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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수 Jun 02. 2023

기초교에서의 일기들

군대 1

2021년 1월 4일, 입대하는 날이다. 이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결국 오고야 말았다. 군대에 가는 기분은 설명하기 어렵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다. 그렇지만 하나로 압축할 수는 있을 것만 같다. X 같다. 여하튼 그런 기분 탓인지 간밤에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일어나 씻었다. 얼굴과 머리카락을 한 번에 씻을 수 있어 좋았다. 빡빡머리의 장점이다. 나갈 채비를 했다. 진해까지는 넉넉잡아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진해로 가는 내내 부모님께서는 침울해 보이는 나를 퍽 신경 쓰는 눈치였다. 카세트에서는 신명 나는 트롯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흥이 나지는 않았다.


진해에 도착하자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이렇게 낭만 없어 뵈긴 처음이다. 대충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생선구이 백반을 먹었다. 음식을 못하는 집이었는지 맛이 없었다. 안에서는 이것도 아쉬울지 모르겠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어머니와 진해루 앞을 걸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언제 커서 군대에 가냐는 너스레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시간이 다 되어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진해루는 흡연자들로 가득 차 마치 커다란 굴뚝같았다. 나도 담배를 한 대 꼬나물고선 내리 줄담배를 피웠다. 물론 이런다고 내 기분이 달래질 수 없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시간이 되자 정문 앞의 횡단보도는 입대장정들로 붐볐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다들 가족과 함께 있었다. 벌써부터 그리워서인지, 낯선 마음에 옆구리가 허전해서인지는 몰라도 부모님이 뵙고 싶었다. 왕복 6차선이 사회와 군대를 갈라놓는 듯했다. 이 길을 건너면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보행자 신호로 바뀌자 사람들은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도 무거운 발을 뗐다. 그렇게 나는 입대했다.


첫날에는 별 일이 없었다. 가입소대를 배정받고, 초도보급품을 수령했다. 그 외에 간단한 전파 사항들을 교육받는 것으로 하루를 마쳤다. 모든 게 어색하다. 게다가 첫날부터 불침번을 서야 했다. 새벽 세 시부터 네 시까지다. 낯설고 춥고 배고프고 어색하다.


2021년 1월 5일, 타종 두 번과 함께 '총기상 15분 전'이라는 방송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시계를 보니 5시 45분이었다. 흔히 듣던 기상나팔이 아닌, 나긋하고 잔잔한 종소리가 나를 더 열받게 했다. 해군에는 '15분 전' 문화가 있다. 어떠한 일을 시작하기 15분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놓아야 한다. 그치만 잠까지 미리 깨울 필요는 없지 싶다. 이틀 차 아침은 꽤나 괴로웠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세병5관의 천장이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일어나자마자 침구류를 정리하고 점호 대형으로 뭉쳤다. 앞으로 매일매일 반복해야 할 루틴이다. 오늘 하루를 요약하자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 똥이 안 나온다. 긴장해서 그런갑다.


2021년 1월 6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사흘째에 부활하셨다고 했다. 나는 입대한 지 사흘째에 변을 보는 쾌거를 이뤄냈다.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름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일과는 신체검사였다. 겸사겸사 예방접종도 맞았다. 오늘 맞은 예방접종에 정력감퇴제가 있다는 어이없는 소문이 돌았다. 믿거나 말거나다. 저녁이 맛있었다. 고기반찬이 세 가지나 나왔다. 게다가 후식으로 딸기를 열 개 넘게 먹어치웠다. 입대하고 처음으로 '배부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쉬다가 불현듯 입대한 것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속아 감금당한 것이라는 망상이 들었다. 여기에 몇 주나 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냥 콱 머리를 박아버릴까?


2021년 1월 7일, 날씨가 너무 춥다. 체육복과 야전상의로는 어림도 없다. 아무리 남쪽이라도 겨울에는 다 똑같이 춥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은 처음으로 식사 당번을 나갔다. 배식을 맡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추라이(식판 설거지)나 짬처리는 절대 하기 싫다. 배식하는 중에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을 찾아봤다. 명찰에 이름과 생일이 적혀있어 알아챌 수 있었다. 성까지 일치하는 사람은 몇 없었고, 이름이 같은 사람은 여럿 봤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간단한 교육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일찍 재워줬다. 공짜는 아니었다. 잠이 막 드려는 찰나에 사이렌이 울렸다. 야간비상훈련이다. 허겁지겁 일어나 점호 대형으로 집합했다. 그러고는 난데없이 삼십 분 동안 얼차려를 받았다. 진짜 '달밤에 체조'를 했다. 양쪽 팔과 허벅지가 얼얼한 채로 잠에 들었다. 참, 오늘 처음으로 군대리아를 먹어봤다. 딸기잼이 들어간 햄버거는 은근히 먹을만했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렇지.


