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기남과 출퇴근을 거의 매일 함께 하며 데뷔 준비에 열심히 임했다.
또한, 자신이 그간 작곡한 곡들을 회사 사람들과 공유하며 고칠 건 고치고 다듬을 건 다듬는 시간들을 보냈다.
물론 매일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다.
기남의 기획사에는 지우 외에도 오디션으로 뽑은 소속사 가수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남은 새로운 사업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지금 인생이 진짜인가 라는 회의감이 밀려들었지만, 곧 기남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난 거래를 했고, 결정한 이상 그걸 따르는 수밖에 없지. 내 인생인데 뭔가 내 것이 아닌 배우 같은 인생이지만 현생에 충실하자! 뭐가 진짜든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어느 날 기남은 연주에게 제안했다.
“당신도 이제 슬슬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지 그래?”
기남과 연주는 서서히 평범한 부부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혜린이 사는 모습을 보고 온 날부터 기남은 연주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갔다.
본인이 언제 다시 회귀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전까진 최선을 다해 연주의 남편 역할을 하기로 맘먹었다.
그런 기남의 변한 모습을 본 연주 역시 온전히 마음을 열어 기남을 받아들였다.
그 덕에 기남은 죄의식을 덜고 깊은 행복감까지 느꼈다.
“일단 마치지 않은 공부부터 마쳐 볼까 해.”
“그거 좋은 생각이네!”
연주는 대학을 마치기로 작정하고 복학을 서둘렀다.
***
한편 박흥식은 꽤 실력 있는 검사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배경도 학벌도 전혀 내세울 게 없는 그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걸 못마땅해하는 부류들도 등장했다.
박흥식은 연계된 계파가 없으니 홀가분하게 자기가 맡은 사건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서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도 소신을 지켜 지지자들과 적들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얼마 전 그는 정부 고위층의 친인척이 연루된 사건을 맡아 그들의 죄를 탈탈 털었다.
“형! 어쩌자고 그래? 정도껏 해야지. 그러다”
“난 이미 다 각오하고 한 일이다!”
“어떻게 이룬 건데 하루아침에 다 무너뜨리려고 그래?”
아무리 정도를 걷는다지만 자기 직은 물론 목숨까지 내놓고 소신을 지키는 박흥식이 걱정돼 기남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우리 일이라는 게 윗대가리 눈치 보기 시작하면 답이 없거든!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단 뜻이지. 그래선 안 되는 거 아니니?”
“그렇긴 해도 본인 생각도 해야지. 어머니랑 동생은 물론 와이프, 애들, 와이프 집안까지 모두!”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어울리지 않는다? 너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
“걱정하지 마! 80년대 서슬 퍼랬던 시절도 다 지나갔는데 뭔 일 있으려고?”
“형 자꾸 옛날 생각나게 하지 마라, 응?”
“옛날 생각?”
“벌써 잊었어? 내 말 듣지 않고 유영산에 남았으면 어찌 될 뻔했는지?”
“야! 그 말하니까 또 추억 돋는다! 그때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 지나고 보니 다 네 덕분이다! 이렇게 검사장까지 해 먹고 있으니 말이야.”
감개무량한 듯 박흥식이 외쳐댔다.
“검사장이야 형이 워낙 일을 똑 부러지게 하니까 된 거고. 난 그 일엔 보탠 게 하나도 없지!”
“네가 날 서울로 이끌지 않았음 검사장은커녕 사시나 제대로 봤겠냐? 그 얘기지, 인마!”
“인마? 이제 나도 어엿한 기획사 대푠데 말 좀 가려 하시지!”
“어쭈! 그래 너 아주 많이 컸다! 니 똥 굵다!”
둘은 시답지 않은 농담까지 곁들이며 현재 누리고 있는 행복을 향유했다.
하지만 결국 얼마 뒤 박흥식은 윗선의 요구를 거절한 대가로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게 됐다.
특수통에서 형사부로 좌천된 데 이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이번엔 또 강력부로 이동을 명령받았다.
강력부로 이임되자마자 박흥식이 배당받은 사건은 조폭과 연관된 것이었다.
박재국이 그 조폭 수장으로 겉으론 재개발 현장에 등장하는 용역 회사 대표로 이름을 걸어 놓고 각종 불법을 자행한 사건이었다.
그가 대표로 있는 용역 회사는 건설회사가 재개발 과정에서 공사비를 부풀리는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즉 건설회사가 재개발을 맡게 돼 폐건물이나 불법 건물들을 철거할 시 용역 회사는 철거권을 따내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었고,
결국 건설회사와 용역회사는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눠 먹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자니 공사비는 실제 드는 비용보다 상당히 부풀려지기 일쑤였다.
