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빈터베르크, 2012
‘영화비평에 대한 리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로 신형철이 2012년 덴마크영화<더 헌트>에 대해 쓴 글을 골랐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의 <더 헌트>는 여전히, 어쩌면 더욱 더 중요해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국내에서 재개봉되어 재담론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신형철은 문학평론가입니다. 때문에 그의 비평도 ‘신형철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칼럼에 속해, 영화의 서사부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뿐 아니라 많은 영화평론가들의 글도 영화의 서사를 많이 다룹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글로 쓰여진 대중적비평’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영상비평이라면 영화의 표현이나 형식적 특징을 다루기 수월하겠지만 글은 서사적 측면을 다루기에 적합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극영화’를 다룸에 있어 흔히 서사 같은 것은 ‘영화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간과될 수 없겠죠. 서사에 주목해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듯 같은 영화를 보고 받아들인 서사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이야기됩니다. 이미 영화 표현이나 형식까지 수렴해서 감상되고 해석된 각자의 ‘영화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화의 서사를 말한다고 해서 꼭 그 서사만을 따로 말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토마스 빈덴베르크 감독의 <더 헌트>에 대한 신형철의 <더 헌트>를 저의 <더 헌트>와 비교하면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겠습니다.
이 마을의 평화로운 한때를 보여주는 도입부 장면에서 남자들은 알몸으로 강물에 뛰어든다. 이 지역 공동체의 중심인물인 브룬(늘 모자와 안경을 쓴다), 단순하고 다혈질인 요한(얼굴이 희고 덩치가 크다), 그리고 테오와 루카스. (브룬의 집에 걸려 있는 그들의 유년 시절 사진이 알려주듯이) 그들은 이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랐다. 죽마고우여서 서로의 알몸에 거리낌이 없고, 수없이 뛰어든 강이어서 수심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서 테오와 루카스는 특히 막역한 사이여서 서로 숨길 것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전처와의 관계가 원만하다고 둘러대는 루카스에게 테오는 말한다. “거짓말 티 나.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네 눈이 씰룩거리거든.” (이 대사는 중요한데, 후반부에 나오듯이, 누명을 쓴 루카스가 테오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눈밖에 없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테오의 딸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평을 받고 있고, 경미한 강박증이 있어서 바닥에 그어진 선을 밟지 않고 걸으며, 불편한 상황에서는 입을 씰룩이며 말하는 이 소녀가 하필 아빠의 친구이자 유치원 선생님인 루카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더 헌트>에 대한 신형철의 서사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에 앞서 배경과 등장인물들을 짚는 것이라서 제가 받아들인 서사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루카스가 ‘메즈 미켈슨’이 맡은 주인공이고 그의 친구 테오와 테오의 딸, 클라라 이렇게 세 명으로 주요인물을 좁힐 순 있겠군요. (꼭 인용할 필요는 없는 부분이지만 영화내용을 기억 못하실까봐 그의 글로 대신하려 했습니다.)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아이답지 않은 애정을 표하자 루카스는 그 소녀를 부드럽게 거절한다. 상처를 입은 이 예민한 소녀는 유치원 원장 선생님에게 루카스가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와중에 (며칠 전에 그녀의 오빠 친구가 보여준 성인 남성의 성기 사진을 떠올리며) 루카스의 성기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 즉흥적인 거짓말은 이제 마을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추행했다고 판단한 원장은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아동심리전문가를 불러 클라라를 인터뷰하고, 루카스에게 출근 정지 명령을 내리고, 학부모 회의를 열어 추가 범죄 여부를 조사한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마치 ‘거짓기억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의 경우에서처럼,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이 자신도 유사한 일을 겪었노라고 제 부모에게 고백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필 멀런의 <프로이트와 거짓기억증후군>에 따르면, 정신치료나 상담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성추행을 ‘기억’해내는 이 기이한 증상은 1990년대 초반부터 보고되기 시작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루카스가 유치원 원장에게 뒤늦게 항의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루카스는 이미 아동성범죄자로 확정되었으니 이제는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비극이 펼쳐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신형철은 영화의 서사를(밑줄 그은 것) 원장은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고 좀 모호하게 표현합니다. 원장의 조치가 그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진짜 합리적이었는지는 제가 받아들인 서사로 비교해보겠습니다. 전날 밤 클라라는 원장에게 루카스 선생님이 싫다고 얘기하면서 그가 멍청하고 못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추도 달렸다고 말하는데, 원장이 웃으면서 너희 아빠, 오빠도 마찬가지라고 대꾸하자 클라라는 그의 것은 앞으로 뻗어있다고, 막대기처럼... 이라고 말하죠.
