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1년 전 봄에 애기를 보냈던 나는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와 참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다.
5년이 채 지나기 전인 2024년 8월 16일.
쎄리를 만나러 가버렸다. 그녀, 내 사촌언니가.
"쎄리는 내 안에 있어. 쎄리가 나를 보고 있는데 아무렇게나 살 수 없어. 난 정말 잘 살 거야. 쎄리에게 부끄럽지 않게."
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건강하고 슬기롭게 펫로스증후군을 감내해 낸 사람이 언니였다.
자신의 슬픔에 대해 충분히 표현하며 주변의 정서적 지지체계를 견고하게 구축했고, 쎄리가 떠난 후 많이 울고 항상 그리워하되 우울과 자책의 수렁에 발목 잡히지 않을 줄 알았으며, 반려견을 아끼는 마음 그대로, 반려견을 상실한 후의 자기 자신의 삶을 아낄 줄 알았다.
그리고 정말로 쎄리가 지켜보는 듯이, 그렇게 살아냈다.
몸에 좋은 음식들을 잘 챙겨 먹었고, 집안과 연구실엔 잘 가꿔진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사시사철 파릇파릇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퍼주고 베풀기를 좋아했고, 연구실 주변 길고양이들에게도 사료와 물을 놓아주기를 잊지 않았다. 한강변을 산책하다 길가에 보이는 온갖 꽃 이름까지 다 아는, 사람과 생명에게 관심과 정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불의와 부당한 것과 이해 못 할 것들을 참지 못하는 논쟁가였지만, 누군가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극 외향형에다, 때론 점성술이며 타로카드며 영적 세계 같은 온갖 신비로운 것들에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엉뚱하고 천진한 면이 있는, ENTP인 언니와 INFJ인 나는 한 번 만나면 이야기할 거리들이 많았다.
내가 어렸을 때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범접할 수 없게 뭔가 바쁘고 대단해 보이는 '대학생 언니'였다가,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땐 집안의 자랑거리인 '교수인 친척언니'가 되었는데, 내가 늦은 나이에 같은 대학의 대학원생이 되어 언니를 다시 만났을 땐 이제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진 친구 같은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인생 선배이기도 한 언니와 가까이 지내며 함께 나이 들어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년간 연구활동을 하러 미국에 가 있던 언니가 췌장암에 걸려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다.
한 달 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에서, 언니는 지방의 요양병원에서 자연치유와 심신통합치료프로그램으로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좀 나아지면 연락하겠다고, 너에게 할 얘기가 많다고 말했었다. 얼마 전부터는 항암치료도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당장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항암치료가 힘들 게 걱정됐지, 이런 이른 이별은 상상 범위 내에 있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얼른 언니를 만나러 갈 생각만 했었다.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떠난 개와 고양이에 대해,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나누게 될 줄 알았던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도 못한 채, 마지막을 보여주지도, 유언 하나 남기지도 않은 채, 언니는 갑작스레 떠나버렸다. 오열하는 늙으신 고모와, 중증 치매로 딸의 죽음을 제대로 인지조차 못하는 고모부를 두고, 사 남매 중 제일 먼저.
슬픔보다 황당함이 온몸을 둔중하게 내리쳤다.
그러면서 천천히 알아졌다. 이제부터 나는 많은 말을 언니에게 하게 되겠구나, 혼자서. 오랫동안.
큼직큼직한 죽음들이 내 몸을 쓰러뜨리고 지나가는 것.
그 어떤 이별도 상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어떤 이별들은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않았을 때 급소를 찔러 치명상을 입히고 지나가는 것, 그때가 우리의 마지막이었음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