2021년 1월 8일, 야간비상훈련을 해서 더 피곤하다. 적성평가를 쳤다. 내 적성이 뭔지는 모르겠다. 입대 5일 만에 굳어버린 내 머리만을 실감하고 나왔다. 적성평가 성적이 직별을 선택할 때 쓰인다는 얘기를 들어선지 기분이 찜찜하다. 점심에는 컵라면이 나왔다. 게다가 딸기 우유도 있다. 혀가 호강했다. 역시 음식은 몸에 나쁠수록 맛있다. 포카락으로 면을 떠먹으려니 고역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무렴 좋은 일이다. 참, 오늘은 정식 소대가 나왔다. 오늘부터는 4중대 2소대 40번 훈련병이다. 격실도 새로 옮겼다. 전에 쓰던 격실과 다르게 난방도 잘되고 온수도 콸콸 나왔다. 사회에선 당연한 것들이지만 이런 것에도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잘 버틸 수 있다.


2021년 1월 9일, 간밤에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좀 설쳤다. 코를 콱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침으로 군대리아가 나왔다. 이번에는 닭가슴살 패티인데 더 맛없다. 밥을 먹고 머리를 다시 밀었다. 이발에 성의가 없다. 바리깡에 머리카락을 여러 번 집혔다. 잘린 머리카락은 종이봉투에 담아 보관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초도보급에서 못 받았던 보급품을 수령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드디어 내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내광장에서 정렬할 때마다 얼어 죽을 것 같았는데 잘된 일이다. 다른 동기들 때문에 얼차려를 두 번이나 받았다. 아무리 연대책임이라지만 억울하다.


2021년 1월 10일, 오늘은 군가를 배웠다. 입대하고 처음 듣는 노래가 사내자식들의 앵카송이라니. 그치만 나도 걸걸한 목소리로 앵카송을 열창했다. 대중가요 부럽지 않다. 노래를 부르니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것 같다. 오후에는 도수체조를 배웠다.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저녁 식사 당번 때는 하버드대에 다니다 온 형님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미국물을 먹은 사람이라 그런지 낯선 일화들을 접할 수 있었다. 군대 안이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2021년 1월 11일, 입대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국기게양식과 입단식을 진행했다. 천사백 명이나 되는 인원이 일제히 줄을 맞추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이번 주는 쭉 정신전력 교육이 계획되어 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단순한 좌학이다. 국가관이나 안보관을 배우는데, 내 전공이 전공인지라 다 아는 내용이다. 잘 뻔했지만 DI가 지나다녀서 편히 잘 수는 없었다. 교육관에서 나왔더니 쌍무지개가 떠있었다. 샤넬 로고처럼 겹쳐있는 모습이었다. 보기 힘든 광경인데 사진기로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무지개를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랜만에 코로나 소식을 들었다. 확진자 증가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고 한다. 잘하면 설에 외박을 나갈 수도 있겠다.


2021년 1월 12일, 새벽에 일어나는 게 조금은 익숙해졌다. 생활리듬이 점점 바뀌어간다. 매일 아침마다 볼일도 시원하게 본다. 똥간이 부족해서 아침점호가 끝나자마자 오픈런을 해야 하는 게 애로사항이다. 오전에는 소병기(K-2 소총)를 받았다. 게임에서나 봤지 실제로 총을 보는 건 처음이다. 생각보다 묵직하다. '앞에 총' 자세로 오래 있으니 팔이 저릿저릿했다. 소병기를 받고 나서 소대별 사진을 찍었다. 나름 잘 나오겠다고 머리도 만지고 눈꼽도 뗐다. 피차 빡빡머리라서 큰 상관은 없다. 점심시간에는 식사 당번을, 오후 일과로는 정훈교육을 들었다. 오늘도 하늘이 예뻤다. 하늘이 보라색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립다.


