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전날 밤에 쓰는 단상

지난 24년간의 기억 톺아보기

by hnyb

전역 하루 전 마지막 밤 연등시간동안 사지방에서 남기는 글

7월 6일 당시에는 작가신청을 따로 해야한다는 것을 몰랐어서 리지 못할 뻔 했지만, 신청 후 이틀 뒤 다행히 승인이 나서 7월 8일 전역 다음 날이 된 지금이라도 올려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관이 강해보였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조금 더 약했던 거 같다. 조금 더 구체성있게 적자면 어른이나 선생님이 질문을 할 때면 또박또박 겉으로 말은 잘했으나, 이는 머리로부터 입장이 뚜렷하여 주관을 가졌다라기보다는 그렇게 하면 어른들이 칭찬을 해주고 좋아하니까, 또는 남들에게 돋보이고 싶어서와 같은 경쟁심리에서 비롯된 일종의 무의식적 연기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그때까지 내가 연기하던 모습은 아마도 게임과 수학을 잘하는 아이였을 것이다.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 선생님께서 칠판에 피자 그림을 그려서 분수를 알려주시고 1, 10, 100 단위를 나누기 10에 대한 곱셈과 나눗셈으로 정의한 후 나눗셈의 방향으로 계속하여 아이들에게 소수를 알려주시려던 적이 있었다. 뚜렷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때 대답을 잘해서 선생님께 칭찬을 많이 받았고, 나중에 선생님께서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 집에서도 칭찬을 받았었다. 또 어린이집에서 종종 조립블록과 퍼즐, 그림그리기로 조끼리 게임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게임에서도 좋은 기억이 많았던 거 같다. 이 긍정적인 피드백들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도 내 캐릭터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학원을 다니진 않았지만 학교에서라도 수학 수업만큼은 나름 열심히 들었고, 점심시간이나 쉬는시간, 방과후에는 동네친구들, 형들과 서바이벌 게임이나 피구, 경찰과 도둑과 같은 놀이를 하는 기대감과 재미로 매일을 보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이 돼가던 시절, 아파트 위층에 살던 어린이집 때부터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항상 함께 붙어다니며 지냈던 절친이 누나의 비평준화 고등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수지구로 이사를 갔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빈자리에 붕뜨던 생활을 하던 나는 그때쯤, 그보다 조금 더 매력을 느끼는 캐릭터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무척 유행하던 웹툰 중에 사실 싸움을 못하지만 무서운 인상과 카리스마만으로 학교 짱이 되는 그런 작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럽지만 그 작품의 주인공에게 받은 감명에 더해 평소 방학이면 보던 인기많은 사촌형들이 참 멋있어보였던 탓인지, 그때부터 나는 수학과 게임보다는 그런 '잘 노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하기에 이른다. 머리는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길렀고 무서운(?) 인상을 주기 위해 검은색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그런 인상을 구축해가며 생겼던 습관이 눈에 힘을 전혀 주지않고 상대를 볼 때 곁눈질하듯이 쳐다보는 좋지않은 버릇이었는데,18살 정도가 돼서야 스스로 인지하고 고칠 수 있었다. 그렇게 다니기 시작하고 얼마 가지않아 초등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다들 운동도 잘하고 훤칠한 멋있는 친구들이었고, 친구들이 모이면 어떤 FPS게임(15세 게임이라 그때는 그런 게 자랑거리였던 거 같다)을 해봤다느니, 피시방이나 찜질방을 가봤다느니와 같은 것들이 얘깃거리였다. 나는 사실 그런 걸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들킬까봐 조용히 말을 아끼고 그저 웹툰에서 본 대로 적당히 따라하듯 앉아있었다. 그러면 친구들이 'OO이는 당연히 해봤겠지~'와 같이 넘어가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한 고비를 넘기며 친해져갔던 거 같다. 그러던 중 한 번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두 친구가 몸싸움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 방과후에 소식을 듣고 학교 놀이터로 달려갔을 땐 한 친구가 다른 한 친구 배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상황은 금방 끝났지만, 그 후에 나는 그 일을 못 본 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볼품없던 나였지만, 일단 주먹다짐을 실제로 본 게 처음이었기에 싸움을 이긴 친구가 무서웠고, 싸움을 진 친구가 참 좋았지만 그 애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나까지 싸움을 이긴 친구를 중심으로 한 친구들에게 눈밖에 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사건을 이후로는 전처럼 친구들과 노는 게 속으로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무리에서 배제된 싸움에서 진 친구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고, 그렇게 재편된 무리에서는 이전과 달리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싸움에서 이긴 친구가 이사를 하게 돼서 전학을 감과 함께 학년이 바뀌어 반을 옮기면서, 무리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학기초, 나는 크게 어울리는 친구없이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지내며 방과후에는 대개 집에서 만화책을 보거나 같은 반 친구 한 두명과 청소년문화의집에 가서 시간을 보냈던 거 같다. 