말이 회사지 실질적으로 철거 과정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는 깡패집단 수장이 박재국이고, 불법을 일삼는 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박흥식은 일단 박재국이 수사선상에 오르자, 기남에게 연락을 취해 기남을 만났다.
“계부긴 하지만 그래도 제수씨와 연관된 일이라 너한테 말해둬야 할 거 같아서.”
박흥식이 뭔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기남은 드디어 올 때가 왔다는 걸 느꼈다.
지난 생에서 연주에게 몹쓸 짓을 한 대가로 전신 불구자를 만들었던 걸 기억하며 기남은 담담한 표정으로 박흥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쩔래?”
“뭐가 어째?”
“그래도 집안일인데 제수씨한텐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말이야 하겠지만 신경 쓰지 말고 형 소신대로 해! 죄가 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당연하지! 형이 언제 누구 눈치 보고 누구 봐주고 그러는 사람이었나? 하던 대로 해 그냥!”
기남은 박흥식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왔다.
기남의 안색을 살피던 연주가 입을 열었다.
“밖에서 뭔가 안 좋은 일 있었어? 표정이 왜 그래?”
“어, 그게... 잠깐 여기 앉아 봐.”
기남이 연주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망설이는 기남의 태도에 연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 지우 관련한 일이야?”
“아니.”
“그럼 뭔데?”
“박재국이 지금 수사선상에 올랐는데 흥식이 형이 그 수사를 담당하게 됐어.”
“그래? 무슨 일인데?”
“알잖아. 박재국 하는 일. 그런데 이번엔 좀 많이 심각한 거 같아.”
“...”
“철거 현장 불법 주거침입 뭐 그 정도가 아닌가 봐.”
“그럼, 뭔데?”
“어린애들까지 폭행했고, 성폭행에 살인 까지래!”
“뭐? 성폭행? 살인? 박재국이 그랬다는 거야? 아님 밑에 있는 깡패가 그랬다는 거야?”
“애들 폭행은 똘마니들이 했는데 성폭행은 박재국이 했고, 살인은 당연히 박재국이 오더 내린 거지.”
“...”
“장모님 아시면”
“그런 사람인 거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뭘.”
연주가 긴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입을 뗐다.
“지우 데뷔하기도 전인데 우리 지우한테 불똥이 튀면 안 될 텐데...”
“지우야 얼굴도 공개하지 않고 활동할 거니까 상관은 없는데, 문제는 말이야.”
연주가 기남을 바라봤다.
“나와 흥식이 형 관계를 아니까 또 뭔 수를 써서라도 막아달라고 먼저 지우나 당신을 압박할 거 같은 게 문제지.”
“절대 안 되지! 왜 우리가 그 인간을!”
“그다음은 또 지우나 당신을 이용해서 날 압박하겠다고 들면 골치 아파지니까.”
연주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어쩌지? 나야 그렇다고 해도 우리 지우 꿈에 부풀어 있는데 다 망쳐버리면?”
“그럼 안 되겠지?”
기남은 결심했다.
이번 생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박재국은 자기가 손을 볼 수밖에 없다고.
이번엔 예상을 깨고 박재국이 직접 기남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취해왔다.
기남은 만남을 수락하며 박재국에게 둘이서만 조용히 만나자고 제의했다.
박재국이 호탕하게 그러자고 했다.
둘은 인적이 드문 밤에 박재국 회사가 맡은 철거 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기남이 먼저 현장에 도착해 현장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곧이어 직접 박재국이 차를 운전하고 현장에 도착했다.
“좋은 데 다 놔두고 왜 이런 데서 보자는 거야?”
박재국이 전화 통화 때와는 다르게 투정을 부렸다.
“여기 좋잖아요? 아버님 피와 땀의 현장인데.”
“피와 땀은 씨 X! 먹고 살려니 할 수 없이 하는 거지 나도 이런 일 이제 지겹다!”
“그 말씀 정말이세요?”
“말해 뭘 해! 당연하지!”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뭘?”
“왜 힘없는 사람들 괴롭히고 할머니 모시고 착하게 사는 어린애를 건드리셨냐고요?”
“뭐? 뭔 소리야?”
“다 알고 있습니다. 직접 말씀해 보세요. 왜 그랬는지. 여자라면 주위에 넘쳐나지 않나요?”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난 네 장인이야! 장인!”
“그렇죠. 내 아내의 의붓아버지고 내가 사랑하는 지우 아버지 맞죠. 그건 그거고. 당장 대답해 봐!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기남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자, 박재국이 움찔하더니 곧 다시 본색을 드러냈다.
“흥! 이런 데서 보자고 한 이유가 있었구먼! 그래서? 네가 따져서 뭐 어쩔 건데?”
“한 짓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뭐? 뭐라는 거야 지금?”
순간 박재국의 두 눈앞에 불꽃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