2021년 1월 13일, 입대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벌써인지 아직인지 긴가민가하다. 남은 정신전력 교육도, 전투수영과 야교대도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오늘도 식사 당번으로 차출됐다. 쌀 포대를 들고 날랐다. 20톤 트럭 하나를 다 채웠다. 날씨가 풀려서 따듯했다. 저녁 일과로는 수준별 체력 단련을 실시했다. 말이 체력 단련이지 얼차려나 다름없었다. 바닥에 누워 발을 구르는데 탁 트인 밤하늘이 보였다. 우리 동네만큼 빼곡하진 않았지만 별도 보였다. 나름 낭만 있었다.


2021년 1월 14일, 오늘 점심은 제육쌈밥. 흐벅지게 먹고 나왔더니 몇 명이서 얼차려를 받고 있었다. 이유는 일렬로 걷지 않아서다. 어이없었다. 참 별것 가지고 유난이구나 싶다. 날씨가 참 덥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광양에서 왔다고 한다. 얘기를 해서 그런지 기분이 좀 낫다. 행정 훈련병이 점호시간에 편지를 나눠줬다. 30번 훈련병부터 가슴이 쿵쾅댔다. '내 번호가 안 불리면 어쩌지?' 다행히 편지가 왔다. 먼저 해군에 입대했던 친구에게서 온 편지였다.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몸짓이 동시에 나왔다. 오늘 밤은 흐뭇하게 잘 수 있겠다.


2021년 1월 15일, 흐뭇한 기분과는 달리 잠을 설쳤다. 불쾌하다. 벌써 며칠째 이러는지 모르겠다. 꿈에 주변 사람들이 나왔다. 내가 갈구하는 것들이 잇따라서 나오는 걸 보니 (그런 것들이) 많이 그리운가 보다. 오후에는 이론 평가를 쳤다. 문제가 원체 쉬운 것들이라 무탈하게 마쳤다. 저녁밥이 맛있었다. 소불고기에 돈까스, 복숭아맛 봉봉까지 나왔다. 점심은 그저 그렇더구먼 저녁에 돈을 다 몰아썼는갑다. 저녁 일과로 군가 교육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째선지 마스크를 단단히 착용하고 대기하라는 지시밖에 없다. 아마도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것 같다. 훈련이 미뤄질 수도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괜한 기대를 해본다.


2021년 1월 16일, 훈련이 미뤄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기분이 팍 상해부렀다. 예정된 일정대로 집총제식을 진행했다. 눈이 안 좋아서  DI의 시범이 잘 안 보였다. 도수체조에 이어서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을 경험했다. 군적금을 들었다. 다달이 사십만 원씩이다. 이렇게 적금을 들면 내가 쓸 돈은 어디서 나나 싶다. 군악병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 대전에 산다고 해서 얘기가 잘 통했다. 자꾸 장난도 걸어주고 친근하게 대해주어서 고마웠다. 저녁 일과로 수준별 체력 단련을 진행했다. 팔에 알이 덜 배기는 것을 보니 점점 체력이 늘어나는 것 같다.