이외에 5학년 학기초의 기억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학원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었으면 했는지 이쯤부터 수학학원과 영어학원을 처음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영어학원에서 월말에 학원생 개별 칭찬 마일리지와 같은 개념인 유로를 화폐로 하여 경품을 구입하는 파티인 유로데이를 여는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학원을 얼마 다니지 않아 유로가 그렇게 많진 않던 터라, 원장님과 흥정을 하여 겨우 손바닥 반만 한 오르골 하나를 내 전재산으로 샀고, 집에 가져가서 자랑하려는 생각만 가진 채 유로데이가 끝나길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한 친구가 다가와 옆에 앉으며 말을 걸어주었다. '너는 왜 간식 같은거 아예 안 먹어?' 나는 온 지 얼마 안 돼서 유로가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자신의 유로로 과자랑 꼬치를 사주었고, 그 애와 말이 트게 된 나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수다를 떨며 친해지게 되었고 그 친구도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파티가 끝날 때쯤 그 친구가 말하기를 곧 자신의 생일파티를 한다고 했다. 생일파티는 영어학원이 있는 빌딩의 5층에 있던 트램펄린 파크에서 할 거 같고 날 초대하고 싶다고 했는데, 문제는 본인 말고도 자신의 친구들이 많이 와서 걔내들한테 얘기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얘기하며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을 가진 채 잠에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고, 그 애의 친구들이 다들 좋다고 해줘서 얼마 후 나는 그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게 되었 그것을 기점으로 그 무리의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물론 무리의 모든 친구들과 친했던 건 아니지만, 그중 서너 명과는 정말 친해졌기에 함께 노는 데에 적응해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후로부터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는 친구들 따라 롤도 배우고,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 거리에 있는 이마트 트레이더스까지 가서 피자를 사먹거나 찜질방도 같이 다니며 처음으로 이성친구도 사귀어보고 쭉 그 친구들과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친구 집에서 다같이 거실에 이불을 펴놓고 늦은 새벽까지 수다를 떨다가 자기도 했는데 유독 그 시간들이 정말 재미있었다.


그렇게 별탈없이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 부자의 그릇에서는, 진정한 부의 기준이란 돈을 많이 가진 상태가 아니라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큰돈이 들어왔을 때 대처하는 능력과 마음가짐이라고 하였는데, 돈이라는 카테고리만 대인관계로 바꿔준다면 중학교 시절의 나와 관련이 없지 않은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처음 중학교에 들어가니, 같은 초등학교였지만 잘 몰랐던 친구들이나 다른 초등학교에서 온 친구들이 정말 정신없이 말을 걸고 서로 소개를 주고받았다. 같이 놀던 친구들과 한 명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아 걱정이 많았지만, 입학 선물로 받은 빨간색 가방이 튀었기 때문인지 '빨간 가방 메고 다니는 걔'로 불리며 금방 같은 반은 물론이고 다른 반에서도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그중에서 적극적으로 같이 놀자며 다가와주던 다른 초등학교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따라서 생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축구나 풋살도 같이 다니고, 가보지 않은 다른 초등학교들 동네도 가보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그 친구와, 새로 사귄 친구들과 노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서로 같은 반이 되기도 했던 초등학교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소원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후 그 친구를 따라 학교 축구부와 밴드부 활동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초등학교 친구들과는 같이 노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내색은 못했지만 점점 소외감을 느꼈던 기억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성관계였다. 