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나 중년에 접어들면서 달라지는 점은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는 점이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던 열망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어느새 조금씩 마음의 무게가 옮겨갔다. 성취보다는 나눔이, 탐험보다는 안정이 좋아지는 내가 됨을 느낀다. 멀리 떠나는 여행보다 집 주변에서 만나는 매일의 산책이 고맙고 소중하다. 나의 일상을 충만하게 가꾸어 가는 일. 그것만큼 기쁨과 행복, 평안으로 삶을 가득 채우는 것이 또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일상을 채우면서 그 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기쁨’과 관련된 그림책을 떠올려보자 웬일인지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일상이 주는 기쁨을 잊고 산지가 오래되어서일까. 그림책 읽기에 소홀했던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맞다! 나에겐 <미스 럼피우스>가 있었지.’
파스텔 톤의 초록빛으로 가득한 풍경 가운데 한 나이든 여인이 색색깔의 아름다운 꽃을 살포시 어루만지고 있다. 저 멀리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그녀의 작은 집도 보인다. <미스 럼피우스>의 표지이다.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이렇게 그저 ‘나이든 여인’ 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도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머나먼 이야기를 듣던 꼬꼬마 시절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도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 볼 거에요. 할머니가 되면 바닷가에 와서 살거고요.”
그런 꼬마 아가씨에게 할아버지는 그건 아주 좋은 생각이며 거기에 더해 네가 할 일이 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건 바로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른이 된 꼬마 아가씨 앨리스는 할아버지에게 말했던 세 가지 일을 하기 시작한다. 집을 떠나 사서가 된 앨리스는 이제 주변으로부터 ‘미스 럼피우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자신의 삶의 반경을 점점 넓혀 나간다. 공원 식물원에서 느낀 재스민 향기에 진짜 열대의 섬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정글, 만년설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너른 세상을 여행하며 어느 곳을 가든 친구를 사귀며 풍요로운 삶을 즐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오랜 여행으로 무리한 탓인지, 나이가 든 탓인지 어쩌면 둘 다의 이유로 미스 럼피우스는 이제 바닷가에 살 집을 구할 때가 된 것을 직감한다. 장엄하게 떠오르고 지는 해를 보며 집 주위에 정원을 꾸미던 그녀는 벅찬 행복을 느낀다. 세상을 아름답게 할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미 세상은 너무 멋지다고 느끼며 세상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무언가를 아직 알지 못한다.
다음 해 봄, 몸이 아파 침대에서만 누워 지내던 럼피우스는 지난 여름에 뿌렸던 루핀 꽃 씨앗이 어느새 마당에 퍼져 아름답게 정원을 장식한 것을 발견하곤 다음해에 더 많은 꽃을 뿌릴 것을 기약한다. 힘들었던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럼피우스는 많이 건강해졌고 다시 산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올라간 언덕에서 그녀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언덕 너머에는 푸른빛, 보랏빛, 장밋빛 루핀 꽃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표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 말이다!
그녀는 기쁨에 가득차서 소리쳤다.
“바람이야. 바람이 우리집 정원에서 여기까지 꽃씨를 싣고 온 거야! 물론 새들도 도왔겠지!”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가서 꽃씨 카달로그를 가지고 가장 좋은 꽃씨 가게로 가서 루핀 꽃을 5부셸, 그러니까 무려 180리터를 사온다. 그녀는 그 여름 내내 주머니에 꽃씨를 가득 넣고 들판이며 언덕을 돌아다니며 꽃씨를 뿌린다. 그러자 아프기만 하던 허리도 더 이상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정신 나간 늙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해 봄이 되자 온 마을에는 루핀 꽃으로 가득했다. 언덕도, 학교도, 고속도로와 시골길을 따라서도 꽃이 피었다. 마을은 온통 환한 꽃밭이 되었다. 그녀는 가장 어려웠던 세 번째 일을 해낸 것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그 세 번째 일은 누구에게나 각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막연하기만 할 것 같고 대단하기만 할 것 같은 그 일은, 자신을 알아가고 찾아가는 일에서 시작해 볼만하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좋아하는 일로 어떻게 세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지는 각자의 몫이고 선택이다. 함께 나누는 즐거움은 느껴본 자만이 알게 되는 큰 기쁨이니까.
힘들고 아픈 시간에 혼자만의 세상에 매몰되지 않고, 아름다운 소망을 지닐 수 있는 그녀가 대단했다. 그리고 그 소망을 현실화 시키는 그녀의 행동력과 추진력에 매료되었다. 나를 잘 모르는 남들의 시선과 가시 돋친 말에도 굴하지 않고 내가 하는 일에 소신을 가지고 꾸준히 해 나갈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기쁘고도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