클라라의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거짓말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클라라는 앞서 오빠가 보여준 성기사진에, 자기애정을 거부한 루카스에 대한 서운함을 섞어 루카스가 바로 그 흉측한? 것의 임자일 거라고 상상한 바대로 말한 것일 수 있죠.
다음날 아침 원장은 루카스를 호출해 면담합니다. 원생 중 한 명이 루카스를 싫어하고 그 아이가 그의 은밀한 부위를 봤다고 말했다는 것까지 루카스에게 말해줍니다. 여기서 이미 뉘앙스의 확증이 발생합니다. 원장은 클라라가 말한 것이 상상한 것인지 본 것인지 확인하지 않고 본 거라고 뉘앙스를 확증합니다. ‘그 아이가 상상력이 뛰어나긴 하지만’이라고 원장 스스로 단서를 달았고 이로 미루어 원장이 클라라의 특성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됨에도 말이죠. 물론 원장은 그 원생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루카스는 그게 가능하겠냐고 완곡하게 반박하고 정확하게 뭐라 들었는지 묻지만 원장은 말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더 반박할 수 없어진 루카스에게 아직 결론나지 않았으니 내일부터 좀 쉬라고 말해둡니다.
원장은 곧장 아동심리전문가를 불러 클라라를 가운데 두고 조사를 시작합니다. 가해자로 의심되는 성인이 아동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할 수 있으니 루카스를 차단시켜 놓은 것까지는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원장과 심리전문가 두 명의 성인이 클라라를 둘러싸고 무언의 압박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 조사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심리전문가는 클라라에게 원장에게 했던 얘기를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클라라가 대꾸하지 않자 원장이 얘기를 해달라고 클라라에게 거듭 요청합니다. 클라라는 아무 말 한 적 없다고 한 번 부정합니다. 여기서 심리전문가는 그럼 원장이 지어낸 얘기니? 아니라면 니가 지어낸 얘기니? 라는 질문으로 둘 중 하나는 거짓이라는 식으로 상황을 일축해 버립니다. 클라라 입장에서는 자신이 상상한 걸 얘기했다 할지라도 이미 그건 본 것으로 뉘앙스가 확증되어 자신과 원장 둘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압박감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클라라는 자긴 지어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정말 지어낸 건 그녀가 아닐지 모릅니다.) 심리전문가와 원장은 다시 클라라에게 답변을 요청하고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심리전문가는 루카스의 그 부위를 봤다고 얘기한 게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클라라는 고개를 내젓습니다.(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자체에 대한 두 번째 부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심리전문가는 루카스가 한 짓을 말해달라고 라고 질문의 뉘앙스를 바꿔버립니다. (루카스가 뭔 짓을 하긴 했다는 걸로 또 뉘앙스가 확증되었죠.) 클라라가 나가서 놀고 싶다고 말하자 원장은 클라라를 달래고 심리전문가는 루카스가 유치원에서 그걸 보여줬냐고 범행의 ‘장소’를 묻습니다. 입을 다문 클라라를 지그시 바라보며 심리전문가가 클라라... 클라라... 답변을 재촉하자 클라라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음부터는 계속 심리전문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오빠가 보여준 성기사진과 루카스에 대한 서운함이 결합된 자신의 모호한 말이 원장에 의해 뉘앙스가 확증되고 또 심리전문가에 의해 뉘앙스가 확증되자 그걸 두 어른에 의해 확증된 사실로서 클라라는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해석의 단계에서만큼은 저 두 종류의 사냥이 유사해지기는 하지만 이 공통점이 차이점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광기’의 산물이라면 이 영화의 그것은 ‘이성’의 결과라는 것. 중세의 사제를 비난할 수는 있어도 이 영화의 전문가를 비난할 수는 없다. 후자의 행동은 아동성범죄라는 끔찍한 범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아이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일을 막기 위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최상의 선의와 최선의 지혜를 발휘해 만들어놓은 매뉴얼을 따른 것일 뿐이다. 다른 사건에서라면 이 매뉴얼은 우리의 시행착오를 막아줄 나침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항의하는 루카스에게 유치원 원장은 말한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자신이 거짓말을 했음을 뒤늦게 실토하는 클라라에게 그녀의 엄마는 말한다.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야.” 이런 믿음에는 어떠한 악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가 차분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한다. 그런데 누구도 잘못하고 있지 않은데,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성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합리적 부조리’라고 불러야 할까.
저는 앞서 인용한 문단과 위 문단 사이 한 문단을 생략했습니다. 생략한 문단에서 신형철은 중세 마녀재판의 ‘엉터리해석학’과 심리전문가의 유도질문을 비교하며 그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단(위 문단)에서는 둘 간의 유사성보다 차별성에 주목합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광기’의 산물이라면 이 영화의 그것은 ‘이성’의 결과라는 것.
