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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피 Sep 10. 2023

시간이 넉넉히 흐르는 멕시코의 어느 강변 마을

캄페체의 팔리사다에서

알록달록 팔리사다로 가는 길


팔리사다는 멕시코 캄페체 주의 남서쪽, 같은 이름의 팔리사다 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강변 마을이다. 캄페체 주를 가로지르며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쳐 나간 수많은 물줄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캄페체 강줄기의 숨은 보석, 팔리사다를 만날 수 있다. 


팔리사다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호누타' 마을을 막 지났을 때, 택시는 팔리사다 강을 오른쪽에 끼고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울창한 나무들이 내려다보는 곳엔 초록빛 강물이 흐르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대왕 이구아나들이 길 위를 휘적휘적 기어 다니고 있었다. 


팔리사다 강 @숲피


마을의 첫인상은 단출했다. 차 두대가 지나다니기에도 버거워 보일 정도로 좁은 골목길과 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적색의 소박한 성당. 멕시코의 다른 마을들과 달리 화려한 외관의 웅장한 성당도,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 주민들이 한 소끔 쉬어갈 수 있는 커다란 광장도 없었다.


끝과 끝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광장에는 키가 작은 나무들이 잘 가꾸어진 채로 듬성듬성 작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이 마을에서 키가 가장 큰 하얀 외관의 종탑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자리를 따라 아치가 죽 이어져 광장의 4면을 삥 둘러싸고 있었다. 


해가 뜨고 지는 강가에서 강물이 들려준 이야기 


햇빛이 뜨거운 오후, 이 오묘한 분위기의 마을은 일제히 낮잠에 빠진다. 일순 텅 비어버린 거리에는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길강아지들과 집 문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조용한 거리를 내다보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간혹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원숭이가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시간이 멈춘 듯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 숙소에 당도했다. 


고요한 팔리사다의 골목길 @숲피


강둑에 서서 잔잔한 강물을 내려다보다 어디선가 기척도 없이 스르륵 나타난 보트에 올라타 보기로 했다. 강물 위에서 올려다본 마을의 풍경은 또 달랐다. 알록달록 색이 칠해진 단층짜리 건물들 위에는 적갈색의 프랑스식 기와가 다닥다닥 널려 있다. 아기자기한 박공지붕이 줄지어 늘어선 마을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곳 팔리사다는 잔잔한 강물을 따라 시간이 넉넉히 흐르는 곳이다. 폭이 좁고 긴 강을 따라, 흐르는 시간을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가 보기로 했다. 강변을 따라 양옆으로 유유자적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목을 축이기 위해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는 새들의 발길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거북이인지 매너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장구 소리가 들려왔다. 


팔리사다의 강가에서 @숲피


해가 기운 시각, 울창한 망고 나무에 열매처럼 가득 열려 있던 수십 마리의 새들이 곱게 접혀 있던 하얀 날개를 펼치고 일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단잠을 깨우는 신호탄이었다. 마을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제 기지개를 켤 시간이었다.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한 강변 @숲피


아침을 여는 사람들


이곳 팔리사다에는 해가 뜨기도 전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시장은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에 불을 밝히고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새벽 5시 반부터 문을 활짝 열고 마을의 부지런한 일꾼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냄비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시원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시장으로 향했다. 아직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아 어둑한 거리를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골목을 돌자 까만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시장 건물이 두 눈에 환하게 담겨왔다. 그리고 활기찬 아침의 소리가 졸린 두 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강에서 직접 잡은 물고기를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어부들은 동트기 전 새벽부터 자신들의 최고의 상품을 가판에 진열하고, 몰려든 구경꾼들은 최고 중의 최고를 앞다투어 가져가기 위해 소란스럽다. 심지어 시장 입구 바로 옆의 선착장에는 도시로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줄지어 첫 보트를 기다린다. 이렇다 보니 팔리사다의 아침엔 시장과 선착장에 모든 활력이 집중된다. 


시장에 들어서니 장사꾼들과 일하러 가기 전에 간단히 요기하려는 사람들이 한 데 뒤섞여 붐비고 있었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앉아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의기양양한 기분을 만끽하며 달콤한 홈메이드 빵 한 조각과 코코아 거품이 풍성한 핫 초콜릿 한 잔을 들이켰다. 아침 식사를 내어준 푸근한 인상의 가게 주인에게 원래는 아직 침대에 있을 시간이라고 했더니 요즘 젊은 친구들이 그렇다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주인아저씨의 유쾌한 웃음은 금세 전염되어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퍼져 나갔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숲피


강을 따라 흐르는 삶


팔리사다에서 캄페체 주의 수도인 시우다드 델 카르멘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로를, 하나는 수로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육로를 이용하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데다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한 울퉁불퉁한 길을 4시간이 넘게 가야 하는 데다가 강물을 따라가면 2시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로를 이용한다. 


팔리사다를 떠나는 날, 보트 출발 시각 20분 전 선착장에 나갔다. 의외로 선착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분주히 보트에 실어 보낼 짐을 옮기고 있었다. 매표를 담당하는 세뇨르는 우리더러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짐을 먼저 다 옮긴 후에야 탑승 순서가 오는 모양이었다. 


보트는 생각보다 작았는데, 보기보다 많은 양의 짐이 끊임없이 옮겨지고 있었다. 잘 포장된 박스 위에는 받는 이의 이름과 주소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 많은 짐과 사람이 전부 탑승할 수 있는지 고민이 깊어지던 찰나, 강가 계단 아래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던 세뇨르가 우리를 보고 손짓했다. 그 많던 짐은 보트의 선미와 후미, 그리고 사람들의 좌석 아래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외국인은 우리뿐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익숙하단 듯 자루를 열어 구명조끼를 꺼내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직전의 팔리사다 강변 @숲피


새벽 6시.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시각 보트는 시동을 걸고 부르르 몸을 떨며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후미에는 조종간을 잡은 조타수가, 선미에는 방향을 지시하는 보조수가 자리를 잡았다. 보조수는 한껏 몸을 앞으로 기댄 채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조타수에게 끊임없이 수신호를 보냈다. 시야가 트인 맨 앞에 서서 강의 유속을 살피고 장애물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인 듯싶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던 보트가 속력을 높이기 시작하자 얼굴로 불어오는 맞바람에 눈이 절로 감겼다. 강물을 따라 달리며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양 옆을 살펴보니 드문드문 보트가 정박해 있는 데크가 있었고 시선을 따라 간 끝에는 작은 목조 주택들이 있었다. 


'우와,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던 찰나, 보트가 갑자기 속력을 늦추더니 탈탈대는 소리를 내며 정박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출발한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대던 우리의 궁금증은 곧 말끔하게 해소가 되었다.


보조수가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외치자 주택의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사람이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보트에서 택배 꾸러미를 건네받는 게 아닌가! 짧은 안부를 주고받은 뒤 보트는 다시금 탈탈대며 출발을 알렸다. 물길 위에서 서로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그들만의 배송 방식이었다.


그렇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시우다드 델 카르멘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이들만의 특별한 배송은 계속되었다. 팔리사다 사람들에게 강은 이동 수단이자 짐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전의 마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삶은 강을 따라 계속되고 있었다.


팔리사다의 황홀한 일출 @숲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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