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soul
애니메이션을 유독 좋아한다. 특히 디즈니, 픽사, 지브리 작품들을 좋아하는데, 그 상상력, 개연성, 스토리 나열, 철학, 그래픽 표현 등을 보고 있자면 정말인지 오감이 다 즐겁다. 유독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건 표현의 한계가 없다는 점이다. 그림으론 그 어떤 것이든 시각화시킬 수 있다. 표현할 수 있다. 전해 주고자 하는 여러 스토리들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사후 세계라던지, 머릿속 상상의 공간이라던지, 사물을 의인화시키고 우주 행성에 사는 아주 먼 미래도 어렵지 않다.) 풀어낼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거기에 OST까지. 정말인지 그림+음악+소설이 합쳐져 시너지를 내는 애니메이션은 늘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개봉작에 '애니메이션'이라 하면 일단은 관심을 가지고 예고편을 보곤 한다. 각 스튜디오마다 전형적인 그들만의 전개가 있는데 디즈니 x 픽사는 전형적인 권선징악 성 성질과 가족드라마다운 감동이 함께 한다. 그 감동은 이 나이가 되도록 눈물을 찔끔하게 하며 파생되는 여러 벅찬 감정들을 선사한다. 그 감정들은 나의 서사에 녹아들어 나의 모든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메시지는 가슴에 남아 든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의 마음을 흔든 애니메이션이 찾아왔다. 픽사의 'SOUL'.
2021년이 시작 한진 이제야 한 달이 좀 넘었지만, 올해 내 마음속의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인생에 재즈를 빼면 시체인 조 가드너(남자 주인공)가 오랫동안 바라오던 꿈을 이룰'뻔'한 최고의 날에 맨홀 구멍에 빠져 사후 세계로 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동경하던 재즈 가수의 밴드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여 공연하기 위해 다시 지구로 가려 고군분투한다.
소멸의 세계인 그레이트 애프터로 가버리면 정말 끝이다. 그곳을 벗어나려다 차원 경계를 넘어 그레이트 비포로 떨어지게 된다. 이곳은 신규 영혼들이 태어나 지상에 가기 전에 성격이나 특기 등 교육을 받는 곳으로 어쩌다 보니 영혼들의 관심사를 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멘토가 되는데 하필이며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22호의 멘토가 된다. 지상으로 가기 위해선 스파크(열정, 재능)를 채워야 하고, 뭘 해도 심드렁한 22호랑 같이 또 어쩌다 보니 지구로 떨어지게 된다.
하필 떨어진 지구에서 조 가드너의 영혼은 고양이의 몸으로 들어가고, 22호는 조 가드너의 몸으로 들어갔다. 조 가드너는 어찌 됐든 자기가 평생 바라온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22호를 달래며 밴드 연주회를 하기 위해 찾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22호는 삶을 느낀다. 그러던 중 매일 영혼을 세는 테리라는 회계사에게 영혼 한 명이 빈다는 것을 들켰고, 테리는 이 둘을 잡아 돌아온다. 그런데 22호의 통행증에 스파크가 생겼다. 무엇 때문에 스파크가 생겼는지 몰라 당황해하고, 조 가드너는 내 몸이기 때문이라며 소리를 치고, 화가 난 22호가 집어던지 통행증을 들고는 마음은 찝찝하지만 인생의 다시없을 그 순간을 위해 지구로 내려간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기뻐 죽을 거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 조에게 동경하던 재즈 가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 물고기는 아이 든 물고기에게 물어보았다.
"전 바다라고 불리는 엄청난 것을 찾고 있어요."
나이 든 물고기가 말했다.
"바다? 그건 지금 네가 있는 곳이야."
그러자 어린 물고기는 말했다.