세병5관 야외 계단에서는 어렴풋이 바다가 보인다. 그것도 계단에 철창을 쳐놓아서 그 사이를 통해 간신히 보는 정도다. 밥을 먹고 나서는 항상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바라볼 때가 많다. 넓은 바다, 그 앞에 사회와 군대를 가르는 교육사의 장벽이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철창이 있고, 나는 그 안에서 겨우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2021년 1월 17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군대에서 맞는 생일, 기분이 침울했다. 친한 동기에게 "나 오늘 생일이야"라고 말하니 갑자기 "야 민수 생일이래!"라며 큰 소리를 질렀다. 졸지에 여러 명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들었다. 쑥스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공교롭게도 점심이 맛있는 날이었다. 마파두부 덮밥에 신라면 블랙, 어묵볶음에 오징어젓갈이 나왔고 부식으로 815콜라가 나왔다. 진해루 앞에서 먹었던 사이다 이후로 처음 먹는 탄산음료다. 생일이라고 동기들이 콜라를 양보해 줬다. 사양했는데도 주길래 별 수없이 한 끼에 콜라 세 캔을 먹어치웠다. 더는 못 먹겠어 앞에 있던 모르는 훈련병에게 콜라를 나눠줬다. 난데없이 받은 공짜 콜라에 히죽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후에는 처음으로 전화를 했다. 다들 안 받길래 마지막으로 큰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하기 전에 신원을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급히 "누나! 나야!"라고 말하며 나임을 어필했다. 다행히 전화를 수락해 주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누나에게 생일 축하를 받았다. 고작 3분짜리 전화가 이렇게 간절하다니. 점호 전에 부식으로 초코파이를 받았다. 생일 케이크 대신이라 생각하고 먹었다. 왜 '눈물 젖은 초코파이'인지 이해가 갔다.  다 먹은 봉지마저 오와 열을 맞춰놓아야 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2021년 1월 18일, 입대한 지 3주 차가 되는 날이다. 아침 식사 당번을 끝내고 나오니 1·3중대 훈련병들이 야교대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주욱 늘어선 버스들과 가득 찬 의류대들이 보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쟤들 X 됐네"라고 말했지만 별로 우습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도 할 일이기 때문이다. 2중대와 4중대는 야교대로 가는 대신 전투수영을 진행했다. 'SSU' 체조로 팔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수영장으로 입장했다. 수영을 아예 못하는 인원은 거수하라길래 뻐팅겼으나 10미터도 못 가고 물을 먹었다. 결국 기본 배영을 배웠는데 어째 재능이 있는갑다. 첫날에 바로 3급으로 승급했다. 5미터 다이빙대에서 비상이함 훈련도 했는데, 다이빙대에 직접 서보니 꽤나  높았다. 잘못 떨어졌는지 발목이 조금 아팠다.


2021년 1월 19일, 운이 좋게도 오늘은 SSU 체조를 생략했다. 수난자 구조와 비상구명의 훈련을 진행했다. 수난자 구조는 말 그대로 물 위에서 의식이 없는 사람을 구조하는 것, 비상구명의는 응급 시 전투복 바지에 공기를 넣어 튜브로 활용하는 것이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전투복에 기대서 물장구를 치는 모습들이 퍽 우스웠다. 저녁에는 분과 면담이 있었다. 내가 희망하는 직별을 3순위까지 신청할 수 있다. 갑판, 전탐, 조리 순으로 적어 냈다. 제발 조리병이 되는 불상사는 없기를 바란다. 화장실에서 다른 소대의 김민수를 만났다. 보자마자 "나도 김민수인데!"라고 말하니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파이팅 하자며 말해주고 나왔다.


2021년 1월 20일, 오늘은 놀라울 정도로 별일이 없었다. 그전에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고, 밀린 편지를 썼다.

 

2021년 1월 21일, 방한용품과 마스크를 끼고 구보를 뛰는 건 힘들다. 아침으로는 군대리아가 나왔다. 옆에 있던 동기가 감자튀김 찍으라고 준 케찹을 햄버거에 넣고 딸기잼은 우유에 섞어먹는 걸 봤다.  저렇게도 먹을 수 있구나. 천재적인 발상이다. 오늘은 영법, 비상이함, 수난자 구조, 비상구명의를 모두 평가했다. 따로 감점되는 일 없이 잘 마쳤다. 저녁 동안 비가 왔다. 비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비 때문에 정렬하는 일 없이 바로 식당으로 갈 수 있었다. 식사하러 가기 전에 훈련병 한 명이 졸고 있었는데, ADI가 그걸 보더니 "쟤는 놔두고 갈까?"라며 속삭였다. 모종의 눈짓과 신호가 오갔다. 소대 전체가 살금살금 생활관을 빠져나왔다. 이럴 때만 단합이 잘 된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친구는 깨자마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더랬다. 늦게나마 나와서 밥을 먹었다고 하니까 다행이다.


2021년 1월 22일, 전투수영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의 일과는 종합생존훈련이다. 무탈하게 잘 끝냈지만 이함대에서 떨어지다가 잘못 떨어진 것 같다. 물싸대기를 맞은 기분이다. 점심으로 우동이 나왔다. 포카락으로 우동을 건져먹는데 문득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생각났다. 팍팍 퍼먹고 싶은데 내 맘대로 잘 안된다. 저번에 적어낸 직별이 오늘 나왔다. 갑판이 튕기고 전탐으로 배정받았다. 아예 최악은 아니지만 내 계획과는 많이 달랐다.


