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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윤 Aug 04. 2024

나에겐 없었던 순간

자랑스러웠던 순간


내 인생에서 자랑스러웠던 순간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일상의 뿌듯함이나, 보람된 일은 있어도 자랑스러운 일이라니.. 다들 인생의 한 순간정도는 자랑할 만한 일이 있던데, 내가 놓치고 있는 일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중3 때 마음먹고 공부해서 갑자기 상위권으로 진입한 일? 합창부 악장으로써 고등 합창대회에서 1등 한 일? 공대를 뒤로하고 음악입시 8개월 준비하고 음대로 전향한 것? 집이 망했을 때 어린 동생 대신 생활을 책임졌던 일? 큰 어려움 없이 우아하게(?) 아들 둘 순산한 일? 수포자인 학생들을 무사히 대학까지 보낸 일들? 이혼 후 혼자힘으로 개인회생절차 따위 없이 3년 만에 1억 넘는 빚을 혼자 다 갚은 일? 글쎄... 그 무엇도 자랑스럽지가 않다. 그냥 열심히 살았고, 부끄럽지 않은 일들이지, 자랑스러울  일인가?

40년 넘게 산 나의 인생 중 이렇게 내세울 게 없는 내가 좀.. 쭈그러든다. 


중3 때 엄마가 고생 안 하고 살려면 인문계는 나와야 한다 해서 (집안이 모두 공대출신인 부모님의 프레임)  그제야 공부를 열심히 해봤고, 합창부는 내가 원해서 들어갔지만 악장이란 역할은 선배들이 그다음 해의 악장을 뽑는 관례에 의해 내 것이 되었을 뿐 내가 원했던 역할은 아니었다. 아이들 둘을 낳은 것은 계획한 일이긴 했으나, 나는 이혼을 한 죄로 그 조차 나의 자랑이 되지는 못하고,  학생들을 대학 보내는 것은 내 업무의 성과일 뿐 내 개인의 자랑스러움으로 치환되기는 어렵다. 결혼생활 중 생긴 모든 빚은 정확히 나누어야 했지만, 재산 분할 소송이니 뭐니 복잡한 절차를 거칠 기력조차 없어서 그냥 내가 양육비를 대신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 책임의 도리를 다 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보니, 공대에서 음대로 전향한 일 말고는 내가 계획하고 실행한 일이 없는 것 같다. 그 조차도 현실과 타협하며 살다 보니 아직 음악에 대한 삶도 아직 미완성이다. 나에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해결만 하고 살아온 일들이다 보니 내 앞에 닥친 해결의 뿌듯함만 남았지 자랑스럽거나 만족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이너스의 삶에서 겨우 제로베이스를 찾았다는 정도..


겨우 나의 그라운드를 다시 밟았을 때 삶의 공허함이 또 찾아왔다. 너무 먼 길을 혼자 달려온 느낌에, 이혼과 함께 정리된 나의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 잠시 멈추었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 순간의 선택의 결과들로 지금의 내가 되어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우울증을 처음에 인정하지 못했듯 지금의 나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미래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억지로 살아온 나의 삶의 페이스부터 바꾸고 싶다. 나의 체력, 나의 꿈, 나의 능력.. 제대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게 하나씩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는 스몰 스텝을 밟아 나가면, 언젠간 나도 나의 자랑스러운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겠지? 지금까지 자랑스러울 게 없었다면 앞으로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만들면 되지..

'난 널 믿어!' 내가 용기 없는 나에게 호흡을 불어넣는다. '자랑스러운 내가 되자!' 호기롭게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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