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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Aug 10. 2016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

실재와 가상이 뒤엉킨 틈새에서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다.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1871년 피렌체의 한 성당에서 그림 한 점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 작품은 이탈리아 화가 귀도 레니의 작품,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뛰어난 예술작품을 마주했을 때 정신적 흥분이나 물리적 충격을 겪는 일이 종종 있어왔지만, 이를 부르는 명칭이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스탕달의 사건 이후, 이러한 증상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Portrait of Beatrice Cenci

  물론 모든 사람이 스탕달처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그런 감수성을 자극할만한 대단한 예술작품을 평생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스탕달 신드롬을 겪지 못했다고 해서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증상을 겪지 않더라도, 훌륭한 예술작품을 바로 눈앞에서 감상하는 일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대단한 경험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은 바로 오늘, 한 전시장에서의 이야기이다.


  분명 미술관인듯 한데, 조명이 상당히 어둡다. 마치 영화관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을 옮겨온 듯, 타원형의 전시장에 모네의 수련 연작이 커다랗게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화면의 연못에 물결이 일고 물고기가 헤엄치며, 수련은 전시장에 흐르는 음악에 맞춘 듯 살며시 바람에 흔들린다. 유화 작품이 아니라 원작에 약간의 변형을 가미한 디지털 작품을 스크린에서 상영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열렸던 이 전시는 80-90% 정도가 이러한 디지털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어 전시 기간을 두 차례나 연장했고, 현재는 광주에서 같은 구성의 전시를 열고 있다.


<모네 - 빛을 그리다>전

  최근 몇 년 사이에 앞서 모네, 반고흐, 헤르만 헤세의 그림전 등 ‘컨버전스 아트( Convergence Art)’를 활용한 명화 전시가 종종 열리고 있다. 이 전시들은 흥행 성적도 꽤 좋은 편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모네 전시는 내부수익률 30-40%를 기대하며, 원작 전시의 수익률을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벨, ''컨버전스 아트' 모네展, IRR 40% 달성 예상', 2016-07-13)


  ‘컨버전스 아트’란 예술과 IT미디어를 결합한 형태로, 명화를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한 뒤 고화질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전시장 벽면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 투사하는 방식이다. 이미지를 재가공하는 과정에서 움직임같은 효과를 추가하기도 하는데, 이로써 관람객들은 마치 명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험을 한다. 한편 세계 각국 소장처의 유명 작품들을 동시에 한 자리에 모으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을 ‘컨버전스 아트’를 활용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게다가 전시 주최측으로서는, 진품을 전시하기 위한 수고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경제적인 이점이 매우 크며, 이 전시를 하나의 콘텐츠로서 판매나 수출이 가능하다는 추가적인 매력까지 있다.


  이 외에 직접 가지 않고도 미술관을 관람할 수 있는 방법들도 있다. 구글이 2011년에 발표한 ‘구글 아트 프로젝트’에 접속하면 전 세계 미술관의 전시장을 360도 VR(Virtual Reality)로 관람이 가능하다.   VR이란 가상현실을 말하는데,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현실을 가상으로 구현한 것으로 인간의 감각을 활용하여 현실과 유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유저 인터페이스를 말한다.

구글 아트프로젝트 - 오르세 미술관

  현재 ‘구글 아트 프로젝트’에서는, 오르세 미술관이나 루브르 박물관 등 유명 미술관 및 박물관 다수를 다루고 있다.  사용자가 전시장의 내부에 입장하면, 실제로 관람하는 것처럼 전후좌우 360도로 이동이 가능한데, 구글 지도의 스트리트뷰와 유사한 기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구글은 여기에 더해 각 작품의 고해상도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전시장 안을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작품에 다가가 실제로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작품 이미지를 확대하면 붓터치까지 생생하게 보일 정도이다.


