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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연 Dec 19. 2019

28년의 기다림!

이땅의 모든 무명씨들에게 바치는  KBS라디오 연기대상

28년의 기다림!
택시 운전, 대리 기사..
그 외 숱한 투잡으로
사랑하는 라디오 드라마와
생계 사이의 외줄타기를 지속해온,
연기밖에 몰랐던 한 남자!

그는 어제
28년의 기다림 끝에
2019 KBS 라디오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KBS 라디오연기대상! 최우수상 장호비!
(자랑스런 내 동기^^)

[2019 년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연기 대상 시상식]이 열린 어제.
나는 브래드 피트 주연의 최신 영화 <애드 아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라
사람들(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속에 섞이고자
전속 1년차였던 1992년 겨울 이래 처음으로
KBS라디오 공개홀을 찾았다

그곳은 내게 날개를 달아준 지
딱 1년만에
그 날개를 다시 처참히 분질르고 꺾어준..
나 한사람만의 인생사에선 아주 미묘한..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통한의 장소다
난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고
시상식따위에 오를 일도 없이 살아왔지만
<애드 아스트라>속의 브래드 피트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만 달아나.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야.
부댖겨도 섞여있어야, 그게 진짜 살아있는 거야.'

<흐르는 강물처럼>이래
브래드 피트의 말을 잘 들어 온 나는
회한 따위 접어버리고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그곳으로 27년만의 나들이를 했다
그곳에 가기로 결심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선후배, 동기들, 그 가족들, 성우지망생과 팬들이 가득한 라디오 공개홀...

오프닝 음악과 함께
겨울왕국 시스터즈인
엘사(소연)와 안나(박지윤)역의 두 후배가
겨울왕국삘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짠 등장하자
관객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성우가 애니속 캐릭터보다 이쁘기 있기 없기?!)

공개방송은 각분야 시상식과 수상소감,
성우들의 연기,
초대가수의 노래가 적절히 버무려진
구성이었는데

영상자료가 없는
라디오드라마인지라
몇몇 <KBS 무대> 속 주요 장면들을 출연성우들이 직접 나와 연기해 보는 재미를 더했다

(효과맨도 완전 열연!)
그때 출연진 중 가장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마치 연극무대에 선 것처럼
엄청난 몸놀림으로
매쏘드 연기란 게 뭔질 몸소 보여준 남자.
그남자 성우가 바로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이자
최우수연기상의 주인공인 장호비다

그는,
내 동기 호비형은
호랑이가 날아오른다는 이름과는 달리
허세도 없고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하고 예의바르다

28년전 첨 만났을 때
연기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리 둥글둥글할까.. 의아했던 호비형..
그때와 달라진 건
약간, 아주우 약간 늘어난 뱃살과 흰머리뿐
순하고 맑은 눈빛은 그때와 똑같았다

후보자 소개와 함께 그들의 목소리 연기가 무대에 울려퍼지고

마침내
"수상자는.....
장.호.비!"
라고 발표되었을 때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수상소감..

생계 때문에 다른 일을 해야했지만
혹시 섭외 전화라도 올새라
녹음시간에 지장 없는 시간에만 험한 일을 했다는..
이런 큰 상을 받게 될 줄 정말 몰랐다며
아들 고생에 맘졸이신 어머님을 떠올리며 잠시 울컥하던 그...

숨기고 싶었을 치부를 당당하게 밝히는 그의 수상소감에
많은 관객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장호비!
장호비!
장호비!

연예인, 하면 사람들은 화려한 삶을 연상하지만
대다수의 방송연기자들은
팍팍한 삶을 산다
나도 부침이 있었기에 잘 알지만..
뭐 그래도 싱글이거나  배우자와 맞벌이 중이라면 적은 벌이로도 적당히 버텨볼 수 있지만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의 입장이 되면 언제 올지 모르는 섭외전화만 기다리며 손가락 빨 수는 없다
그럴 때 이 책임감 넘치는 남자 장호비는 밤잠을 아껴 대리 운전 기사로 택시기사로 (또 이것 저것 했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 ㅠ.ㅠ) 나섰던 것이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그는 원래 롯데월드 예술감독님이었다
전속성우 월급과는 비교도 안되게 높은 수입, 게다가 안정적이기까지 한 그 꿀직장을 마다하고
오로지 연기가 좋아 성우가 되었는데..
들쭉날쭉한 수입에 몸도 맘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남들보다 빨리, 앞으로 치고 나간 동기들이 유난히 많았던 우리 기수.
그도 나처럼 뒷줄로 빠진 설움을 겪었었겠지..
그럼에도 좋아하는 그 일을
놓을 수가 없었겠지..
칼자루 쥔 자가 불러주지 않으면 답이 없는 예인의 삶..
그래도 그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버티고 버텨서
결국 그는 KBS성우
최고의 영예인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이날의 수상 소식은

인터넷 신문에 작은 기사 하나 실리지 않는

우리 성우들만의 작은 축제로 끝났지만


그의 수상은
나를 비롯한 또다른 수많은 장호비들에게
위안과 격려가 되었다.


모두가 최고가 될 순 없다
최고의 자리에 계속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단 한번도 정점에 오르지 못하고 끝난다해도..
좋아하는 일로 얼마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
게다가 수상의 영광까지 얻어걸린다면? ^^

어제 나는
부끄럼 없이
자신의 열정과 꿈을 지켜내온
동기 형,
성우 장호비 덕분에
마치 내가 상을 받은 것처럼
너무나 너무나 행복했다

비록 수상의 영광을 비켜갔대도

그 자리에서 그의 기쁨을 함께 한 모두가 승자였다


거개가 무명인 우리 모두는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나름의 피나는 노력으로

방송가라는 거대한 태양계 속을,

그 먼 언저리를 뱅글 뱅글 열심히 공전하고 있다.

그럴싸한 거대 행성의 이름을 차지하는 것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나머지는 모두 이름도 없이 그 엄청난 속도를 견뎌내며 정신없는 일상의 자전과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공간 속의 공전을 견뎌낸다


별똥별로 스러질지라도

어떤 행운도 끝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가난을 마다 않고

불안정한 세계에서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응원한다

이 감동의 스토리를 이따구 수준으로 급 정리해 올리자니 죄송스럽지만
안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는 뚝심으로 기록으로 남긴다

구시대의 유물 같은
라디오드라마가 아직도
공영방송 KBS를 통해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둔다
콩에서 언제든 들을 수 있다
수시 극본공모제가 있으니
재능있는 작가분들의 도전도 권유해본다^^

단 한분이라도 이글을 통해
라디오 드라마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참참
어제는 음력 11월 18일
호비형의 생일이었단다
마지막까지 수상자를 비밀로 지키는 전통 탓에
호비형은
진짜 기분 좋은 깜짝 생일 선물을 받은 게 됐다고.

하루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그리고..
형은 우리에게 참희망을 주었어
고마워!

#성우장호비 #KBS성우연기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장호비
#28년만의큰상
#KBS라디오드라마


(수상식 이튿날인 2019년 12월 15일, 스마트폰으로 페북에 올린 글을

역시 스마트폰으로 살짝 다듬었습니다

여전히 허접하지만 미리 고백했듯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ADHD에 컴맹이기까지 하니 오타나 부족한 비쥬얼 같은 건 조금 양해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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