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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분 소피아 Mar 26. 2019

수선화는 내게 '자기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수선화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어린 시절,  방학 때, 서울에서 시골 할머니 댁에 가면 꽃밭의 꽃들이 김밥 옆구리터지듯 미어터지는 것같았다.

맨드라미, 채송화, 분꽃, 과꽃, 키다리 국화(겹꽃 삼잎국화), 백일홍, 해바라기, 나팔꽃 등이 지금도 기억의 집에 남아 있다.

내게 컬러감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순전히 할머니 덕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웃들이 땟거리를 위해 매진할 때 할머니는 어린 손녀딸의 영혼을 위해 그 큰 꽃밭을 가꾸시고 참외를 심고 원두막까지 지어놓으셨다.

나에게 그나마 알량한 정서가 남아 글을 쓸 수 있는 것 또한 할머니 덕이 크다.     

할머니의 꽃밭은 내 정서에 촉촉한 물기를 뿌려주었고, 거름과도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을 머리가 다 크고 나서야 알았다.


귀농하고 꽃밭을 만들 때, 할머니 꽃밭만 한 평수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정서를 대물림 해 주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집 앞에 죽비처럼 길다란 큰 꽃밭을 만들었다.   

팔자에 없는 이 평수가 내겐 버겁다는 것을 꽃밭이 쑥대밭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작년 봄, 화분 수선화를 선물로 받아 그 덕에 노란 눈부신 봄을 누렸었다.

꽃이 지고 내 꽃밭에 수선화 구근을 심기로 했다.

예전에 한 번 심었다가 골로 보낸 경력이 있는지라 망설임이 컸다.

혹여 겨울에 동상 걸릴까 봐 꽃밭 중에서도 햇살이 잘 드는 목 좋은 자리를 골랐다.

꽃삽으로 깊게 구덩이를 파고 탱자알보다 작은 구근을 보물처럼 묻어두었다.

그리고 흙 이불을 도톰하게 덮어주고 추위에도 쫄지 말라고 문패도 달아주었다.     

사실 내가 귀농해서 사는 산중은 워낙 해발이 높아 저녁이면 코가 시리도록 춥다.


수선화 구근이 겨우내 목숨줄을 부지할 확률 반, 놓을 확률 반이었다.

그런데 한 달간의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오니 언 땅을 뚫고 신생아 발톱만 한 파릇한 싹을 내밀고는 나를 반겼다.

“너, 살아있었구나. 반가워.”     


수선화는 요즘 내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해. ‘자기 사랑‘ 말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거야.“라고 들려준다.  

   

어느 날은 “여러 개의 인편이 겹겹이 내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너도 너 자신을 그렇게 스스로 보호하고 사랑해야 해.”라고 일깨워준다.

이제는 이명처럼 그 말이 내 귓가를 맴돈다.     

수선화 집이 찌그러든 것은 옆구리에 싹이 나온 것이 상사화 싹이기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로 주야장천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수선화가 일러준 대로 이제부터는 나로 살려고 한다.    

 

오늘은  수선화의 집을 만들어 주었다.

반질반질하고 이쁜 돌을 골라 수선화네 집 담을 둘러쳐 주었다.

그 작은 다락방과 같은 공간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얹어 돌담을 둘렀다. 내 영혼에 돌담을 쌓듯...     

그리고 빛바랜 문패를 버리고 새 문패도 달아주는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3월의  눈보라 치는 산골, 이제 막 얼굴 내민 수선화 싹이 걱정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발이 굵어지고 있다.

4월에도 폭설이 내리는 산중이니 이상할 것은 없다만 혹여 이 여린 수선화가 동상 걸릴까 불안했다.

어쩐다지?

비닐로 미니 하우스를 만들어 줄까?     

그러다 그대로 두기로 했다.

‘수선화는 이제 해마다 이런 눈보라를 견뎌야 하니까. 지금 내가 보호해주면 그 험한 겨울을 다시 날 수가 없어. 또 나를 가르칠 정도로 의지가 강하니까 그대로 두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밤중이 되자 산골의 3월 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결국 양말을 겹겹이 신고 손전등 들고나가보았다.

걱정과는 달리 씩씩하게 잘 견디고 있었다.     


‘그래, 수선화야, 네가 그렇게 스스로 잘 견디며 너를 사랑하듯이 나도 지금의 나를 사랑하며 뚜벅뚜벅 길을 갈게. 잘 자렴.’     

요즘은 수선화가 내 스승이다.    

 


그대는 어떤 스승을 지척에 두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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