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처음이라
글쓰기는 다 어렵다지만, 요즘 들어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회사 보고서다. 회사가 요구하는 형식에 맞춘 글쓰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그런데 회사 보고서 작업보다 어려운 글쓰기를 하나 더 찾았다. 물론 대부분의 글쓰기는 어렵다. 카톡으로 주고받을 때도 종종 어떻게 해야 오해 없이 의도를 잘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지우고 다시 쓰기도 한다.
얼마 전 드라마 <잔혹한 인턴>을 보며 라미란 배우님의 역할에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나 역시 꽤 오랜 기간 일을 쉬었어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열정이 끓어 넘쳤으니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서 충성을 다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마도 그게 내 자신감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극 중 라미란 배우님처럼 매번 생각처럼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았고, 드라마 속 주인공이 마치 내 모습인 양 열심히 봤다. 그리고 극 중 그녀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것처럼 해보자는 힘도 얻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런 극적인 어려움과 갈등은 없었다.
회사에서 쓰는 기획안, 보고서가 오랜만에 하는 작업이라 헤맸다면, 번역은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어려웠다. 회사와 계약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번역 일을 하게 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한국 회사지만, 베트남 직원들이 훨씬 더 많은 회사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업무에 번역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일이 진행이 되었고, 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팀에 프로젝트를 제안하기 위한 과정에서도 번역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은 다른 부서 번역 작업도 지원해야 했다.
번역 일을 전문적으로 해보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본 적이 20대 초반에 딱 일주일 정도 있었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생각했을 때다. 그 일주일 동안 퇴근하면 방에 틀어박혀 유학 정보만 찾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통번역이 유망한 직업이었던 것 같고,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미국 가서 영어를 잘 배워 번역 작가 일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잠시잠깐 꿈은 거창했지만, 영어도 잘 못하고 취업 1년 차에 벌어놓은 돈 없이 부모님께 유학 가겠다는 말을 하기가 죄송해서 일주일 만에 미국 유학의 꿈은 포기했다. 대신 현실에 눈을 뜨고 열심히 일했다. 일을 하니 돈이 들어왔고, 힘든 시간도 결국은 흘러갔다. 솔직하게는 진짜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도피처가 필요했었다. 미국은 아주 비싼 도피처가 될 뻔했다. 그리고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떠날 용기도 없었다.
번역이라 하니 지금의 내가 베트남어나 영어를 잘한다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온라인 번역기의 도움을 받고 있다. 무미건조하게 번역된 글을 읽고, 종종 의도와 다른 엉뚱한 번역 결과물 앞에서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구글 번역을 비롯한 다양한 번역기를 잘 활용할 수 있게 노력하는 중이다.
책 번역 작가님들, 외화 번역 작가님들 모두 존경한다.
그래도 계속해서 하다 보니 나름의 요령도 생겼다. 온라인 번역기를 사용할 때는 일단 번역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내용을 알고 있으면 번역 작업이 더 편하다. 오역을 고친다거나, 의역과 직역할 부분을 찾아 수정하기도 수월하다. 다행히 베트남어에 대해 완전한 까막눈은 아니어서 어느 문장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얼마 전에는 DeepL이라는 똑똑한 AI 번역 앱을 찾아 업무 효율이 더 높아졌다. 언어를 의역해주는 앱인데, 영어를 한국어로 바꿨을 때 구글 번역보다 훨씬 매끄럽게 번역해 준다. 베트남어 번역이 지원되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유용하게 활용 중이다.
쓰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베트남어와 맥락과 내용은 같지만, 한국어로 읽어도 단 한 곳도 어색하게 읽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 보고 번역한 글을 또 보는 수밖에 없다. 확실한 정보인지도 확인해야 하고, 한국과 베트남의 서로 다른 문화 차이도 이해해야 한다. 적당히 하면 여지없이 티가 나서 수정 요청이 들어온다. 어휘 하나가 문제의 소지가 될 수도 있으니 회사에서의 글쓰기는 뭐든 다 어렵고 조심스럽다. 그래도 해내고 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기. 그 끈기와 역량은 힘든 방송국 생활에서 다 배웠다. 1년 차 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일하길 잘했다.
나 참 잘했다. 그때도.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