초등학교 간에 문화가 달랐던 건지, 중학생이 돼서 그런 건지 전에 초등학교에서 연애를 한다고 하면 나뿐 아니라 내 친구들 또한 사귀더라도 '뭐해'라거나 '잘자'가 서로 극한의 플러팅이었던 기억이 있다. 하트를 붙인다거나 좋아한다는 표현은 고백할 때 빼곤 상상도 못했던 게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친구들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낯을 덜 가렸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학기초에는 고장도 많이 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다가 번번이 썸붕으로 끝나 결국 1학년이 끝나갈 때까지 이성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사춘기를 맞이한 나는 주변의 다른 친구들처럼 연애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고, 이쯤되면 창피하지만 또다시 내가 선택한 연기 교보재는 웹툰 속 캐릭터였다. 당시 연애혁명이라는 크게 유행하던 웹툰에서 딱 그맘때쯤 여주인공의 과거 에피소드를 다루며 등장하는 전남친 포지션의 남자 캐릭터가 있었다. 1학년 때 항상 버벅거리고 고장나던 나와 반대로 그 캐릭터는 상당히 연애고수(?)였던 느낌이었고, 그런 점이 멋있게 느껴졌던 나는 막연히 그 캐릭터를 따라하며 연기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인 연기를 했던 유년기와는 다르게 그 캐릭터가 입는 패션, 했던 대사들까지 그대로 모방하였다.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2학에 들어와서는 이성친구를 두 번 사귀게 되었다. 처음은 한 달도 가지 않아 헤어지게 되었고 두 번째는 조금의 일들이 있었는데 솔직하지 못했던 나로 인해 친구들과 많은 오해가 생겼고, 나는 사귀고있던 그 친구와 멀어지기 싫어서 또 친구들과 크게 싸웠다. 그것과 무관하게 얼마 안 가 그 친구에게 대차게 차였고, 그 상태로 남은 2학년 동안은 그렇게 친구들과 데면데면 어색한 채로 쉬는시간과 점심시간마다 애들이 모여있는 곳을 피해가며 어떻게 시간을 때우며 겉돌면서 지내게 되었다. 예전에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이기도 하며 항상 스스로도 알고있던 지금 나의 큰 단점 중 하나인 감정표현에 서툰 것을 넘어서 절제하려는 버릇, 상대방에게 오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해서도록 아무리 가깝더라도 누군가에게 정서적인 의지를 하지 않으려 하게 되던 것이, 이 시점부터 생겼다는 걸 아는 데 적잖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그 시기에 내게 큰 교훈을 준 사건이 또 한 번 있었는데, 그렇게 겉돌며 지내던 중 하루는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나에 관해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고 이해는 됐지만 누적된 정서 속에 속상함이 북받쳐오르다 못해 울분이 생겼다. 그때 교실 앞문에 기대서있었는데, 교실에 들어오려는 한 친구가 좀 비키라는 말에 울컥해서 말다툼을 하다 그 친구를 때리기까지 해버렸다. 곧바로 부모님과 선생님이 알게 됐고 그날 밤에 감정이 진정되고나서 생각해보니, 결코 그 정도로 화를 낼 일도 아니었고 결국 그전에 내가 갖고있던 나의 감정을 내가 조절하지 못해 아무 관련도 없는 친구에게 화풀이를 한 거밖에 되지 않았다. 그 친구는 항상 교우들과 사이도 좋고 착한 친구였다. 게다가 사실 겉돌기 시작한 쯤부터 그 친구를 포함하여 성실하고 안정적으로 학교생활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남을 조금만 덜 의식하고 내가 하고싶은 걸 하면서 학교생활을 했으면 하는 후회를 가지고 있던 차라, 내심 몰래 동경하던 류의 친구들 중 하나였던 그 애에게 화풀이를 한 건 더더욱 미안함이 컸고 더한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다음 날 저녁에 그 친구에게 문자를 해서 그 친구 집 앞에 찾아가 사과를 했고, 얼마 후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삼자대면으로 사과를 했는데 오히려 날 보고 먼저 사과해줘서 고맙다며 사과를 받아주며 조곤조곤 얘기를 해주는 그 친구 얼굴을 보니 정말 부끄러웠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한동안 잠자리에 들 때마다 생각이 많아졌다. 나도 그 친구처럼 첫째로는 남과 문제가 있을 때면 1, 2학년 때의 나처럼 남에게 똑같이 뭐라하고 싸우기보다는 상대방을 품어주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둘째로는 이제 더는 모방, 연기하는 거 말고 내가 하고싶은 게 뭔지, 내가 어떤 성향을 갖고있는 사람인지도 알고싶어졌다. 그 친구는 미안한 마음도 크지만 이기적인 한 편의 생각으로는 미안함보다 방황하던 내게 본받고싶은 모습으로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준 고마움이 더 컸던 친구였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가던 중, 그런 일들을 겪으며 사춘기가 끝나가던 내게 공교롭게도 고등학교 입시설명회가 찾아왔다. 예전의 나였다면 대충 가서 시간만 때우다가 방과후 집에 가서 롤이나 할 생각을 했겠지만, 그날에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명회를 듣던 중 내 관심을 사로잡은 건 예술고등학교 얘기였다. 