"여기가 바다라고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집에 돌아온 조는 가만히 앉아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내 마음속 최고의 장면이다. 지금의 깨달음과, 그간의 인생을 돌아보며 피아노를 치던 조는 몰입의 상태가 되어 그레이트 비포에 갔다. 그리곤 '난 한번 살아봤으니 괜찮아'라는 멋진 대사와 함께 22호에게 다시 통행증을 돌려주며 삶을 선물한다.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인생을 살아간다. 사후 세계가 실존하든 어떻든 기억은 망각되어 각자의 운명이란 걸 짊어지고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하다. 그 과정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늘 '인생의 목적'을 찾는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목적을 찾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매일같이 고민한다. 그걸 찾지 못하면 찾지 못하는 데로 고통이고, 찾았다 한들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길 또한 고통과 함께 한다. 그리고 운이 좋든, 죽을 만큼 노력을 했든 그걸 이룬 순간 나의 모든 삶의 행복은 영혼 할 거 같지만 절대 영혼 하지 않다.
왜? 그렇게 바라던 삶의 목적을 이뤘는데? 왜 행복은 영원하지 않을까.
대학에 합격해야 하고, 공모전에 당첨되어야 한다. 의사나 공무원 같은 특정 직업이 되어야 하고, 유명한 작가가 돼서 백만 부를 찍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목적은 인풀러언서 일수도 있으며 월 천만 원벌 기 일수도 있다. 뭐든 우리는 개개인의 '목적'이란 게 있고, 그것을 이루고 난 다음의 삶이 '진정한 나의 삶'이라 정의하는 게 일반적인 거 같다. 행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믿는 거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을, 나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다.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양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오로지 결괏값만을 보곤 한다.
하지만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심리학은 '행복 기준점 이론'으로 그 양상을 설명했고, '쾌락적응'으로 팩트를 굳혔다. 안타깝게도 특정 목적이 달성된후 도파민에 의한 쾌락은 강력하지만 영원하진 않다. 쾌락 호르몬답게 자극에 익숙해져 더 큰 자극을 원할 뿐이다. 22호가 지구에 내려가기 전 스파크는 그저 꿈이나 목적의 의미로만 여겨졌었는데, 22호가 지구로 내려와 겪은 하루의 에피소드들(피자맛, 거리를 걷는 것, 이발사의 이야기, 낙엽 잡기, 지하철에서 공연하는 사람, 엄마와의 화해 등)은 22호를 지구에 살아가고 싶게 만들었다. 특정한 목적을 찾지도 않았고 이루지도 않았지만 흩날리던 낙엽을 잡은 22호는 순간의 공기를 들이켰고, 그 순간의 풍경을 봤다. 스파크를 재능으로 채우지 않더라도 살고 있단 그 자체로도 스파크는 채워지는 것이었다. 스파크는 지구로 가기 위한 교육을 받는 그레이트 비포에서 정해지는 게 아니었다.
꿈은 희망이라는 것, 삶은 그 자체로 의미라는 것.
오로지 재즈 단원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만 살아가던 조와 달리 아픈 딸을 위해 교육에 돈이 많이 드는 수의사라는 꿈 대신 이발사를 택한 친구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한다. 반면 목적을 달성한 조는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 목적은 결코 행복의 모든 것이 아니다. 내가 행복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길을 가기 위해 흘러가는 나의 삶 자체를 돌보지 않는 우리는 그래서 슬프다. 힘들다. 괴롭고 삶이 버겁다 느낀다. 꿈을 설계하며 설레는 자체가 행복이고, 설령 뜻대로 되지 않을지 언정 그 길을 위해 걸어가는 크고 작은 나의 모든 에피소드들은 살아감 그 자체라서 행복한 것이다. 픽사의 전작품 인사이드 아웃에서 최고의 골칫덩어리였던 슬픔 이가 있었기에 행복이 진정으로 빛날 수 있었던 것처럼 살아감에 헛된 거라곤 없다. 물리적이든 감정적이든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조각은 그 자체로 의미이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길. 무심히 올라다 본 하늘의 아름다움에 감동해주길, 봄날에 따사로운 햇빛을 느껴주길, 용기 내 도전하는 순간을 기억하고 설사 실패했더라도 성장한 나를 바라봐 주길,
삶은 삶 그 자체라 아름다운 것임을 알아주길.
산다는 게 그런 거다. 행복은 내면만이 채워줄 수 있다. 영화 속 낙엽이 흩날릴 때 가슴이 울렁거렸다. 픽사는 정말 안 좋아하래야 안 좋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