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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Feb 15. 2020

엄마는 보이스피싱을 당했고 아빠는 웃었다.

우리가 인생 공부 하나는 제대로 하지 않느냐면서

"검찰청 첨단범죄수사 2부 김XX입니다."


이젠 소설 속 클리셰보다 진부한 초반 전개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도 않았다. 보이스피싱이었던 것이다. 


신고가 무의미하다는 번호를 보고 있으려니 우리 가족에 얽힌 거대한 사건 하나가 생각난다. 




엄마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10억에 달하는 대부업 빚더미 위에 나앉은 상황이었다. 더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는 것이 없어 국가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서서히 침몰하던 배와 다름없었다. 그 상황에서 엄마는 저금리 대출로 바꿔주겠다는 보이스피싱에 속아 n 천만 원을 더 잃어버렸다. 마지막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몽땅 잃은 셈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나는 모든 사건이 벌어진 다음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빠는 소식을 전하며 웃었다. '그래도 그만한 게 어디냐?' 면서. 너무 당당한 아빠의 태도에 홀랑 넘어가 나도 웃어버렸다. 



아빠는 우리 집 빚이 10억이든 10억 9천이든 똑같지 않냐며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멘트가 너무 새삼스러워서 충격받았다. 그래, 10억이든 11억이든 우리는 눈 앞이 깜깜할 정도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이제와 몇천만 원 사기당한 것쯤이야.


재발 방지를 핑계로 엄마를 야단치려던 입을 슬쩍 다물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나는 제삼자이고 3자는 무릇 아무렇게나 입을 나불대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나는 엄마의 어깨를 감싸안는 상상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보이스피싱 사건에 대한 담론을 끝냈다. 





아빠의 그 말이 엄마의 죄책감을 없애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여리고 모든 일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니까, 아마 여러 날을 자책하며 울었으리라. 


다만 나는 아직도 아빠의 그 말에 감동받는다. 금액이 어쩌고 하는 그 부분 말고. 당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른 채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는 그 시선에 공감한다. 거기서 엄마에게 화를 냈다면 누구 하나 얻는 것 없었겠지.


아빠의 재치는 팍팍한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을 웃게 했고 (어이없는 너털웃음이었지만) 엄마에게 조막만 한 위로를 전달했을 것이다. 또 나는 가족이 연대를 맺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손을 잡는 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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