아직도 우리 집에는 내가 6살 때 그린 고흐의 풍경화 캔버스 그림이 벽에 걸려있을 만큼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내게 예고 얘기는 충동적인 결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학원가에 달려가 미술학원 원장님에게 일대일 상담을 받았고 집에 가서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그다음 주부터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처음 기초 연습을 할 때까지는 하는 만큼 곧바로 늘었고 만족감도 있었지만, 얼마 뒤 교습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입시미술반(예중예고준비반)으로 옮기면서 또래나,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의 넘지 못할 것만 같은 다져진 실력에 큰 좌절감을 맛보았다. 그래도 꿋꿋이 연습을 하던 도중 곧 알게 된 진짜 걸림돌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내신 성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후로 수학을 제외하고 학교공부를 등한시해왔던 내 내신 성적으로서는 예고에 가서 실기시험을 보기는커녕 서류에서부터 탈락하는 게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 한 편으로는 수학학원에서는, 그동안 숙제도 한 번 제대로 해오지 않고 결강이나 지각을 일삼던 나였음에도 이제와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하자 원장선생님께서 호의적으로 대해주시며 겨울방학 동안 직접 첨삭과 대면강의를 해주시며 이대로 쭉 열심히 해준다면 3학년 봄 학기가 시작될 때 특별반을 만들어주겠다는 조건까지 걸어주셨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지나갔고, 수학학원 원장님 말대로 나와 다른 중학교에서 외고를 준비하는 학생 한 명으로 구성된 새로 만들어진 반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생략된 바가 많지만 그 과정에서 예고 입시는 포기하게 되었다. 실기 중점 위주의 모집이 타 지역까지 확장하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2학년까지의 내신이 종합적으로 많이 낮아 원하던 특정 학교에는 해당 학교의 평가요소상 진학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컸고, 동시에 공부를 중점으로 진로설계를 해보는 건 어떠냐는 수학학원 원장선생님의 권유와,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림연습이나 수학문제만큼이나 많이 읽었던 책들에서 생긴 직업가치관의 영향도 컸다. 그래서 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미술학원을 그만두고,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확실히 하자면 여전히 뭐든지 성실히 임하는 모범생, 내지는 착한 아들은 아니었던 거 같다. 예고와 같은 근시안적 목표가 아닌 처음으로 가졌던 진로설계로서 꿈이 생겼고, 공부는 여전히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요긴한 수단으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에 들어서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그때까지 나는 학창시절에 진정 내가 얻어가야할 것들이 뭔지 모르는 채 오로지 대학입시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교과과정의 일환으로서 추후 고등교과 학습의 이해증진에만 초점을 맞춘 채로, 수업 중에는 학습적인 부분만을 선별하여 듣고 아닐 때는 선생님 몰래 고등수학 등 학원교재로 예습을 했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는 홀로 사라져 내내 학교 도서관에 박혀서 반 친구들도 내가 어디있는지 모를 정도로 책을 읽는 데에만 간을 할애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와서 생각하기를 내 선택으로 벌어진 일 중에서 가장 아쉬운 시기를 꼽으면 후보는 많지만 그래도 아마 이때를 고를 것이다. 물론 그런 중에서도 3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친구들이 정말 나를 잘 챙겨주고 놀아줘서 그나마 추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렇게까지 매몰적으로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생각해보면 이외 후보라 할 것들도 결국 이때 배워야할 것들을 제때 배웠다면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에. 아무튼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을 보냈고, 3학년 2학기가 끝날 때는 전과목 교과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2달만에 자퇴를 했다. 딱히 왕따를 당했다거나,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었다거나 하는 문제는 전혀 없었다. 첫 시험 성적도 목표한 만큼 좋게 나왔고, 반 친구들도 모두들 착하고 친절하게 대해줘서 지내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자퇴를 하게 되었을 때 주변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도 만류하며 꼭 그래야하는 이유가 있는지 정말 많이 물어보았다. '혼자 공부하는 게 편할거 같아서 수능 보려고요.'