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지' 염상섭

#디벨로퍼 라이프

by 김경만

2. ‘바지’ 염상섭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맑음

인천 토지의 바지(명의대여자)이자 법률상 소유자인 염상섭, 그리고 시행사 대표 임진태가 나를 찾아왔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충식이 “현장 첩보에 의하면 저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더는 기다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너무 오래 기다렸다. 월요일에 경매를 진행하자!’ 결정을 내린 그 순간이었다. 염상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 사장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냥… 처분만 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지금까지 얽힌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갔고, 임 사장이 건설사에 읍소해 도와주기로 했다고 하니 이번만 믿어보셨으면 합니다.”


나는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꼼꼼히 메모했다. 대화가 본질에서 벗어나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확히 기록하고,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식사하러 내려간 곳은 잠실 피렌체 빌딩 1층 상가 ‘삼국지’였다. 김치찌개를 먹으며 알게 된 사실은 단순했다. 법률상 채무자인 염상섭 역시 빌라건축의 수지를 매우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 말년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절박한 태도로 나에게 의지하며 어떻게든 건축을 이루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날, 빌라건축을 향한 첫 단추가 채워졌다. 밥값은 건물주이자 채권자인 내가 계산했다. 식사 후 시행사 사무실에 있는 임진태에게 나는 말했다.


“임 사장님, 빌라 이름이 ‘명성’ 뭐라던데, 너무 옛날식입니다. 우리 건물이 ‘피렌체하우스’인데, 내가 짓는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분양에도 훨씬 도움이 되지요. ‘무슨 빌라’ 이런 네이밍은 이제 고리타분합니다. 그리고 진입로에 전등을 깔아 밤에 들어오는 아빠들을 반기는 시스템을 만들어보세요. 주차장 진입 시 조명이 비행기 활주로처럼 쭉 켜지면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나는 이어 “집은 여자들이 사는 겁니다. 세일즈 포인트는 그쪽에 둬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에, 임진태가 환하게 웃으며 “그래서 싱크대는 3백만 원짜리로 하고, 엘리베이터도 3백 더 비싼 걸로 하려 했습니다. 맞습니다. 조명도 바로 해보겠습니다!”라고 맞장구쳤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는 조금씩 풀렸다. 염상섭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는지 골프 이야기를 꺼내며 충식과 스크린 골프를 치기로 했다.


염상섭은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며 대학 강의까지 나가던 사람이라 자존심과 프라이드가 강한 인물이었다. 그가 타고 온 차는 50만km를 주행했다는 검정 벤츠 E 클래스, 동그란 헤드라이트가 인상적인 오래된 모델이었다.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맑음

“사장님, 10시 30분에 출발하시죠?”


충식의 전화가 올 때까지도 나는 오늘의 ‘연기 콘셉트’를 정하지 못했다.

오래된 차이나 카라 슈트를 꺼내 입고, 구두는 닦지 않은 부츠로 마무리했다. 그 차림으로 빨간 벤츠 SLK 로드스터 시동을 걸고 충식을 태워 향한 곳은 구로 테크노타운 아파트형 공장 단지에 있는 ‘사운드 엠프’ 공장이었다.


인천 토지 소유자 염상섭이 부사장으로 있는 작은 오디오 회사이다. 규모는 작았고 생산 라인은 멈춰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블루투스로 작동되는 오디오 제품은 놀라울 만큼 완성도가 있었다. 염상섭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유튜브 노래를 바로 오디오로 나오게 하는 기능인데, 이게 저희, 회사 특허입니다. 부품을 살 돈이 없어 생산을 못 합니다. 지금 당장 5억만 투입하면 생산·수출 가능합니다.”


잠시 ‘엔젤 투자자로 참여해 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우선 인천 토지 부실채권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리는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시행사 명성산업개발 사장실에서 나는 ‘시공사와 체결한 계약서’를 보며 물었다.


“이 계약서가 뭡니까?”


계약서는 조잡했고, 기본적으로 채권자인 내 서명란조차 없었다. 게다가, 특약 사항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수정하기보다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가져가서 정리한 뒤 메일로 보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일어서려는데 염상섭이 붙잡았다.


“식사나 하고 가시죠.”


오후 2시가 넘어 있었고 아침도 먹지 않은 상태였기에, 소머리국밥집으로 향했다.

식사 중,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당 350만 원에 짓겠다면서 견적서도 없이 끌려가는 건축은 곤란합니다. 대한저축은행 PF를 이용해 직접 짓는 게 낫겠습니다. 제가 전화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114에 전화를 걸어 “수원 대한저축은행 연결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원지점에는 조 과장이 없었다. 여직원이 “안산지점에 계십니다”라고 말하기에 “조 과장 번호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고 휴대폰 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경매계의 전설, 멘토랜드 대표 나입니다. 조 과장, 많이 컸네?”


이에, 조 과장이 반가워하며 “아, 사장님! 번호를 아직도 쓰셨군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한저축은행에서 건축 PF도 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건축하고 있거든.”


조 과장이 바로 “그럼 제가 한번 찾아뵐까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통화를 마치고 잠실 피렌체빌딩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그 장면을 본 염상섭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제가 그동안 돈 마련하려고 많은 업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김 사장님처럼 전화 한 통으로 은행과 약속 잡는 사람을 처음 봅니다. 브로커들은 소개, 소개하며 된다, 안 된다만 했거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한저축은행은 과거 내가 (주)멘토랜드라는 경매 투자법인을 운영할 때 30억 원을 차용했었다. 리먼 사태로 금리가 11%까지 치솟았을 때도, 단 하루 연체 없이 이자를 냈다. 또, 법인을 청산할 때도 상환을 깔끔하게 마무리했었다. 그 살아 있는 신용이 오늘 이렇게 돌아오고 있었다. 감격한 염상섭이 밥값을 내겠다고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비용 처리됩니다.”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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