그럴까요? 중세 마녀사냥은 오로지 광기의 산물이었을까요? 그 사람들 나름은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믿지 않았을까요? 심지어 그 광기에 이성적 추론과정은 섞여있지 않았을까요? 훨씬 중요한 질문은 이 영화의 그것이 오로지 ‘이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완벽하게 이성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장의 조치도, 심리전문가의 조사도... 하지만 완벽하게 이성적이지 않았다는 걸로 그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말한 조사과정에서 그냥 결론은 나버렸습니다. 원장은 학부모회의를 소집하여 루카스가 클라라에게 했다는 짓을 기정사실화하여 마을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루카스는 그 사실 자체를 알지못하고 그러므로 반박할 기회도 얻지 못합니다. 그는 마을공동체에 의해 차단당합니다.
설령 클라라가 분명하게 말했을지라도 루카스 또한 분명하게 반박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졌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왜냐면 그들은 공권력, 법 이전에 그들의 사적영역, 마을에서 그를 심판하고 사실상 처벌까지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로 의심되는 루카스가 그렇게 두려웠다면, 그래서 그의 말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면 애초에 공권력에 먼저 맡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들은 약자, 아이들을 우선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약자, 아이들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을 우선해서 행동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자에 대한 우선적인 공감과 감정이입은 항상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일까요? 그에 앞서 약자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은 혹시 약자에 대한 일방적인 공감과 감정이입은 아닐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며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듯, 물론 현실의 주체가 있으니 달라야만 하겠지만 실상 그 현실의 주체, 아이들을 온전한 주체로 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일방적인 공감과 감정이입은 아니었을까요?
‘이 영화의 그것은 이성의 결과’라고 말하는 신형철의 취지에는 아이들에 대한 보호, 약자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저는 이성적판단과 합리적과정에 약자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이 개입된다면, 그걸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재고해 봐야 하고, 또 약자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 자체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 진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 숙고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덧붙인 문제의식을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이 영화의 그것이 이성의 결과라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완벽하게 이성적이었거나 합리적이었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그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이성적일 수도 없고 합리적일 수 없다는 가장 중요한 이성적 성찰과 합리적 의심을 거의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합리적의심에 있어 그 모든 합리적의심 자체를 의심해봐야 할 가장 중요한 합리적의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완전히 비이성적인 결과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각자의 이성, 합리성의 한계를 의식하는 자기성찰은 가장 중요한 이성과 합리성이고 또 합리적의심에 대한 합리적의심은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가지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호한 건 모호한 대로,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대로 불명확한 여지를 남겨두고 그 여지를 유지했을 때 비로소 그걸 이성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그 여지를 ‘무죄추정의 원칙’이라고 법리화해 부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성의 결과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합리적부조리’란 역설로 부르기 이전에 두려움이 이성을 집어삼킨 부조리극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이성을 집어삼켰다면 결국 이 모든 건 또 하나의 보다 세련된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과연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던 이 영화는 이제 다른 가능성 하나를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능력은 때로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인간은 서로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 일단은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신형철이 언급하는 ‘진실’이란 영화 후반부 루카스가 클라라의 아버지 테오에게 자신의 눈을 보여주며 외치는 장면을 말합니다. “내 눈을 봐. 내 눈을 보라고. 뭐가 보여? 뭐가 보이기나 해?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그만 괴롭혀.” 신형철은 루카스의 눈에 아무것도 없었을지라도 거기에는 진실이 있었고 그 진실을 테오가 놓치지 않았다고 위 인용 위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반대로 말하고 싶군요. 거기에도 역시 진실은 없었다고요. 눈은 눈이었을 뿐이라고요. 만약 테오가 루카스의 눈에서 진실을 발견했다면 그 진실은 테오의 마음에서 또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또 제 마음의 진실에 따라 루카스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도 있습니다. 진실은 때로, 자신을 증명할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은 ‘진실’을 그리기 이전에 그 진실이 실은 함정은 아닌지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이성의 한계를 바라볼 정도로 충분히 이성적인 게 아닙니다. 마녀사냥으로부터 수백 년이 지났을 지라도 우리는 한계 너머가 아닌 한계 아래에 있습니다. 마녀사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영화에서도. 영화 밖 현실에서도.
<더 헌트>에 대한 신형철의 서사 일부에 저의 서사를 충돌시키는 게 영화에 대해서나, 영화 밖 현실에 대해서나 중요한 점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형철의 <더 헌트>에 대한 큰 맥락, 특히 결말에는 동의하며 그래서 그 값진 마지막 문장이 있는 결말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비록 이 영화가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비관적 결론이 거절하는 것은 낙관이지 희망이 아닐 것이다.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예컨대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