라고 일축했고 나 또한 그때는 어느정도 의식적으로는 그렇게 믿었지만, 사실은 개인적인 적응 문제였다. 지금의 내게도 비현실적인 문장처럼 느껴지지만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는 그제껏 공부를 하는 법은 배웠지만, 학교 밖 생활이 아닌 학교 안 생활을 즐겁게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던 거 같다. 그런 내게 있어 공부 자체와 학교생활은 완전한 일대일대응관계를 이루고있었던 거 같다. 볼륨상 생략돼야 할 것들이 많다보니 생략이 되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에 3학년 1년 동안 같은 반 친구였던 한 아이와 사귀게 되었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지역의 외고에 진학하게 되어 헤어졌고, 어렴풋한 기억에는 마지막까지 러한 일련의 중학교 1, 2, 3학년을 보내다보니 제 딴에는 관계라는 것 자체가 생겼다가도 친구 간에 오해가 생기거나 다툼이 생기거나, 현실적인 여건문제로 인해 금방 별거 아닌 사이로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적잖이 회의감을 느꼈던 거 같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잠시 후순위로 미루고 더욱 가치를 두고 집중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꿈에 있어, 꿈에 대한 이상과 열망을 어쩌면 과할 정도로 키워갔던 거 같다. 처음 자퇴를 하고서 몇 달간은 공부도 했지만 그동안 읽고싶었던 책들을 많이 읽었다. 솔직히 당시 내 어휘력의 한계로 특히 고전을 읽을 때면 읽다가 잘 안 읽혀서 몇 번이고 돌아오면서 읽었던 적이 많았지만, 구글에 단어를 검색해가면서 읽다보니 어떻게든 읽어는 졌던 거 같다. 그다음으로는 고전만큼이나 자서전이나 일반인들이 쓴 수기 비슷한 책들도 많이 읽었다. 두서없이 적다보니 말할 타이밍을 놓쳤는데, 내 꿈은 그때부터 쭉 경영가였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쯤에 잠시 검사가 꿈이었던 적이 있었지만 2학기쯤 경영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가 고등학교 1학년 경 뉴스를 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검사가 하는 일에 대해 알아보다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 느껴 꿈이 바뀌었다. 전문경영인보다는 자서전들의 영향인지 내 사업체를 꾸려서 키워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이상이 있었고, 때문에 내신을 준비하지 않으니 다니던 학원들도 그만두고 집과 독서실만을 오가며 혼자 공부하던 차에 주기적으로 매너리즘이 오거나 심한 외로움이 닥쳐올 때면 이후에 나만의 사업체를 경영하는 미래를 꿈꾸며, 지자체 컨퍼런스를 방청하거나 지역 공립기관에서 주최하는 기업과 관련된 참여형 행사들에 다니기도 하고, 아버지 직장의 복지로 받을 수 있는 ktx 이용권 가족혜택을 활용해 배낭여행을 다니며 수도권 외의 지방 곳곳을 구경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의 나이가 되었다. 단락을 나누긴 했지만, 17살 때와 일상이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많이 외로워졌다. 17살 때 친구들과 같이 봉사활동을 하던 것도 그만두게 되었고, 19살부터는 그나마 격주로 나가던 지역센터 봉사활동도 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잠시간 휴대폰을 2g폰으로 바꾸면서 이전에 알았던 친구들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겼던 것도 컸다. 그런 내게 있어 18살과 19살 2년 동안 나를 크게 보살펴준 건 강아지였다. 부모님이 맞벌이셨기에 독서실을 정기권을 끊고 다닌 것도 18살 말에 돼서였고, 그전까진 집에서 종일 강아지와 함께 공부를 했다. 기껏해야 실모를 풀러갈 때 일부러 생활소음이 있는 카페에 가서 풀던 것을 제외하면 집 외의 정해진 동선은 없었다. 이외에 기억이라 하면 독서실을 다니던 19살 시절 김치찌개 백반집 정도가 있겠다. 내가 다니던 독서실 근처에는 김치찌개 1인분에 8,000원을 하면서 밥이 무한리필이던 곳이 있었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는 날이 많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날에는 아침만 집에서 먹고 출발해, 그 백반집에 3시 전후로 가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던 날이 많았던 거 같다. 17살부터 19살까지는 달에 한 두번씩 지역마다 열리는 연주회에 가곤 했다. 시립악단부터 아트홀 소속단체, 청소년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연주자들이 대외활동의 일환으로 연주회를 열어주었기에 17~19살의 나이에도 부담없이 1~2만원대 입장료로 매월 주기적으로 취미활동을 할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까지 오는 길이면 대부분 20시에서 21시 정도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마다 이어폰으로 오아시스의 whatever 같은 적당히 활기차면서도 잔잔한 노래들을 들으면서 도로변을 지나오다보면 이상하게 때만큼은 나를 둘러싼 고립이 오히려 야릇하게 느껴지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 생긴 취미인지, 그 후로 지금까지도 줄 이어폰으로 노래 듣는 것과 밤 산책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아무튼 그렇게 2년이 지나갔고, 준비한 수능으로 원하던 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교 1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버텨오던 막연한 이상은 여전히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엔 그렇게 느껴졌다. 