네이버 뮤지엄뷰 - 국립현대미술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네이버 뮤지엄뷰’가 오픈하여, 국내 미술관과 박물관에 온라인으로 입장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구글과 유사하게 네이버 지도를 이용한 서비스이다. 한편, 제주의 넥슨 컴퓨터 박물관에서도 홈페이지 내에서 ‘360 버추얼 뮤지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구글 아트 프로젝트'보다 서비스의 섬세함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종류의 기술이 발달한다면, 아마도 학생들이 미술관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 방학 숙제를 하는 것이 머지않아 당연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한편 기존의 전시장을 관람하거나 명화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시도도 있다. 올해 1월, 미국 플로리다의 달리미술관이 공개한 VR영상 ‘달리의 꿈(Dreams of Dali)’이 그것이다. 이 영상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이미지와 상징들을 이용하여,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였던 달리의 환상을 재현한 것이다. 유튜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 영상은, 스마트폰 터치를 이용해 360도로 시선을 움직이며 달리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고, VR전용 헤드셋을 이용하면 달리의 머릿 속에 직접 들어간 듯, 보다 현실적인 체험이 가능하다.



  심지어 공연 분야에서도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는 K-POP 홀로그램 공연이 대표적인데, YG엔터테인먼트나 SM엔터테인먼트 등 국내 최대의 연예기획사들이 삼성 에버랜드 등과 합작하여 홀로그램 공연을 제작하고 있다. 서울의 홀로그램 공연장에서는 지드래곤, 싸이, 소녀시대와 같은 스타들의 모습을 실사와 같이 재현하고, 이는 한국을 찾은 해외 한류팬들이 주로 소비한다. 이들은 직접 만나기 어려운 스타 대신 홀로그램으로 만든 그들의 모습과 콘서트를 상시 관람할 수 있다.

  그 외에 ‘구글 퍼포밍 아츠’에서는 ‘구글 아트 프로젝트’의 미술관 관람과 같은 방법으로 무용, 음악 등의 공연을 360도로 관람 가능한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직접 관람하기 어려운 해외 유명 공연들을에 앉아서 감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파리의 미술관을 관람하고, 진품 없이도 명화 전시가 가능하며, 공연도 마치 영화처럼 복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동시 상영까지 가능해진 시대. 과거에는 오로지 진품만이 온전한 대접을 받던 예술의 영역에도 과학기술의 힘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흥미로운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과연 기술로 재현한 전시나 공연을 감상하면서 실제 작품을 감상한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고 같은 깊이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전과 달라진 예술의 모습과 감상자의 경험들은 분명 경이롭지만, 이를 단순히 흥미로운 체험으로만 여기기에는 마음 한편이 무거운 이유이다. 혹시, 작품과 감상자가 직접 마주하는, 때때로 스탕달 신드롬을 앓을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영원히 끝난 것일까. 아니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는 간극일 뿐일까.


  ‘컨버전스 아트’를 활용한 모네의 전시는 분명 대중들에게 인기 있을 법하다. 어두운 공간에서 상영되는 모네의 그림은 여전히 아름답고, 여기에 약간의 움직임이 더해지면 당시 모네가 보았던 풍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으며, 전시장 내에는 편안한 음악까지 흐른다. 관람객들은 이 곳에서 잠깐의 힐링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적 경이 오로지 작품에서만 느낀 것인지, 아니면 어두운 조명과 편안한 음악, 작품에 대한 후가공까지 더해져 만들어진 평화로운 분위기가 한 몫 했던 것인지 구분할 필요는 있다. 사실 아무런 움직임이나 배경음악 없이 작품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때에도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감동을 주는 것이 원작의 힘이다. 또한 작품의 실제 크기나 마띠에르(matière)도 작품 감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띠에르는 재료, 소재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미술에서는 종이나 캔버스 등 바탕의 재질, 그림의 재료, 붓터치 등이 종합하여 만들어내는 화면의 물질감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같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일지라도 물감을 얇고 매끄럽게 발랐는지, 거친 붓터치로 여러 번 두껍게 물감을 발랐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디지털 이미지로는 이러한 작품의 물질감까지 느끼기 어렵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미 1930년대에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기술의 발달로 예술의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원본만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인 ‘아우라(aura)’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20세기 초에 사진의 등장으로 사라진 원본의 아우라는, 21세기에 이르러 미디어와 가상현실 기술의 발달로 재상실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때보다 더 발전된 기술로 현실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고 분위기를 더함으로써 감상자에게 실제 경험과 가상 경험 사이의 혼돈을 일으키며, 때때로 복제품을 감상하고도 원본을 감상한 것과 같은 착각을 느끼게도 한다. 현실과 가상이 뒤엉킨 사이에서 아우라도 제 자리를 잃은 모습이다.


