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신의 아들이었고 자신이 하는 모든 말에 사람들이 의의를 갖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경에 항상 나오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는 말은 믿으면 진실이 될까?
자, 전 세계의 수많은 신도는 영생을 살고 있을까? 믿음이 있다면 지속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 영생을 살고 있다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 전부 죽었을 텐데 과연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는 것은 거짓이 될까?
종교를 부정하거나 예수가 사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 본디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수가 이 말을 하지 않았거나, 제자가 의미를 곡해하여 글을 쓴 것.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지,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결정하고 실행할지에 대한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한 명의 사람으로서, 목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했지만 신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만큼 행실에 신경을 썼다. 이윽고 신의 아들이 되었을 때 실제 자신이 하는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줬으며 믿음이 있다면 바다 위를 걷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믿음은 쉽게 깨진 것일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정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다. 외견을 가꾸기 위해 성형을 하거나 화장을 한다. 변하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조금 더 내 마음에 들도록 꾸밀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은 내 마음대로, 완벽히 통제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저 내가 결정한 방향이 올바른지 항상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이야기를 들고 방향을 정하기도 하고, 그를 뒤따라 가기도 한다. 종교도 그런 연유에서 탄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영생을 가는 것을 염원했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이 있으면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 역시 계속해서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어떠한 숙명을 가졌기에 태어났을까. 이대로면 이 행성에 0.1%의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데 이렇게 살아서 뭐가 된다.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뭔가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같은 신을 떠올리기는 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나의 생각과 결정이라는 것이다.
내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게 주어진 인생은 내가 개척하며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가능하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숙명이지 않을까? 결국 예수께서 가라사대~ 같은 말을 빌어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죽지 않고 오래 살고 싶은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믿으면 복이 오고, 믿으면 이루어지고 하는 것들은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많은 자기 계발서에도 나온다. 믿음이 신념이 되고, 행동이 되기 때문에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기에 이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