우선 입학식을 하지 못했다. 20학번은 입학식부터 코로나 비대면 정책에 직격을 맞아 입학식도 온라인 비대면으로 진행하였고, 강의 또한 줌강으로 대체되었다. 새터와 같은 공식행사는 그렇다 하더라도,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1학점 짜리 신입생 세미나 교양과목조차도 마지막 미팅만은 대면으로 한다만다 하다가 끝내 전면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을 정도였으니 부연설명은 구태여 필요없을 거 같다. 나는 정시로 들어와 다른 신입생들에 비해 카톡방 참여도 늦었고 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아는 것도, 추억도 없었기에 대화에 껴서 공감대를 찾기도 힘들었다. 갈 일이 없더라도 굳이 학교를 갈 수는 있었지만, 아는 이가 없었기에 학교에 가더라도 갔을 일이 사후적으로 생길 일은 역시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 휴학을 하게 됐다. 비대면 강의로도 충분히 질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으나, 그때의 나는 그보다 그동안 하고싶었던 것을 꾹 참고 견디던 시간들이 만성이 되어 그동안 충분히 해왔던 혼자하는 외로운 공부보다는 직접 사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듣고, 새로운 경험이나 도전을 해보고 싶었던 거 같다. 그래서 겨우 학교 선배 한 명을 통해 들어간 스타트업에서 기획하는 데 필요한 리서치와 다면검토를 함께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당장 수화기와 데이터시트 다루는 법부터 배워야했던 아무것도 모르는 20살짜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내가 맡은 일은 그나마 단순 노동(?)의 정성으로써 전문지식이 크게 필요한 바는 없었던 지라, 업무에 차츰 적응해나가며 배워가는 만족감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몇 달간은 일을 계속하게 되었고 조금 더 핵심적인 일을 해보고자 개인적으로 공부도 많이 해봤지만, 여전히 21살인 내가 지식과 숙련으로 다져진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으로서가 아닌 직장동료로서 인정받기는 능력상으로도 그들의 평가기준상으로도 녹록지 않았고 단순 업무를 넘어서 경영에 접근해볼 수 있는 기회는 요원해보였다. 그러던 차에 이쯤되니 꿈꾸던 이상이 여기에 또 없었다기보다는 현실 자체가 내가 공부하던 시험과는 다르게 그렇게 무언갈 바라고 노력한다고 드라마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걸 그제야 체감하게 되었던 거 같다. 그래도 아직 더 해보고 직접 부딪혀보고싶었다. 다니던 스타트업을 나와 그동안 안 쓰고 깨작깨작 모은 돈에 더해 대출을 받아 꿈에 그리던 창업을 시작했다. 본래 하고싶던 아이템은 따로 있었지만 초기자본의 한계로 우선 기존 오프라인 위주의 매장들의 재고를 받아 처분하여 수익을 얻는 일로 시작했다. 후에는 AI전공을 한 직원과 함께 부동산 투자를 돕는 앱이나 자영업을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전문서비스를 받기에는 가벼운 애로나 분쟁이고, 혼자서는 해결하기에는 무거운 사안에 관해 관련 사례나 정보를 수집하여 몇 가지 요긴한 해결책이나 접근경로를 온라인으로 제공해주는 앱을 개발하는 일도 시도해봤지만 중간중간 법률적인 문제에 더해 마침 코로나 이후 시기 시장에 해당분야의 실무경험을 갖춘 이들이 전문직자격증을 필두로 선점을 해놨던 터라 수포로 돌아가는 등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이후 몇 가지 일을 더 시도해봤고 어느정도 수익도 올렸지만 그렇게 안정화되었을 즈음 심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BEP가 본전이라도 건지면 그나마 호재, 그것마저도 아니면 얼마간은 거의 줄곧 마이너스였다. 유지를 위해서 주간엔 일을 하면서 짬짬이 과외도 하고 가끔 체력이 되면 야간에는 쿠팡 심야조에 갔다가 퇴근하고 잠깐 잔 뒤에 다시 출근했던 날도 더러 있었다. 그때는 그래도 점점 실적이 개선되는 게 보였고 자신감도 있던 터라 열정이 샘솓았지만 이제 되려 안정화가 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성장이 멈췄다는 것이기도 하기에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일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두 번째 자퇴마저 선택했기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나로서는 잠시 갈피를 잃은 느낌이었다. 마침 그러던 차에 주변으로부터 부동산 투자 정보를 듣게 되었고 방황하고 있던 나는 평소와 달리 쉽게 유혹에 넘어갔던 거 같다. 사기였다.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그간 모아둔 돈을 잃었고, 무엇보다 16살 때부터 도서관에 박혀 남들이 쓴 이야기를 읽으며 키워온 내 안에 그나마 남아있던 열정을 깡그리 고갈시키는 데 결정타를 날린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쯤 12년간 키우던 강아지도 내 곁을 떠났다. 빈털터리가 된듯한 아림을 안고 나는 남은 힘을 짜내 되는 대로 일을 정리하고선 도망치듯이 군대로 입대를 했다.