2021년 1월 23일,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후에 정복을 받은 것이 끝이었다. 정복이 썩 어울리지는 않았다.


2021년 1월 24일, 오후에 삼분 간 전화를 하고, 저녁에는 야교대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챙겼다.


2021년 1월 25일, 야교대로 가는 날이다. 어제 새벽에 불침번을 섰는데 아침 식사 당번까지 겹쳤다. 야교대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3주 만에 여자를 봤다. 입대하기 전에 시간을 보내던 진해루도 보였다.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2층 침대로 되어있는 신병대와 다르게 여긴 침상이다. 동기들과 몸을 부비며 자야 된다. 오후에는 예비사격술을 배웠다. 누워 쏴 자세는 어색했는데, 더구나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하느라 팔꿈치와 무릎이 배겼다. 저녁 식사 당번에서 배식을 하던 도중 저번에 화장실에서 봤던 김민수를 또 만났다. 반가워서 오징어볶음을 더 주다가 조리병에게 혼났다. 정량 배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자려고 막 누웠는데 야간비상훈련이 걸렸다. 팔벌려뛰기는 팔벌려뛰기인데, 횟수를 말해주지 않았을 때는 절망스러웠다. 교관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 하란 얘기다. 그날 밤 야교대에서는 훈련병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 1월 26일, 야비를 해서 그런지 몸이 쑤시다. 비가 내렸다. 오늘은 화생방이 계획되어 있다. 무섭고 두렵다기보다 궁금했다. 대체 어떤 느낌이길래 눈물콧물을 질질 짜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실습장에 들어가자 단박에 알 것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냄새다. 오뚜기 연겨자를 기체 형태로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느낌은 라면 국물을 눈에 붓고 코로 힘껏 들이마시면 알 수 있다. 내 의중과는 상관없이 눈물콧물이 질질 흘러나온다. 정화통을 결합하자 그때야 좀 살 것 같았다.


2021년 1월 27일, 오늘 일과는 유격이다. 오전에는 유격체조와 목봉체조를, 오후에는 장애물 극복이 계획되어 있다. 마지막 구령은 외치는 게 아닌데도 계속 외친다. 동기지만 찾아가서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화생방보다 목봉체조가 더 힘들었다. 무거운 걸 계속 들고 넘기고 심지어는 목봉을 끌어안은 채로 윗몸일으키기를 시킨다. 진짜 X나 힘들었다. "교관님 끝내주십시오"를 큰 목소리로 복창하면 끝내준다길래 정말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장애물 극복은 어렵지 않았다.


2021년 1월 28일, 오늘 일과는 사격이다. 오전에는 영점을 맞췄다. 총소리는 생각보다 크고 우렁찼다. 사격은 사고가 일어나면 인명피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군기가 삼엄했다.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얼차려를 여러 번 받았다. 오후가 되어서는 기록사격을 진행해야 했으나, 누군가가 탄피를 잃어버려서 그걸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여담이지만 그 탄피를 잃어버린 놈은 후반기 교육장에서 같은 격실에 배정받았었다.) 두 시간 동안 벌벌 떨었다. 내 기록은 스무 발 중 열한 발. 한 발만 더 맞췄으면 전화를 더 할 수 있는데 아쉬웠다. 와중에 같은 소대에서 만발을 맞췄다는 동기가 있더랬다. 평소에 간첩 아니냐고 놀렸는데, 진짜 간첩인갑다.


2021년 1월 29일, 오늘은 하루종일 식사 당번으로 일과를 깠다. 폐박스를 치우는 도중에 10분 안에 다 치우면 콜라(그것도 코카콜라)를 준다고 해서 쏜살같이 치웠다. 조리병장이 (그 짧은 10분의 찰나에서도) 무식하게 일하던 친구들이 점점 숙달이 되는 모습을 보고서는 "인간의 진화 과정을 너희한테서 보는구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약속대로 콜라를 받았다. 병장이 휴대폰으로 신곡을 틀어줬다. 아이유의 'Celebrity'라는 노래란다. 노래와 밤하늘 그리고 코카콜라. 운치 있는 밤이었다.


국기를 게양하고 하강하는 시간에는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그때는 모든 행동을 중지하고 국기 방향으로 경례를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느껴진다. 애국심인지 원망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난 왜 여기 있는가'를 고민했다.