 

광화문에서의 홀로그램 시위 (노컷뉴스)

  한편 이 '원본의 아우라'는 예술작품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 국제 인권 운동 단체 앰네스티는 집회 허가가 나지 않자, 현행법 위반을 피하고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대신 홀로그램을 이용하여 광화문에서 ‘유령시위’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석하는 대신 SNS를 통해 홀로그램 시위 영상을 공유하고 ‘좋아요’를 눌렀으며, 이는 큰 화젯거리이자 참신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집회나 시위의 본질은 참여자들이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낸다는 의미, 그리고 이들 간의 연대의식에 있다. 즉, 사람이 거기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무형의 것들이 그 본질을 이룬다. 홀로그램 시위가 일종의 아트 퍼포먼스처럼 현실의 역동을 끌어내기 위한 이벤트로서 기획되었다면 분명 제 역할을 다한 것이겠지만, 만약 이후에도 홀로그램 시위만 지속적으로 열리고 이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다면, 자칫 본질에서 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은 우려되는 지점이다.


  예술도 이와 비슷하다. 작품 감상은, 그저 사진으로 촬영한 작품 이미지를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그 본질은 감상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 그리고 시대와 교감하는 데에 있다. 디지털로 재현한 명화와 온라인으로 감상하는 미술관이 사람들을 실제 작품 앞으로 이끌어 더 나은 경험을 하게 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가상의 경험을 구분하지 않고 예술도 그저 시뮬라크르(simulacre, 원본이 없거나 원본보다 더 실제같은 복제물을 의미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결국 복제물들이 원본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라고 말한다.)로서 소비하게 된다면, 우리는 언젠가 가상의 경험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상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 역시존재한다. 장소와 시간 등 물리적 조건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예술작품에 더 대중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된 것은 확실히 과학기술이 발전이 가져온 긍정적인 면이다. 한편 작가의 세계관을 더 현실감 있는 시각적 방법으로 구현함으로써 작가와 작품에 대해 더 깊은 이해도 가능하게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 VR영상이 좋은 예시이다.  작가의 세계관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하며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것이다. 또 저널리즘에 VR이 이용되는 경우 더 현장감 있는 상황 전달이 가능하여 오히려 본질에 가까워지는 효과가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현대의 예술 작가들 역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더 명확히 이끌어낼 수 있는 도구로서 가상현실이나 미디어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그녀>


  영화 ‘그녀’에서, 사람들과의소통에 어려움을 겪던 주인공 시어도어는 인공지능인 사만다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무한한 지능을 가진 사만다는 자신이 보기에 너무도 더딘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결국 그를 떠난다. 역설적으로, 시어도어는 사만다를 떠나보낸 후에야 친구와 옥상에서 노을을 바라보고, 서로 소통하지 못했던 전처에게 편지를 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어도어가 디지털 존재 사만다를 통해 소통을 배웠지만 그 관계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그 소통능력으로 실재하는 인간과 아날로그의 관계를 다시 맺으며 삶의 다음 단계로 걸음을 내딛었다는 점이다.


  그처럼,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구글의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결을 기억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우리는 4승을 한 인공지능보다 밤새 연구를 거듭하고 어렵게 버텨내며 초췌한 얼굴로 마침내 1승을 해낸, 그리고 다음 대결을 위해 투지를 다지는 인간에게 감동을 느낀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진짜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때문에 과학기술은 예술을 대체하기 보다는 이를 보조하는 존재여야 한다.


  과학기술이 원본을 모방한 겉모습만을 반복해 재현하고, 결국 실재와 가상을 혼돈하게 하는 데에만 그친다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예술의 본질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예술과 감상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기술의 화려함에 가려 예술의 본래의 빛을 잃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은 물론, 우리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과 기술은 그것이 가진 창의성에 기반하여 전통적 예술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예술은 이에 화답함으로써 서로 합일을 이루어 기존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통섭이 필요하다.  예술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 기술의 놀라움만큼, 예술도 놀라워져야 한다. 그것이 각자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법이다.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그 기술을 예술에 더하는 방법에 있어 조금  더 진지한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이를 탄탄하게 뒷받침할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6년 4월호에 기고한 것을 일부 수정 및 생략하였음을 밝힙니다. 지면에 게재된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www.ilemonde.com을 방문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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