군대를 입대하는 과정에서도 여간 마음대로 되는 법은 없었다. 예전에 혹시나 넣어봤던 카투사는 떨어졌었고, 내 상황상 이제와서 공군을 생각해보기에는 헌혈을 위시한 준비기간이 필요했고 3개월이 더해지는 복무기간도 부담이 컸다. 그래서 기존에 갖고있던 자격증들로 육군 기술행정병에 지원하고자 했고, 1순위와 2순위로 지망한 TMO와 M/W 장비운용병은 탈락, 3순위로 지망한 TOD 합격하여 23살이 되던 해 12월 말에 입대를 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지만 입대일 다음날이 아버지 생신이었고, 그동안 내 일은 내가 감내하고 이겨내면 되는 줄만 알고 그걸 보는 주변 사람들의 심정은 헤아리지 못한 채 지내온 시간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기에 이렇게 곧바로 도피하는 거보다는 책임감을 가져보고자 3차 확정이 나기 전에 지원을 취소하고 2주 정도 뒤에 있는 모집병에 다시 지원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학적이 없는 상태라 그런가, 공교롭게도 기행병 지원을 취소하자마자 며칠 뒤 현역징집병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문제는 해당 입영일자가 바로 다음달 초였기에 다음기수 기술행정병을 지원해서 합격하기까지의 여유기간이 없었고, 해당 일자 전의 기행병 추가모집에서 둘러보자니 남은 거라곤 취사병이나 TMR과 같은 비선호 주특기번호뿐이었다. 그래서 몇 차례 고민을 하다가 훈련소에서 배정하는 다양한 주특기나 면접으로 선발하는 부대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현역병으로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배정받은 신병훈련소는 강원도 화천으로, 강원도 철원 바로 옆에 있는 동네면서 백골부대와 과거 이기자부대 사이에 껴있는 유명하진 않지만 겨울엔 꽤 춥고 여름엔 꽤 덥고 습한 곳이었다. 훈련소 생활은 누구나 으레 그렇듯 정신없이 흘러갔다. 같은 생활관에는 프로 야구선수를 하다온 동기부터, 태권도 국가대표를 하다온 동기, 웹툰작가 지망생 동기, 대학교를 다니다 의대 군반수를 하러 온 동기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또래들 사이에서의 순박한 웃음이나 무료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찰나의 휴식도 잠시, 훈련소 기간이 끝을 향해가고 고대하던 상급부대 면접일정과 자대 배치 일정이 공개되었으나 강원도 화천이었어서 그런지, 해의 첫 기수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GP/GOP나 해안경계부대를 제외하고 우리 훈련소에 면접을 보러오는 부대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에 더해 주특기 배정에서도 지원할 수 있는 TO에는 군악대나 본부경계근무병, 통신가설병만이 있어 내가 지원할 만한 선택지는 딱히 없었다. 조금 아쉽긴 했으나 입대를 하고나서 막상 또래들 사이에서 다시 어울리며 지내다보니 이상하게도 예상과 달리 틀어져도 큰 걱정은 들지 않았기에 꽤 동요없이 받아들였던 거 같다. 그렇게 나는 얼마 뒤 강원도 화천 산지 사이에 있는 한 포병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특기번호를 일반포수로 배정받아 왔지만, 자대에 온 첫날 포대장(중대장)과의 면담에서 곧바로 FDC라는 분과로 보직이 옮겨졌다. 처음에는 어떤 보직인지도 모르고 일단 시키는 대로 왔으나, 나중에 알기로는 포대 지휘관을 보좌하거나 유사시 지휘관 대리임무수행을 하는 컨트롤타워 같은 역할이었다. 전역이 바로 내일인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적성에 잘 맞았던 거 같아 그때의 포대장님께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그 후로 군생활 또한 모두가 큰 골격에서는 비슷하듯, 나 또한 같았다. 훈련을 할 때면 전준태 후 신진지에 가서 진지점령하고 비닐밥 먹다가 야간훈련까지 마치면 모피랑 침낭 가지고 숙영하고, 평소 일과 땐 정비나 작업, 작전 관련 일 등을 했다. 생활도 중요했지만 내게 있어서는 군대에 있는 1년 6개월 동안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자대에 와서 2달 조금 남짓한 기간동안은 밤잠을 많이 설쳤다. 부대생활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지나고보니 후회되는 것들이나, 정작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던 내 아쉬운 점들과 단점들이 그제야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럴 때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옆에 있는 메모장에 뭐라도 휘갈기고 다시 눕기를 반복하다보니 자연스레 잠에 드는 시간은 늦어져만 갔다. 그런 일, 이병 시절을 거쳐 2개월 빨리 달긴 했지만 상병쯤 됐을 때부터는 비록 후임들이지만 정말 갖가지 다양한 배경이나 성향을 가진 애들로부터 되려 배운 점도 많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들을 대하면서 내가 모르던 나의 부분들을 발견할 기회를 얻은 적도 많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으로는 그동안 가져왔고 도전해봤던 꿈에 대해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놓아주게 되었다. 