2021년 1월 30일, 오늘은 각개전투를 하는 날이다. 오전에는 포복술을 배웠다. 나와 내 앞에서 어설프게 기어 다니는 내 동기가 불쌍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동기의 엉덩이가 슬픈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팔꿈치가 다 까졌다. 처음으로 열외를 할지 말지 고민했다. 부식으로 초코에몽을 받았다. 너무 달아서 당뇨가 올 것 같은 기분이다.  오후에는 개인침투를 실시했다. K-2 소총 대신 다 낡아빠진 M16을 들고서 훈련했다. 실감 나게 연막탄도 터뜨려주고 총소리도 깔아줬다. 제법 전쟁터 같은 느낌이 났다. 분대장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보여줄게"라며 허세를 부렸다. 철조망 밑에를 기어서 가는 걸 보기만 했지 실제로 해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몸이 닿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각개전투가 끝났다. 이제 행군만 남았다. 팔꿈치가 까져서 소대장실로 찾아갔다. 소대장은 "인마는 뭐 어떻게 했길래 팔꿈치가 이래 까졌노" 하면서 빨간약을 발라줬다. "열심히 했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팔꿈치는 아리지만 뿌듯했다.


2021년 1월 31일, 종교활동에 나갔다. 달리 하는 것은 없고, 나눠 받은 유인물을 읽은 게 끝이었다. 초코파이도 주지 않았다. 내일이면 야교대를 떠나기 때문에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감사한 일을 백가지 적으라고 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육십 가지 정도를 채우고는 그만뒀다. 소대장이 행군불능자를 조사했다. 야교대 첫날, 돌에 발바닥을 찧은 탓에 좀 욱신거렸다. 이 상태로 오래 걷는 건 무리겠다 싶어 대열에 합류했다. 대신 오늘 새벽동안 불침번을 서야 한다. 팔꿈치가 까진 곳에 체육복이 찰싹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동계체육복의 기모가 팔꿈치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진짜 아프다.


2021년 2월 1일, 2월이 됐다. 시간이 꽤 지났음을 새삼 느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때문에 야교대에서 기초교까지 걸어가는 일정이 취소됐다. 버스로 복귀한 다음 기초교를 여러 바퀴 도는 것으로 행군을 대체했다. 나는 행불자여서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었다. 다른 훈련병들이 행군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잡무를 도왔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신병대는 호텔같이 느껴졌다. 깔끔하고 넓고 따듯했다. 이곳이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2021년 2월 2일, 희망하는 초임근무지를 적어냈다. 직별과 똑같이 3지망까지 적을 수 있다. 처음 들어보는 부대와 진해기지사령부, 2함대사령부 순으로 적어 냈다. 2함대로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기평가를 봤다. 집총제식, 맨손제식은 깔끔하게 했지만 도수체조는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 그나마 동작을 절도 있게 해서인지 만점을 받았다. 저녁시간에는 우리 소대가 마지막 순번이어서 남은 군만두를 다 먹어치울 수 있었다. 열 개는 족히 먹어치운 것 같다.


2021년 2월 3일, 교육사령관님께서 정신 훈화를 해주셨다. 군복에는 별이 달려 있었다. 앉아차려자세를 한 시간 가까이 유지했다. 자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의외로 입담이 좋으셔서 재밌었다. 정신 훈화 후에 체력검정을 실시했다.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둘 다 낙제점을 받았다. 팔굽혀펴기는 꽤나 아쉬웠다. 지난 한 달 내내 조금씩 연습을 해왔지만, 아직 더 해야 할 것 같다. 오후에는 총기를 손질했다. 다른 소대 것까지 우리가 다 했다. X뺑이다.


2021년 2월 4일, 이제는 며칠 차인지를 세는 것보다 수료가 며칠 남았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더 편하다. 체력검정 마지막 종목인 3km 구보가 남았다. 13분 안에 3km를 뛰면 합격이다. 준비운동 없이 무턱대고 뛰어서 그런지, 겨울이라 그런지 몰라도 숨이 더 찬 기분이었다. 반의 반바퀴도 안 남기고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망연자실했다. 중간에 30초 정도 숨을 고르며 쉬었는데, 그냥 좀 더 참고 뛸 걸 그랬다. 사실 내 한심한 체력을 탓하는 게 더 낫고 더 옳은 일이다.


