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살아남기
돌고 돌아 원래의 채용 목적인 사무보조의 업무를 받았다.
회사는 학교에 급식 식자재를 납품하는 사업이 메인이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식당으로 보이는 건물이지만 이곳에는 사무실과 작업장과 물류창고가 함께 있다. 사무실에서 나는 직원들이 바빠서 처리하지 못한 전표나 자료를 시스템에 입력을 해준다. 그리고 매달 입찰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과거 일부 학교와 업체들 간에 뒷돈을 주고받으며 부실 식자래를 납품했던 사례들이 뉴스에 몇 번 나온 후 업체 선정에 공정성을 주기 위해 각 학교들은 나라에서 지정한 사이트를 통해 공개입찰 형태로 업체를 선정한다. 매달 선정하는 학교도 있고, 2개월마다 또는 분기별로 신청하는 학교도 있고, 시 외곽의 작은 학교들은 주변 학교들과 연합해서 한 업체를 선정하기도 한다. 업체가 선정이 되면 학교마다 학부모위원들이 와서 현장답사를 하고 학교 행정실과 관련 서류 등록이 끝나면 계약된 기간 동안 식자재를 납품한다.
식자재도 한 업체에서 다양한 종류를 납품하는 것이 아니라 육류, 수산물, 쌀, 농산물, 공산품 등으로 분야가 나뉘어 있고, 시도별로 업체 선정 기준에도 약간이 차이가 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육류를 취급하고 있는데 매월 학교마다 입찰공고가 뜨면 제시된 금액에 회사가 입찰이 가능한지 보기 위해 만든 파일이 있는데 거기에 입력될 기초자료를 작성해서 팀장에게 전달한다.
나는 매일 입찰공고 내역을 확인해 입찰 마감일과 학교명을 리스트로 정리하고 각 학교에서 제시한 현품 설명서를 다운로드하여 각 항목별 금액을 입력하여 예상 단가를 계산해서 리스트에 기입한다. 그렇게 정리된 리스트는 입찰 마감 하루 전날까지 팀장에게 전달하는데 월 초에는 거의 입찰이 없다가 중순부터 슬슬 늘기 시작해 월말에 한꺼번에 몰려서 많을 때는 하루에 100개가 넘는 학교의 자료를 입력하느라 근무시간이 부족해 초과근무를 할 때도 있고, 유치원에 아이를 늦게 데리러 간다고 말해놓고도 시간이 부족해 결국 집으로 싸들고 와서 까지 입력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새 학년을 앞둔 2월에는 모든 학교들이 새로 계약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 일이 가장 많이 몰렸다.
나의 유일한 장점은 타자가 빠른 편이라는 것이다. 대학생 때 첫 도전 자격증이 워드프로세서 1급이었는데, 그때 실기시험을 보러 갔는데 대부분의 수험자가 초등학생들이어서 놀랐고, 그 틈에서 시험을 치면서 나보다 빠른 아이들의 타자 소리에 놀라 첫 번째 실기시험을 망쳤었다. 그 뒤 타자연습에만 몰두해서 두 번째에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빠른 타자를 선보이며 실기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 도움도 되었고, 어느 정도 품목명과 단가가 익숙해진 뒤로는 전보다 입력속도가 붙어서 입찰이 아주 몰리는 기간이 아니면 오전에 자료입력을 마쳐놓고 오후에 대표님이 지시하신 업무를 병행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실수는 있는데,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한우 가격에 육우 가격 입력을 한다거나, 단위가 KG기준을 개당 단가로 넣는 등의 실수다. 학교 측에서 올려놓은 현품 설명서에 품목과 설명이 다를 경우에 이런 실수를 종종 하게 되어, 입력기간에는 매의 눈이 되어 엑셀 파일을 하염없이 째려보고 있다. 금액이 높은 건 문제가 안되는데 금액이 낮은 건 입찰이 되었을 경우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종종 팀장님께 안 좋은 소리도 들었지만, 이후에 내가 다른 업무를 맡게 되어 인수인계받았던 사람이 일주일도 못하고 떠났기도 했고, 나중에는 여러 명이서 분량을 나눠서 작업을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가 너무 일당백을 해냈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나는 아르바이트생임을 되새기며 자만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이 시기가 사무실 직원들과도 더욱 돈독해지고 마음도 편했던 시기였다. 나보다 늦게 입사한 직원들은 내가 아르바이트 생이라고 하면 모두 놀랄 정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나는 어느덧 회식도 자연스레 참석하고 때로는 직원들 퇴근하면 같이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다시는 없을 것 같던 시간이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늘 안주할 때가 위험한 법이라고, 어느 날 대표님이 불러 말씀하셨다.
"이제 몸풀기 끝났지? 본격적으로 일 좀 해보자."
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나는 그냥 지금이 좋다고, 사무보조로 남고 싶다고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도 일을 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