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없는 여성을 향한 증오심에 대하여

영화 <케빈에 대하여>

by 순전한작업실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찾아봤다. 대체로 '부족한 엄마가 모성애를 깨달아 가는 (성스러운)과정'이라던가, '(부족한 모성애로 인한)잘못된 애착 관계로 틀어진 모자 관계', '받아들여지지 못한 아들의 구애'라는 식의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어떤 평이든 이런 종류의 시각은 결국 영화 속에서 아들을 망치고, 지역 사회에 범죄를 일으키게 되는 그 모든 원인을 '어머니의 모성 부족'으로 수렴하게 한다. 이를 따르면,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끝나는 순간, 잠재적으로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여성은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일, 사랑, 자기 계발 따위의 모든 행위를 집어치우고,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제2, 제3의 케빈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믿을 수 없다. 중세 시대라면 모를까, 21세기에 그런 재미없는 영화라니.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일방적인 구애'라는 어느 평론을 읽다가 영화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일방적인 증오'를 말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어머니는 ‘사회가 규정한 어머니'에 속하지 않는 어머니다. 모성애가 없는, '바람직하지 않은' 어머니. 케빈의 어머니, 에바처럼 말이다.





| 어머니에 대한 일방적인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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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는 준비되지 못한 엄마였고, 아이를 기르는데 미숙했다. 아이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삶의 부분들이 아쉬웠고, 그 상황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에바가 스스로 획득했던 정체성이었던 여행가로서의 삶은 임신과 함께 끝난 지 오래다. 육아는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심리적으로 괴로웠다.


그는 불쾌한 대로, 피곤한 대로, 원하는 대로, 자신의 감정에 굉장히 솔직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타고난)모성의 부족 혹은 결핍'이라고 한다면, 맞다. 에바는 모성이 부족한 어머니다. 그리고 케빈은 유아기로 들어서면서, 곧바로 이러한 에바에게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빠인 프랭클린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단지 아이의 탄생을 반겼을 뿐, 육아는 온전히 에바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이 유독 에바에게만 적개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케빈의 감정은 '모성애를 발휘하지 않는 엄마'를 향한 일방적인 증오심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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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케빈은 에바가 추구하는, '어머니가 아닌' 삶의 영역을 미워하고, 질투한다. 케빈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희생하지 않는 에바를, 케빈은 늘 먼저 화나게 한다. 케빈이 단 한 번, 에바에게 살갑게 안겼던 순간과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케빈은 언제 에바에게 호의적이었나? 에바가 아픈 케빈을 안아 주고, 토사물을 치워 주고, 책을 읽어 주었을 때다. 그건 케빈이 좋아하는 로빈 후드 동화책을 읽어 주었기 때문도 아니고, 어린 여동생보다 예쁘게 굴어서 엄마의 관심을 다시 빼앗으려는 의도 때문도 아니다. 에바가 상냥하게, 자식을 위해서 더러운 것도 마지않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케빈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가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나머지 삶을 포기하지 않듯, 케빈도 온전히 어머니로 희생하지 않는 에바를 증오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왜? 케빈도 그 이유를 모른다. 정확하게는,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엔 모르겠다'고 한다. 사실은 케빈 뿐만 아니라 관객인 우리도 모른다. 그저 그렇게 배워왔다.


부족한 에바의 모성이 케빈을 살인마로 만든 것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케빈이 에바에게 품은 적개심과 증오심을 만든 것일 수는 있다. 어쩌면 이 적개심은 대대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케빈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모성이 없는 엄마'를 미워하기로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 에바는 어떻게 '어머니'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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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를 향하던 케빈의 증오심은 가족 전체와 사회로 향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죽이는 잔인한 폭력이 된다. 에바는 케빈을 학대하지도, 케빈에게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이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자식이 살인마가 되었기 때문에 '실패한 어머니'로 낙인찍힌다. 케빈이 체포된 이후, 피해자이든 피해자가 아니든 주변 사람들은 '실패한 어머니'인 에바를 케빈만큼이나 증오한다. 에바는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면서도 케빈을 대신해 기꺼이 뺨을 맞고, 욕을 먹고, 숨는다. 집에서도, 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에바의 정체성은 오직 '살인마 케빈의 어머니'가 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온몸에 토마토를 뒤집어썼던 붉디붉던 에바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듯, 집의 외관을 물들인 붉은 페인트를 흔적 없이 닦아 내고, 계속되는 안팎의 증오와 멸시를 견디며, 끝내는 자신의 복잡하고 다양했던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해하고 '어머니'로 주저앉힌 케빈을 끌어안는다. 하지만 에바의 대사를 기억하는가? 익숙해진다고 해서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에바는 정성스럽게 케빈의 방을 정리하며 케빈을 기다리지만, 그것은 에바가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이 모든 상황에 익숙해진 것뿐이다. 이 시대를 사는 수많은 에바도 그렇다. 그들은 단지 붉다는 이유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일에 익숙해지다가 결국엔 붉음을 벗고 '검은 에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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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about Kevin' 하자더니, 내내 에바와 에바의 내면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결국, 에바에 관한 영화다. 자유로운, 어머니가 아닌, 욕망하는, 에바의 그 '붉음'이 어떻게 '죄'가 되는지, 에바의 미숙한 모성을 모두가 얼마나 증오하게 되는지, 그래서 에바가 어떻게 그 '붉음'을 벗어가는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이 영화에 부제를 붙인다면 '에바, 엄마가 되기로 굴복하다'쯤이 되지 않을까.



| 케빈인가, 에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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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모성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구성원은 자유롭고, 다채로우며, 다층적이었던 정체성을 살해당하고 납작해져버린 엄마에게서 태어나 '케빈'으로 자라난다. '에바'의 삶을 선택한 여성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사회 안에 숨어 있는 수없이 많은 케빈들의 공격과 증오에 익숙해지면서 결국 다시 '엄마'가 된다. 즉, 당신은 케빈이면서 에바이다. 기억하는가?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물에 얼굴을 담그는 에바는, 에바이면서 케빈이다. 케빈은 에바를 지독하게 닮았지만, 에바의 가장 강력한 적이다.


원작자인 소설가 라이오넬 슈라이버나 영화감독인 린 램지가 소설과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강요된)모성애에 대한 찬양은 아닐 것이다. 감독과 작가는 모성을 강요하는 사회 안에서 케빈으로 태어나 에바로 죽어야 하는 자신과 주변을 보았고, 경험했을 것이다.


케빈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고, 당신의 형제, 자매, 친구들이다. 케빈은 결국 가족과 친구와 사회를 살해한다. 그래서 우리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모성을 강요하는 잔혹한 폭력성, 케빈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