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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Feb 14. 2021

<여인의 향기 / 형사 서피코>

마틴 브레스트,1992,시드니 루멧,1973

 1992년작 <여인의 향기>의 이야기를 메인플롯, 서브플롯처럼 나누면

 A. 프랭크소령(알 파치노)의 딜레마: 시각장애인이 된 나... 죽느냐! 사느냐!

 B. 찰리(크리스 오도넬)의 딜레마: 친구?의 잘못을 목격한 나... 침묵? 아니면 내부고발


 원작소설이 있고 또 그걸 먼저 영화화한 1974년 이탈리아 영화도 있다는데

 1992년의 헐리우드 버전에서는 찰리의 이야기가 꽤 덧붙여졌다고 한다. 

 그래선지 몰라도 찰리의 이야기가 다소 작위적이다. 그럼에도 큰 상관없는 건 찰리의 이야기는 영화 머리와 끝에서 드러날 뿐, 

 (찰리가 동행하는) 프랭크소령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 몸통 내내 거의 잠복해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프랭크소령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프랭크소령을 연기하는 알 파치노의 매혹을 감상함으로서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꽤 볼만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프랭크소령을 표현하는 알 파치노는 단순히 '볼 수 없음'을 연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탱고 장면, 고혹적인 가브리엘 앤워의 손을 잡고 리드하는 그의 눈빛은 '뭔가'를 보고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자신만의 어둠속에서 자신이 상상하는 그녀와 눈맞추고 미소짓는다. 그래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쳐(찰리와 함께) 프랭크소령은 '내가 살아갈만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절망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프랭크 소령은 한 개인으로서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데

 일단 지독한 꼰대이고 근데 너무나 똑똑하고... 그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그는 굉장히 지혜롭고 관대할 수 있다. 그의 말과 행동, 스타일은 중산층의 도덕양식과 충돌한다. 지금 관점에선 더욱 불건전해 보이겠지만 막상 약자를 위해 나설 땐, 용기를 발휘하는 인물이라 그리스인 조르바스러운 매력이 있다.(그리스인 조르바도 지금 누군가에겐 거의 금서처럼 여겨질지도...)

 영화 후반 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는데, 말하자면 찰리가 프랭크를 도왔으니 이제는 프랭크가 찰리를 도울 차례이다. 그런데 이 찰리의 딜레마라는 게 따지고보면 정말 딜레마다. 애초 찰리의 친구들이 테러를 저지른 그 학교 교장이 어떤 문제가 있고 비리가 있는지 영화에서 딱히 나온 게 없을 뿐더러 그 재수없는 놈들도 정확히는 찰리의 친구랄 수 없다. 그래서 찰리가 정말 내부고발을 고민해볼 법한데 내부고발이 아닌 침묵에 도덕적 정당성을 실어주는 쪽은 오히려 교장 본인이다. 그가 하버드입학을 은밀한 거래조건으로 제안했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면 찰리는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팔아넘기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지점을 분명하게 짚은 프랭크의 멋진 연설로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꾸민다. 연설 끝나자마자 터져나오는 기립박수, 벅찬 음악이 박자가 딱 맞아떨어져 역시 지금 관점에서는 진부하고 조금 민망해진다. 그러니 그 클라이막스가 이제는 이 영화에서 가장 별로인 단점일지도 모른다. 그것만 제외하면 연출이나 음악은 나름 품위가 있고 장면 하나하나 즐길만한 곳이 충분한 영화이다. 



 공교롭게도...

 물론 공교로운 우연만은 아닌 모종의 필연이 작용했을 것 같지만,

 <여인의 향기>로부터 또 20여년 전... 알 파치노는 '양심적인 침묵'이 아닌 '양심적인 내부고발'을 선택하는 <형사 서피코>를 연기했다. 

 대부1과 대부2의 사이 즘이었을 것이다. 시드니 루멧이 연출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 경찰조직 내부에 만연한, 썩을대로 썩어 무수한 균의 뿌리가 박혀버린 '비리시스템'에 고군분투하는 서피코라는 실존인물을 표현한다.

 갑자기 그게 생각나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동전 던지는 살인마로 유명한 '하비에르 바르뎀'이 알 파치노를 신처럼 숭배하고, 그가 열렬히 사랑하는 알 파치노 연기가 이 영화 <형사 서피코>였다는, 그래서 서른 번 넘게 봤더라는... 

 내가 그처럼 그 특별한, 젊고 용맹한 알 파치노 연기의 진면목을 다 알아볼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점은 알 파치노가 열연하고 시드니 루멧이 담아내는 이 서피코라는 인물이 그 말 그대로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피코는 영웅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 나름 고뇌와 딜레마가 있겠지만 그의 행동과 결과가 너무나 정의롭기에 영화의 도덕적 정당성도 한쪽으로 확 쏠릴 수밖에 없는데 그걸 그렇게 단순하게 이 영화는 표현하지 않는다. 영화는 서피코와 경찰조직의 충돌이 끝장을 본 파국부터 시작되며 그 파국으로부터 서피코의 삶을 거슬러올라간다. 영화 원제대로 형사 서피코 이전 한 개인으로서 <서피코>를 관찰하는 쪽에 더 가깝다. 그게 그렇다고 헐리우드적인 휴머니티를 살렸다는 게 아니라 비록 사회적으로는 의심할 나위없이 정의로운 일을 했더라도 한 개인으로서는 그처럼 선악으로 단순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개인을 살려낸다는 것이다. 이게 내가 사회경험이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쉽게 설명하긴 어렵다.

 예를 들어, 범죄조직에게 꼬박꼬박 상납받는 이 영화 속 서피코의 동료경찰들은 그 누구도... 이 거대한 비리 전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이 나쁜 짓을 하는건 분명한데, 그들도 시스템化 된 이 내부비리에 저마다 순응하고 적응해버린 개인들인 것이다. 고로 그들 입장에서는 서피코가 이 조직의 '독'을 해독할 수도 없거니와 괜히 들쑤셔 대가리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결국 자기들같은 꼬리만 썰려나가게 만드는, 혼자 설치고다니는 미운오리새끼나 다름없다. 서피코 역시 상황이 극단화될 수록 '고립''과 목숨 자체를 위협받는 스트레스에 점점 히스테리컬해진다. 영화 중간 누가 뜬금없이 서피코에게 '자기연민'이 강하다는 식으로 평하는데 정말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궁지에 그는 몰려있다. 물론 그렇다고 큰 논점을 흐려서는 안된다. 경찰조직 비리는 당연히 부당하고 여기 저항하는 서피코의 선택과 행위는 당연히 정당하다. 설령 비리에 속한 개개인이 나름 사연이 있고 설령 서피코 개인에게 무슨 도덕적 흠결이 있다한들 그런 것들이 큰 논점을 흐리거나 바꿀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미디어는 그렇게 흐리거나 또는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것처럼 이상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있다. 시드니 루멧의 이 영화는 당연히 그런 잡것들과는 전혀 다르게... 깊이있는 시선으로 서피코를 바라보고 또 그렇게 알 파치노 역시 멋지게 표현한다. 

 <여인의 향기>와 <형사 서피코>를 나란히 놓고 보는게 흥미로울 것 같아서 얘기해봤다.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이고 알 파치노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몰입감이 있다. 그리고 비슷한 딜레마 속 서로 정반대의 선택에 놓인 알 파치노에 우리 자신을 이입하여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눠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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