2021년 2월 5일, 초임전산배치가 계획된 날이다. 클릭 한 번에 내 초임근무지가 결정된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근무지가 될 수도 있다. 대문짝만 한 빔프로젝터와 곳곳에 놓인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 중계된다. 엘 클라시코보다 더 긴장되고 떨린다. 전산배치는 직별에 따라 진행된다. 갑판병들의 근무지가 나오자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마 2함대에 걸려서 그럴 것이다. 전탐병들 차례가 왔다. 1지망으로 적어낸 부대는 70명 중 한 명만 갈 수 있다고 한다. 클릭과 동시에 뺑뺑이가 돌아가고, 내 초임근무지가 나왔다. 70대 1의 확률로 내가 가게 됐다. 옆에 있던 내 동기들은 둘 다 2함대로 튕겨버렸다. 엄청 좌절한 모습이다. (여담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나도 2함대에서 근무하게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무에 가서도 옆에 있는 동기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2021년 2월 6일, 옆머리와 뒷머리를 다시 밀었다. 머리 기르는 재미로 살았는데 다시 밀려버렸다. 그래도 애지중지 키운 앞머리는 남겨놓았다. 샘브레이와 당가리를 입고 수료 사진도 찍었다. 소병기를 받고 나서 사진을 찍었던 날이 생각났다. 그게 벌써 몇 주 전이다. 수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헌혈버스가 왔다. 헌혈은 거진 삼 년 만에 해본다. 사실 콜라랑 초코파이 준대서 했다. 세 개나 받았다. 사회에서는 잘 안 먹던 초코파이가 여기서는 왜 이리 맛있을까.


2021년 2월 7일, 수료가 다가올수록 무언가를 시키기보다는 방치하는 경향이 짙다. 말해봐야 자기 입만 아프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걸까? 어제도 여유로웠지만 오늘은 더 여유로웠다. 수료식 예행연습 외에 한 게 없었다.


2021년 2월 8일. 하루종일 강연을 들었다. 지루했다. 몸무게를 재봤더니 7키로 정도 빠져있었다.


2021년 2월 9일, 수료식 전 날이다. 오늘도 강연을 들었다. 군악대 수병들이 노래를 불러줬다. 다들 신나서 방방 뛰며 들었다. 떼창도 했다. 이렇게 신났던 적도 참 오랜만이다. 수료 전 날이라 다들 들뜬 분위기다. 서로 휴대폰 번호를 공유하고 나중에 연락하라고 한다. (이래놓고 연락 안 하는 게 국룰이다.) 나도 몇몇 친구들과 번호를 주고받았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인데 정이 들었나 보다. 헤어지는 게 아쉽다.


2021년 2월 10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개운하다. 아침 일과로 마지막 수료식 예행연습을 끝냈다. 각자 짐을 쌌다. 수료 한 시간 전이 되어서는 정복을 차려입었다. 모두가 검은 세라복에 코트, 광이 나는 단화, 빵모자를 눌러쓰고는 세병1관 앞에 집합했다. 누가 입었는지도 모를 재활용 군복 대신 정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다들 멋있어 보였다. 잘 다린 부사관 정복을 입으신 소대장님도 오늘따라 멋있어 보인다.


드럼 마치가 연주되고 행진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 싫던 큰 걸음이 오늘만큼은 밉지 않다. 우리 소대는 거의 끝에 입장했다. 연병장에는 다른 소대가 이미 열중쉬어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수료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해군병 672기의 수료를 선언한다!" 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너도 나도 정모를 하늘 위로 벗어던졌다. 푸른 하늘에 하얀 정모들이 수 놓였다.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마음 깊숙한 곳에 수문이 있다면, 그게 터진 느낌이다. 처음 이곳에 걸어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해 전투수영, 야교대, 야간비상훈련 같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기들과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부끄럽지만 눈물도 핑 돌았다.


수료식이 끝나니 방송에서는 우리를 훈련병이 아닌 이등병으로 불러주었다. 어색해진 나의 계급과는 반대로 익숙해진 이곳을 떠나야 한다. 세병5관과 널따란 내광장, 천진난만했던 얼굴들, 빨간 모자, 철창 속의 바닷가···. 애증 섞인 마음으로 이것들을 고이 간직하기로 했다. '해군의 출발점'이라 적힌 비석을 지나와 전투병과학교로 향했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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