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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연 Dec 24. 2019

샘물이를 떠나보내고

           

어떤 이야기가 있다.

세상을 향해 꼭 하고 싶은 이야기.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

그런데 그 얘길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맺어야할지 전혀 알 수 없다면?

그건... 그 이야기가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것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나의 상처를 우선 보듬어야 한다는 자기애의 발로.

나는 사랑하는 나 자신을 위해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조금 전 이곳 브런치에 올린 글 <특수요원 안샘물의 노후>에 등장하는 나의 강아지 샘물이가 지난 11월 1일 금요일, 세상을 떠났다.


그 날은 몰려있던 강의가 끝나는 날이었다. 나는 그 주 내내 샘물이에게 말하곤 했었다.     


미안해, 언니가 요즘 바빠서 널 병원에 데려갈 수가 없어. 금요일 강의가 끝나면 꼭 병원에 가보자.

    

<특수 요원 안샘물의 노후>라는 글을 쓴지 어느새 2년여.

샘물이는 조금씩 조금씩 더 노쇄해 가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샘물이와의 이별이 곧 찾아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날 아침엔

‘어쩌면 그 ‘그 날’이 결국 와버린 걸 수도 있겠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그냥 놔둬도 죽고 수술을 해도 죽을 거’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기 전 까지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음이 터진 나를 보고 마음이 약해진 의사 선생님은 ‘혹시 모르니 수술을 해보자’고 의견을 바꿨다. 잘만하면 1년은 더 살 수도 있다면서.

나는 한 가닥 희망에 모든 걸 걸고 수술에 동의했고 수술준비를 기다리느라 십 분쯤 더 그 아일 안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어려서 다른 개에게 물려 다른 강아지들을 무서워했던 샘물이. 그토록 싫어하던 동물병원에 그 앨 계속 둘 수 없어 나는 작은 종이 상자에 든 샘물일 받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앉은뱅이 밥상을 거실 한가운데 펼치고 그곳에 샘물일 눕혔다. 그리고 누워있는 샘물이 주변에 촛불과 향을 피웠다.


처음 알았다. 죽은 생명체의 코에서는 어떤 체액이 계속 흘러나온다는 걸.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샘물이가 더 살아있는 듯 느껴졌다. 감기에 걸려 콧물이라도 흘리는 것 처럼.      


다음 날, 남편네 집안 선산에 그 앨 묻었다.

동네 목공소에 주문해두었던 소나무 관에 샘물이가 아끼던 장난감이며 간식, 그 외 유품들을 함께 넣어주었다. 15년간 썼던 샘물이 산책용 목줄 손잡이에는 이렇게 적었다.     


안샘물

2004~2019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며칠 간, 나는 미친 듯이 청소를 했다.

샘물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그것은 이론이다.

보이지 않아야, 그 대상을 떠올리게 할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아야 그 이별이 쉬워진다는 이론. 눈에 보이지 않는 유전자 가루 까지도 다 없애야만 한다는 이론.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내 귀엔 어디선가 계속 샘물이의 소리가 들려왔고 그 애가 더 이상 집에 없다는 사실을 깜빡 깜빡 잊곤 했다.

그건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 집 안 어디건 내가 있는 곳엔 샘물이가 있다는.     


나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일 없는 날이면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했고 그도 지치면 동네 도서관으로 출퇴근을 했다. 한 달 쯤?     

그 동안 실수도 많이 했다.

혼자 엉뚱한 약속 장소에 가서 앉아 있기도 했고

집안에서 그릇을 깨고 엎은 건 셀 수도 없으며

아들 아이 영재원 신청 기간까지 놓치고 말았으니까.

아이의 교육청 영재원 교육 기회를 빼앗은 엄마라니!

(하지만 대입보다도 자주 바뀌는 교육청 영재원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 5학년 수학 영재 과정에 한해 시험 없이 상위 50% 자동 진급할 거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더니 그깟 문자 한 번, 공문서 한 번 날려놓고 삼일 내에 다른 과정 준비생들처럼 인터넷 신청을 따로 하라고 했었나 보다. 그 문서를 얼핏 본 것 같긴 한데... 그런 걸 기억할 여력이 내겐 없었다. 아들.. 미안하다)     


그러나.

어쨌든.

모든 것은 지나간다.     


첫 날의 울음이 이튿날 반으로 줄더니 그 이후론 계속 줄어 어떤 날은 한 번도 울지 않고 지나가기도 했다.

여전히 샘물이가 곳곳에서 떠오르지만... 그래도 이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시간 외에 가장 큰 도움이 된 건 한 스님의 말씀과 영화 <레이싱 인 더 레인>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샘물인 다음 생에도 당신의 인연으로 찾아올 거라고,      

<레이싱 인 더 레인>이란 영화에서는 죽은 강아지가 환생한 듯 한 소년이 주인공 앞에 등장하며 영화가 끝난다.   

                      



결국

‘희망’이다.

인간은 희망 없인 살 수 없다.

언젠가 그 영혼을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

못 다 한 사랑을 그 때엔 다 주고야 말겠다는 희망...     



어디서 시작해 어떻게 맺어야할지 알 수 없었던

샘물이와의 이별이야기는 이제 이렇게 끝을 맺어간다.

사랑했으나

아쉬움이 많았고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더 뜨겁게 사랑할 수도 있겠단 희망으로 견뎌내기로 했다는...     


샘물일 떠나보내고

지난해에 엄마를 잃은 한 소녀와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넌 어때?

엄마를 잃은 네 슬픔을 샘물이와의 이별과 견줄 순 없겠지만 궁금해.

넌 그 아픔을 주변 사람과 얘기 나누면서 푸는 게 더 좋으니, 아니면 혼자서 가슴 속에 품는 게 좋으니?”     


눈만 마주치면 샘물이 얘길 나누는 나와 아들에게 남편이 말했던 거다.     

“자꾸 얘기하면 뭐해. 더 슬프지. 나는 그냥 혼자 묻어두고 안 떠올리는 게 더 좋아.”     


소녀는 촉촉한 눈망울로 말했다.     

“어떤 땐 얘기하고 싶고 어떤 땐 얘기하지 않는 게 더 좋기도 하고 다 달라요.”     


지혜로운 아이다.     


사실은 남편도 나도 우리 아이도 각자 그렇게 하고 있었던 거다.

빈도에 경중이 있을 뿐.


사람들이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은 다 같고 또 다 다르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으나 지금은 얘기하고 싶었다.

오로지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쓰는 동안 수도 없이 펑펑 울어댔으니 분명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글이란 결국 쓰는 일도 읽는 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     


끝으로 샘물이에게 덧붙인다.     

“샘물아, 너를 만나 사랑한 것이 나에겐 정말 행복했단다. 난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널 사랑했어. 너도 그랬지? 너 자신을 위해 나를 사랑해 준거지? 왜냐하면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었던 거니까. 다음 생에 다시 만난다면 나는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널 더 더 많이 사랑할 거야.

고마웠다. 한 생애를 나와 함께 해주어서...

살아있던 모든 순간 나에게 ‘기쁨의 샘물’이 되어주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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