그 결심과 맞바꾸게 된 진로로는 경직 행정고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동기는 두 가지로 간단했다. 첫째로 몇 년간 사업체에서 일을 해보면서 중앙부처와 닿을 일이 있을 때면 사무관 개인이 직접 응대를 하진 않더라도 재량에 따라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개중에는 주무관님을 통해 긍정적인 도움을 받았던 적도 있었기에, 직업가치관적으로 전문성과 명예, 영향력을 중시하는 내게 적잖이 큰 매력을 느끼게 했던 것이 있었다. 둘째로는 불안정한 도전은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역설적으로 고시가 무엇보다 가장 큰 불확실성을 동반한 선택지 중 하나기는 하지만, 고시에 합격한 후로는 욕심을 버리고 안정적으로 다른 목표들을 하나하나씩 이뤄가며 살아가기에는 여건이 좋아보였기에 이끌리는 점이 있었다. 공부에 손을 놓은지 오래라 힘든 일이 산재해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스스로의 이끌림이 생겼을 때 망설이다 어중간해져서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역 후 입대 전 마저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9월쯤 마치대로면 5년만이지만 다시 샤프를 잡아보고 싶다.


그저께 전역 전 마지막 평일이라고 저녁에 대대 인사과장님이 고기를 사주신다고 해서 같이 차를 타고 다녀왔는데, 복귀하는 길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문뜩 물어보시기를 '그런데 후회 안 해?'라고 하셨다. 솔직히 결과론적으로 후회를 아예 안 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에둘러 말씀드렸다. '해봤다는 데 의의를 두려고 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정말 뛰어난 경험이나 성취를 이루고 성공한 사람들 또한 경험의 폭이나 질적으로 아무나 걸어보지 못하는 길과 그 길의 답을 아는 경우는 있더라도 그분들 또한 매 순간순간 선택을 해야할 때마다 여러가지 선택지에서 하나씩을 골랐을 뿐이고 그것들이 연쇄작용하여 지금의 인격을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르게 말하면 결국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자기가 걸어보지 못한 길은 경험적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고, 자신이 걸어본 길만을 알 수 있다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 아쉽고 후회되는 부분들은 많지만 어디까지나 부분들에 있어서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으면서, 아쉬운 부분들 또한 잃은 게 있는 만큼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좋은 길을 걸어오진 못했고 결과도 썩 형편없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 했고, 이렇게까지 해보지 않았다면 비정상적이니 만큼 오래 품어온 꿈을 놓아주지도 못했을 거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시간이 지나 내가 어른의 위치에 있게 됐을 때, 내가 겪고 보내온 시간들이 합당한 값어치를 하여 내가 아이들에게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으로 느껴졌으면 좋겠다. 그런 것이 된다면 그때쯤 가서는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이렇게 글로써 정리해야하는 생각들을 더 이상 상처가 아닌 굳은살로 좋게 여기며 조금은 더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로 25살이 되었다. 직업가치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거 같지만 삶의 가치관과 목표는 꽤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지금은 이 글을 비공개해두지만 꼭 써두려는 이유도 그와 맥락이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이유에서다. 지금과 같이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에는 그 당시의 내 태도나 미숙함이 그대로 담겨 드러나곤 한다. 적어도 내가 썼던 글을 시간이 지나 내가 다시 볼 때는 그것이 느껴지곤 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17살 때 썼던 글을 18살이 되어 보면 그랬고, 또다시 19살이 18살 때의 메모를 보면 또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이 글을 비공개해두지 않아도 되고, 내가 이 글을 우습게 추억하며 다시 볼 수 있을 때를 위한 엔터테인먼트로 남겨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