔 '무제한 한 달 대출'이 가능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을 백여 권 정도 빌려 올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을 몇십 권씩 들고 와 한 달 내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생각지 못한 보물을 발견한 거다.


그 후론 혼자 도서관을 갈 때면 언제나 차를 끌고 이곳으로 온다. 울고 싶거나, 혼자 있고 싶은 날에도 온다. 15~20 분 정도는 별다른 고민 없이 차를 타고 달릴 수 있어서, 달리다 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익숙한 곳이 나온다는 안도감이 나를 도서관으로 데려다 놓는다. 읽고 싶은 책이 없으면 없는 대로 서가 주변을 느린 걸음으로 거닐며 책의 제목들을 읽고 또 읽는다. 아니면 제목 아래 작가의 이름들을... 그러다 마음에 드는 제목을 발견하면 도서관 앞 공터에 차를 세우고 조금 읽다, 담배 하나를 피우고 집으로 돌아간다.


누가 보면 참 유난스럽다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위한 이 정도의 유난스러움도 없었다면 나는 정말 버티지 못했을지 모른다. 도서관으로 가는 15분,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15분. 내겐 도로 위에 혼자 남겨진 30분의 시간이 무언가를 끌어안기 위한 간절한 기도 같은 거라 생각한다. 결국 난, 양손 가득 무거운 책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발견한 보물이 도서관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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